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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수의 슬픔과 위무(慰撫)

[내 글]슬픔이 답이다

by 지구촌사람 2014. 6. 28. 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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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수의 슬픔과 위무(慰撫)

 

 

 

보리수(나무) 열매인 보리수입니다.

열매 표면에 은가루로 부분 분채(粉彩)를 한 것처럼

자디잔 점박이 무늬가 이채롭습니다.

 

그 나무 밑에서 석가모니가 도를 깨쳤다는 인도산 보리수와는 다른,

우리나라 야산에서 자생하는 보리수나무에 열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절에서는 자생 보리수와 구분하기 위해

인도산 보리수를 보리자나무라고 부른다지요.

중국에서 들어온 찰피나무일 때가 더 많지만요.

그 열매로 염주를 만들지요. )

 

요즘 이 보리수 열매를 알아보거나 반기는 이들, 많지 않습니다.

어른들도 그러니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지요.

(사진은 버찌 : 흑색에 가까운 암적색이고 수입산 체리에 비하여 훨씬 적다)

 

 

수입산 체리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들 제꺽제꺽 잘 알아봐도

벚나무에 열리는 버찌는 알아보는 이들도 적고

반겨하는 이들도 아주 드문 판이니 그럴 만도 하지요.

사실 알고 보면 수입산 체리나 버찌 모두

영문 표기는 똑같은 체리(cherry)일 정도로 한통속인데 말입니다.

 

보리수는 이래저래 슬픕니다.

알아보는 이들도 줄어들고, 반겨하는 이들은 아주 드물거든요.

울타리 근처에서, 밭가에서, 산자락에서

열심히 열매를 매달고 있어 봤자입니다.

 

먹거리가 풍부해진 탓에 뒷전으로 밀린 것만은 아니라는

그런 생각이 들 때, 더 짠해옵니다.

보리수 말고도 다른 수많은 야생 먹거리들이 그런저런 이유로

관심조차 받지 못하고 묻히거나 밀려 나가고 있다는 걸

보리수도 잘 압니다.

 

요즘 옆에서 함께 지낸 산딸기들이

작년보다도 더 풍성하고 요염하게 열매를 매달고 있어도

눈길만 힐끗 주고 갈 뿐

손을 내밀어 따보려는 수고를, 그 작은 수고를, 하는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버릇처럼 몸수고들에 인색합니다.​

 

엊그제 보리수가 지켜본 광경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산딸기와 눈이 마주친 한 아주머니가 반색을 하고 따먹으려 하자

동행이 말렸습니다.

  -아이고. 저런 거 시장에 가면 한 봉지에 이삼천 원밖에 안 해여.

    손 버리지 말고 그냥 가. 촌스럽구로...

 

보리수는 얼굴이 더 붉게 달아오른 산딸기를 토닥이며

어깨를 살며시 움츠리고 잎에다 얼굴을 씻었습니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 와 잎사귀들을 흔들어준 덕분이었습니다.

 

                                          *

요행히 보리수를 알아보는 마을 할머니 손을 거쳐

여러 벗들과 어울려 시장 좌판에 자리하고 있어도

선뜻 사들고 가는 손님들을 대하려면 온종일 기다려야 합니다.

새우깡 봉지만 한 비닐봉지에 담겨 있어도

만 원 한 장 내면 거스름돈을 돌려줄 정도인데요.

들고 나간 그대로 집으로 돌아오는 할머니 어깨는 축 쳐져 있습니다.

 

그런 보리수들이 오늘은 신이 났습니다.

시장 좌판에 나가서 손님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어서만은 아닙니다.

어제 보리수나무를 보고는 반색을 하면서 다가와

보리수를 따는 손길에까지 웃음이 깔릴 때부터 알아 봤습니다.

 -어머. 보리수네. 울 집 마당가에서

   어렸을 때 식구들이랑 따먹었던 보리수.

   얘. 너 오랜만이다.

   그 달고도 시던 맛이 아직도 또렷한데...

   ......

   처음엔 멋모르고 까불기에 바빴던 우리 인생의 맛을

   넌 그때 일찍이 우리에게 요약해주고 있었는데.

 

그러더니, 그냥 먹기는 아까우니

잼으로 만들어 두고두고 먹을 거라지 않습니까.

그 은근한 신맛과 단맛을 오래오래 맛보기 위해서요.

 

(사진 : 잼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보리수)

 

잼으로 등급을 한참 높여 다시 태어난 보리수는

에헴 소리와 더불어 시구 한가락을 읊조립니다.

어느 집 마당가에 머물던 보리수 친구에게서

그 집 주인이 판지에 써서

줄기에 걸어둔 덕분에 익히게 되었다는 그 시구입니다.

 

오늘 따라, 그 시구가 꼭 자신의 처지만 같지만

거기에 깨달음의 한 자락을 새로 얹은 기분도 듭니다.

석가모니의 그것에야 비길 수 없겠지만요.

괜히 으스대고 싶어집니다.

 

하기야, 보리수의 삶이나 인간의 삶이

그다지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닌 듯도 합니다.

어느 집 울타리 안에서 그 집을 오래 지켜본 보리수 친구가

살짝 들려준 이야기들에 의하면 말이죠.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알렉산드르 푸시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June 2014]

                                                                                                     -溫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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