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추지 않아도 아파요(1)
최 종 희
연륜이란 온갖 생채기들을 자양분 삼아 자라난 삶의 당목(堂木)에 새겨지는 무늬가 아닌가도 싶다. 때로는 졸연히 때로는 얼결에, 저마다 가슴 속에 심어진 당산나무를 내치지 못하고 아프게 끌어안게 되면서 서로의 비벼대기가 상흔으로 합계되기도 하고, 추솔(麤率)히 덮치고 가는 세파에 따라 출렁이는 사이에 저절로 녹아내리던 심사들이 생채기 위에 납똥처럼 쌓이기도 하면서.
삶은 그러므로 일부러 들추지 않아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속 눈물주머니가 물컹거리는 슬픈 자명고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여운만으로도 명치 아래가 먼저 시큰해져오는.
여인A. 그녀의 삶은 5막짜리 서사 비극이다. 그나마 주인공 자신이 카타르시스의 수혜자라는 게, 어설픈 관객인 나에게는 돋보이는 안도로 다가와, 몰아담은 내 긴 숨을 내쉬게 한다.
그녀의 인생 1막에 등장한 첫 남자는 사촌오빠였다. 여중생 시절 한 여름대낮에 군홧발 같은 힘으로 밀치고 들어선 그와 여고생 시절까지 다섯 해를 어두운 얼굴로 아파하며 지내야 했다. 휘저어 내치고 소리쳐 까발리고 싶어도, 그의 인생이 중동무이로 잘릴 것 같아서 먼저 고개를 꺾어내리곤 했다.
그런 사촌오빠는 그녀가 대학생이 되던 해, 그가 알아서 먼저 갈 길을 갔다. 애당초 잘못된 그의 선택이 불러온 어쩔 수 없는 최종 선택이라고 안위하려 들었지만, 목숨 촛불 하나가 그녀의 표정에 남긴 짙은 촛농자국은 어떻게 해도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두 번째 남자. 엠티 두 번째 날, 술냄새 짙게 풍기는 과 선배가 등 시린 한기가 섬뜩한 이른 봄날 숲속에 그녀를 눕혔던 기억. E현처럼 내내 가늘게 떨렸던 그 기억은 서울로 돌아온 뒤 일주일도 안 되어 지워야했다. 셋째 날 그가 또 다른 여학생을 안았다는 사실보다도 뒤의 여자에게 했던 말이 두고두고 더 그녀를 괴롭혔다.
- 내가 그 애를 정말 좋아해서 그 짓을 한 줄 알아? 하도 애처로운 눈빛으로 안아달라고 사정하는 듯해서, 불쌍한 마음으로 적선 한 번 한 거지 뭐.
몸과 마음에 단단히 채운 사슬은 녹이 슬도록 평생 그녀를 감아내고 지켜줄 듯했다. 졸업반 시절 통학 전철 안에서 어느 남자와의 우연찮은 부딪치기가 이상하게도 지속되기 전까지는. 발이 밟히거나, 넘어져 포개지는 일들이 되풀이된 끝에, 두어 해 뒤 여인은 그의 아내 자리로 앉혀졌다.
세 번째 남자와의 인연을 그녀는 삼세번의 행운으로 여겨야만 한다고 시속의 마음가짐을 앞세워 몇 번이고 자신을 다독이고, 여미고, 가다듬고, 날 무디게 만든 다음이었다. 남자는 아래에서부터 직급을 짚어가는 게 더 빠른 지방공무원이었다.
여인의 인생은 3막짜리 평균율 무대로 마감되지 않았다. 30대 중반의 시퍼런 몸에 어울리지 않게 지병이라는 색 바랜 이름이 붙여지는 당뇨가 찾아왔다. 직장이던 학교를 그만 두고 삶의 빈터에 속수무책으로 내던져졌을 때, 그녀는 오랜 곱씹기 끝에 자신의 평생 직업으로 글쓰기를 선택했다. 그러자 뒤이어, 그녀는 자신의 인생 4막이 열리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것도 그녀가 평생 꿈꿔왔던 형식과 내용으로.
부드럽고 우아하게 그녀에게 다가온 남자와 그녀는 배변(排便)정사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르가즘에 이르렀을 때 자신도 모르게 힘을 놓아버리는 미주알 바람에 저절로 쏟아지곤 하던 두어 덩이의 오물. 그 때문에 남편과도 겨우 단 한 차례만 오르가즘을 경험했던 그녀. 그녀의 삶은 뒤늦게 광활한 개활지에서 맘껏 활짝 꽃송이를 피워올리는 것만 같았다. 그와의 만남은 매번 한 편의 소담스런 소설로 결실되곤 했고, 그 덕분에 그녀에게 꿈만 같던 소설가라는 화관도 아주 손쉽게 씌워졌다.
그녀는 지금 그녀가 되찾은 다섯 번째 남자와 삶을 엮고 있다. 소설가의 화관을 씌워 준 네 번째 사내가 아니라. 주변에서 농담처럼 스쳐가기만 했던 복상사(腹上死)라는 해괴망측한 단어를 목전에서 실물로 접하고 난 뒤, 그녀는 이제 세상 모든 것이 새삼스럽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남자를 찾아낸 게 그 여린 새삼의 꽃피우기만 같다. 그동안 무미건조한데다 쉬까지 슬 정도로 지저분하기 짝이 없어 뵈던 일상의 삶들이 갈피마다 새롭다. 음습하기만 해서 2막에 등장했던 사내가 남기고 간 이른 봄날의 등 시린 한기가 떠오르기도 했던 남자의 그늘이란 게, 이제는 미적지근하지만 뜨겁지는 않아서 편한 찜질방만 같다. 남편에게서 찾아낸 온기가 그와 비슷한 안온함 같은 것이라는 걸 반추하는 일이 꼭 그렇다.
그녀는 세 번째 남자를 그녀의 5막 인생에 재등장시키는 데 그다지 주저하지 않았다. 되찾은 남자. 그루터기만 남은 삶 같았던 자신의 인생무대에 다섯 번째 남자로 남편을 다시 등장시키는 것으로 그녀의 당산나무는 새 싹을 피워낼 준비를 얼추 끝마친 듯하다.
얼마 전 그녀의 여섯 번째 소설 초고를 대했다. (참, 그녀의 다섯 번째 소설 제목은 <다섯 번째 남자>.) 이제는 내 잔소리가 필요하지 않은데도, 그녀는 탈고 전 꼭 내게 보내오곤 한다. 내게서 한 소리를 들어야만 일 보고 개운하게 휴지 닦기를 한 듯만 하다면서. 메일 제목은 여전히 <숙제물을 보냅니다>이다.
작품 제목을 보니 '당목(堂木')이다.
마을 전체가 한 마음으로 떠받드는 도당목(都堂木)에서 에돌아야 했던 어느 여인이 그녀의 마음속에 심어진 뿌리 깊은 당목에 금줄을 매어놓고 한 평생을 지낸 이야기가 자분자분 풀려나간다. 한 평생 고개를 숙이거나 엎드려 지낸 여인의 웅얼거림을 빌어.
하지만, 그녀의 문체는 삶의 모서리들을 놓치지 않고 날카롭고 빠르게 훑곤 하던 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 150%의 긴장과 과감한 생략으로 신속한 장면 도입을 주무기로 하던 데뷔 초기와도 완연히 다르다. 이끼 낀 기왓장을 한 장 한 장 수막새 아래 끼워 포개가듯, 여유 있는 발걸음이 행간에 배어있다. 연륜에 순응하는 사이, 자연스레 동록(銅綠)을 뒤집어쓰고 흔들리는 풍경(風磬). 그걸 어루만지는 듯한 시선이 한 편의 소설을 관통하고 있다.
그녀는 이제 그녀의 생채기들을 더 이상 아파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반갑게도 분명해서, 나는 깊고 긴 숨 하나를 후련하게 내뱉는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삶은 아직도 진행 중인 연극무대라고 할 때마다 내가 섣불리 도리질로 응대하곤 했던 걸 이제는 접어도 될 듯하다.
그녀의 무대는 진행 중이어야만 하므로. 지금처럼 그렇게. 들추지 않아도 아픈 그녀의 앞섶은 그렇게 해서라도 열려 있어야 하므로. 삶의 어떠한 바람 앞에서도 이제 그녀는 당당히 옷고름을 고쳐 맬 수 있을 듯하므로. [Feb.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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