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 공화국 유감
지난 제야(除夜. ≒제석. 섣달 그믐날 밤)의 일이다.
오랜만에 제야의 종소리 행사도 볼 겸해서,
밤 열두 시쯤 보고 있던 외화 프로그램에서 지상파 티브이로
채널을 돌렸다.
그런데... 어럽쇼.
무슨 00대상이니 뭐니 하는 걸 한다.
나머지 두 군데로 옮겨 봐도 마찬가지.
지상파 방송국 세 군데 모두 연말 연예 행사들뿐.
객관적으로 보면 그런 건 집안 행사에 불과한 것이고
게다가 심하게 말하면 딴따라패들의 잔치일 뿐인데
그런 걸로 새해맞이를 한다?
다른 국외 채널로 돌렸다.
NHK, BBC, CNN 등으로.
어느 곳도 우리처럼 연예인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곳은 없다.
난 그래도 해가 바뀌는 그런 의미 있는 날이면
우리가 살아낸 한 해를 돌아보면서 잊고 지낸 이들을 떠올려 보거나
돌아오는 새해를 살아내는 데에 조금이라도
‘생각’이라는 걸 한 번쯤 자연스럽게 해볼 수 있도록,
뭔가를 보여줄 줄 알았다.
내가 프로그램 기획자라면 그랬을 것이다.
특히 KBS 같은 곳에서는 설령 한 군데에서 그런 짓을 한다 하더라도
나머지 공익 프로그램 채널에서는 그리할 수 있을 터였다.
(그곳에서는 음악회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새해맞이는 보낸 한 해의 돌아보기와 새해 설계를 통해서
잠깐이라도 멈춰 서서
그동안 바쁘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내리 가볍게만 살아온 삶에
조금은 무게를 더하여
조금은 더 진중하고도 깊이 있게 혹은 진지하게
자신과 주변을 둘러보는 일 아닐까.
방송국의 새해맞이 프로그램이라면
그런 걸 해내는 데에
직간접적으로 도움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건 고승이나 유명한 성직자, 철학자의 강의가 아니라도 가능하다.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이를테면 생둥이(1.과일/김치 따위가 아직 익지 아니한 것. 2.어떤 일에 경험이 없어 솜씨가 서툰 사람)나
‘새둥이(새로 태어나거나 무슨 일을 새로 시작한 사람을 뜻하는 필자의 신조어)’
시리즈를 만드는 것이다.
예전에 해가 바뀌자마자 태어난 아이를 찾아 소개하는 식의
그런 식상한 프로그램 따위 말고 말이다.
2014년에 홀로 유학을 떠나 외지에서 새해를 맞는 중학생이나 고교생의 모습,
신입직원으로 몇 달을 보낸 119 여성 대원,
작년에 새로 문을 연 남극의 두 번째 과학기지인 장보고기지나
북극의 다산기지에서 첫 해를 보낸 새로운 연구원,
대기업과 중소기업에서 신입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여 산업재해를 당한 이들,
요양원에서 첫 해를 보낸 이들이 창밖을 바라보며 건네는 이야기,
신참으로 24시간 근무를 하느라 떨어져 지내는 호텔 프런트의 여직원,
창업 1년도 안 된 정년 퇴임자,
그 시각에도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
핸들을 잡은 지 1년도 안 된 트럭 기사 겸 지입차 사장,
깊은 산속에 들어와 새해를 맞는 자가 치료자,
하늘에서 새해를 맞고 들어서는 항공업계 근무자...
꼽자면 한이 없다.
그들을 간단히 요약 스케치하는 것만으로도 두어 시간은 족히 되리라.
우리는 그런 이들을 통해서 다른 이들이 펼치는
또 다른 삶의 폴더를 열어보게 되고
그들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배우고 깨닫는 시간/기회를 갖게 된다.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를 제 나름으로 가늠하게도 된다.
새해 첫날에. 방송의 도움으로.
매일매일 살아내는 일상의 하중만으로도 버거워서
좀 쉬면서 가벼운 것으로 그런 걸 잊고 싶은데
굳이 재미없고 딱딱한 것으로 무게를 더해야 하겠느냐 할지도 모르지만
타인의 삶이 주는 감동은 때로 그 정화작용이 놀랍다.
엄청 가벼워진다.
그저 멍하니 바라보며 옷차림 따위에 더 관심하다가 한숨을 쉬는
그런 시간보다 내게 실제로 돌아오는 게 엄청 많다.
이 나라가 맞이하는 제야에
모든 방송 프로그램을 도배질한 연예인 공화국 풍경을 대하면서 씁쓰레해하는 것.
그건 공해를 맛보는 것과도 같다. 그것도 새해 첫날에.
올해부터 외국계 방송사나 방송 관련 업체들이 들어온다.
처음에는 기존 업체들과의 합작 형태가 되겠지만
머지않아 그들의 자본력은 방송 콘텐츠 지배로까지 금세 번진다.
지금처럼 근시안적으로 해나가다가는
밥벌이조차 어려워지는 종사자들, 꽤 되리라.
중간 이상의 간부진들이 특히...
스스로 털어내지 못한
그들의 습관성 만성 피로증이 배태하는 후천적 부작용의 하나인
사고 기피증과 ‘가벼운 게 좋은 것’ 풍조에 휩쓸린 탓이니
그 감당은 자연 자신의 몫이다. [Feb. 2015]
- 溫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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