<K팝 스타>를 보며 : 나는 Baa급이다
요즘 난 참 ‘별짓’을 다 한다. <K팝 스타>를 본다. 지상파 방송이라면 KBS1의 월요일 저녁 <우리말 겨루기>와 화요일 같은 시간대의 <러브 인 아시아> 외에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아 온 내게는 아주 특별한 짓이다. 그러니 ‘별짓’이라 아니할 수 없다.
지난해, 주변에서 ‘악동 뮤지션’ 어쩌고 할 때도, 나는 그 이름조차 처음 들어보는지라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고사하고 가수인지조차도 몰랐다. (하기야, 오래 전 가수 ‘비’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사내라면 그런 야리야리한 이름 따위를 붙였을 리 없다 싶어서, 나는 그가 여자 가수인 줄만 알았다. 그러니 무슨 퀴즈에서 아무개와 무슨 무슨 그룹이 음식점에서 만나면 몇 자리가 필요하냐는 식의 문제가 나오면 출제자의 양식(?)을 욕할 정도로, 무지무지 무식하다. 그룹 멤버들의 남녀 구분조차도 까막눈이니 머릿수 따위는 더욱 깜깜절벽. ‘개콘’의 유행어 따위는 그 유행어가 사라질 무렵쯤에나 겨우 해득할 정도로 굼벵이인 것은 당연지사이고.)
그러던 내가 얼마 전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K팝 스타>를 본 뒤로는 코를 박고 본다. 나중에 들으니 SBS에서 일요일 저녁에 한다는데 케이블 채널에서만 노는 내가 그런 걸 알 턱이 있나. 요행히 그날 무슨 채널에서인가에서 일요일 낮에 해주는 걸 대하게 되어, 그날부터 코를 박고 보게 되었다. 아마 2라운드 중반 이후쯤부터가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도 그 프로그램에는 치열함이 있다. 대충 입으로 떠들고 과장된 몸짓 몇 개와 계산된 바보 놀음으로 얼렁뚱땅 때우고 보는 현대판 광대들에게서는 맛볼 수 없는 절절한 애씀이 드러난다. 그 때문이었을 게다. 90년대 이후의 가수들에게서 보이던 형편없는 가창력과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엉터리 가사를 더욱 알아듣기 힘들게 만드는 못된 가사 전달력 때문에 아예 요즘 ‘아해들’ 노래라면 들을 생각조차 안 하던 나를 그들은 댓바람에 돌려 세웠다.
거기에 더하여, 박진영의 적확한 심사평은 출연자들 못지않게 그에 대한 나의 기존관념을 완전히 바뀌게 만들었다. 내가 알고 있던 유희열과 음악 실력에서 한참 차이가 나리라던 나의 엉터리 선입견을 한 방에 뜯어고쳤다.
얼치기 음악 애호가인 내가 꼽는 우수 가수의 조건이란 세 가지다. 가창력과 음악적 소양, 그리고 딴따라 기질의 종합 세트. 그 종합 세트의 품질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야 한다.
나아가 이 세 가지 요건들은 그 안에 각각의 세목을 가진다. 가창력 부문에서는 가사 전달력을 기본으로 하여 발성/해석/감정 등이 조화를 이루거나 완성도가 높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세분하면 음악적 소양은 ‘화성학/작곡+편곡+변조 능력/작사+개사 내용/연주 실력/곡 해석 능력’의 종합이고, 딴따라 기질은 ‘흡인력/무대 매너/표정/제스처+춤’ 등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노력이나 연마로 어느 정도의 수준에는 오를 수 있다. 물론 그 가능 정도는 노력하는 이의 치열함에 달려 있지만...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반드시 빠지거나 꼭 빼내야 할 것은 ‘겉멋 들기’와 ‘베끼기’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우수한, 제대로 된 가수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결정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창의력(뒤집기 발상)이 가미된 끼’와 청중을 배려하는 심성이다.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에 오르려면 기능이 돋보이는 장인으로서의 연기자가 아니라 청중과 함께 되는 예술가로서의 ‘연예인’*이 되어야 한다. 그 단계에서는 탄탄한 실력은 기본기로만 꼽히고, 예술가의 마음과 태도가 더 많이 청중에게 전이된다. 그리하여 자신이 먼저 즐기고, 청중도 심취하면서 함께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한다. 즐거움이 증폭되고 널리 번져야 한다. 그것이 연예인의 할일이자 목표다. ['예(藝)'란 기능/기술에 품격이 더해진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 이들을 음악 소비자들은 사랑한다. 청중들의 박수나 호응으로 그냥저냥 살아가면 일반 가수로 머문다. 거기에 뜨거운 사랑이 많이 보태지면 보태질수록 급이 올라간다. AAA급. 이른바 특A급 가수들은 그렇게 해서 탄생된다. 그런 이들은 언제 어디서고, 세월이나 시류 따위와 무관하게 사랑을 받는다. AAA급 가수들은 사랑을 먹고 살고, B급 이하의 가수들은 출연료를 먹고 산다.
<K팝 스타> 오디션 라운드를 보면서, 나는 거기에까지 오른 모든 이들에게 우선 박수부터 한다. 그들의 엄청난 노력을 치사(致謝)하고 싶어서. 보통 정도의 노력이나 보통을 조금 넘는 노력만 한 사람들은 이미 앞서의 라운드에서 걸러졌다. 지금 단계에까지 온 젊은이들은 그 노력량만으로도 뜨거운 박수를 받을 만하다.
그럼에도 그들 중에서 아직도 완전히 겉멋을 빼지 못했거나, 청중들과 한마음이 되어 음악을 즐기려 하기보다는 경쟁에서 이기려는 마음을 앞세운 젊은이들이 눈에 띈다. A급으로 올라서기 위해 넘어야 할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는 게 보여서, 안타깝다. 왜냐. 그런 사람들은 탈락하기 때문이다. 심사위원들의 안목이 그걸 놓칠 리 없을 정도로 물샐 틈 없는 것도 그들에겐 불운이다.
심사위원들도 청중이다.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사랑을 끌어내는 사람, 심사위원들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우승자가 된다. 지금 출연자들은 청중의 마음을 조금씩은 다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음악적 실력만으로도. 하지만, 거기서 한 단계 더 나가서, 청중의 감동이 애틋한 사랑, 진심 어린 사랑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사람, 그러기 위해 창의적으로 애쓰는 사람이 우승자의 자리에 오른다. 그럴 것이라고 감히 단정해 본다. 어디서고 개인적 사랑이 가장 중요한 선택을 좌우하는 법이니까. 내가 가끔 말해 왔듯, 까다롭고도 중대한 결정은 언제나 개인적이다.
*
“내 앞에 내가 넘어야 할 선(線), 올라가야 할 무엇이 보이면 난 B급이다. 나는 그래서 지금도 A급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앞으로 넘어야 할 선들이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오늘도 끊임없이 열정적으로 사업에 몰두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현재 A급으로 크게 높임을 받는 어느 젊은 기업가가 강연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청중 하나가 물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겸손한)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노력한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스스로에게 좌절할 때가 많다. 그런 좌절감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그러자, 그는 흔쾌히, 마치 답변을 준비해두었다는 듯이 즉시 말했다.
“B급이 좌절을 넘어서서 A급으로 나아가는 데는 애인을 만드는 일이 최고의 치료제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를 A급으로 봐주기 때문이다. 상대를 A급으로 볼 때만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지 않은가. 그것이 이성이든 동성이든.”
마치 그 자신의 실화를 들려주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그 자리에 내 모습이 투영되었다. 나는 무슨 급인가. 넘어야 할 선, 올라가야 할 것들이 무수하지 않은가. 그럼 B급 중에서도 한참 아래인 B 마이너스, 예컨대 Bcc급?
그러다가, 그의 다음 말을 떠올리자 구원의 손길이 보였다. 내게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이따금은 오춘기(?)에 들어선 듯이 삐치기를 잘해서 부모와 대척점에 서기를 즐기지만 그래도 대놓고 잔소리를 하는 것으로 이 아빠를 채찍질하는 딸랑구의 애틋한 사랑에서부터, 매일 꼬박꼬박 나의 안위를 끔찍하게 챙기는 사람까지. 그뿐이랴, 술 생각이 나면 ‘형님, 그동안 무사하셨유?’ 소리로 나의 무사 생존을 떠보는 아우들도 있고, 선생님 소리를 앞세워 술 사달라고 가끔씩 고개를 들이미는 녀석들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B 마이너스급, 곧 Bcc급은 벗어날 수 있다. 사랑을 받는 이는 A급이라고 했지만 아직 A급은 아니니 Baa급은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치자. 그렇게 나를 위안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언뜻 신용평가사들이 사용하는 신용등급이 떠올랐다. S&P와 피치 사는 신용등급을 학점 평가와 비슷하게 AAA, AA+, A+ 등으로 표기한다. AAA, AA+, AA, AA-, A+, A, A-의 순서로 매긴다. B급도 BBB+, BBB, BBB-로 나뉜다. 유독 무디스 사만 +/- 표기 대신 소문자와 숫자로 표기한다. BBB+, BBB, BBB-가 무디스에서는 Baa1, Baa2, Baa3가 된다. 신용 등급이 최소한 이 B급 이상이어야만 투자 적격 업체가 된다.
그렇다면 나의 Baa 등급은 간신히 턱걸이를 한 게 된다. 후유,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이 등급에 대한 신용평가사들의 요약 평가는 이렇다. ‘신용도 양호하나 채무 이행 능력 약화될 가능성 있음.’ 허걱. 꼭 내 꼴이다. 내가 알아서 잘해야만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빚을 갚고 살아갈 수 있다는 말 아닌가.
그래. 이 사랑 받고 있음의 행운을 지켜내자. 사랑을 받아먹고 살아가는 이 행운에 감사하자. <K팝 스타> 경연에 참가하는 그 젊은이들도 그처럼 치열하게 노력하는데, AAA급이라 할 수 있는 30대의 성공한 기업가조차도 넘어야 할 산들만 바라보고 힘을 내는데, 나 같은 사람이 사랑 덕분에 그나마 Baa 등급에라도 얹힐 수 있는 건 그 얼마나 큰 행운인가. 그들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알맹이만 붙들고, 쓸데없이 툴툴거리는 짓 따위는 하지 말고, 국으로 살아내야겠다.
<K팝 스타>의 젊은이들이어, 고맙네! 그리고, 내게 사랑의 값어치를 요긴할 때 깨우쳐 준 K사장. 고마우이! 그대 꿈대로 이제는 세계를 상대로 성큼성큼 큰 걸음을 내딛게 되시길 빌겠네. [2014. 1. 25] -溫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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