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 너만은 연하의 예술가에게 시집가지 마라!
1. 파가니니와 리스트
파가니니와 리스트! 지금으로부터 170~180년 전인 1830~40년대에 이 두 사람은 2차 대전 당시의 히틀러와 무솔리니만큼 자주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그들이 음악회에 참여하기 위해 오면 그날은 그 도시의 공휴일로 선포되었다. 환호하는 군중은 그들의 마차에서 말들을 떼어내고 직접 마차를 호텔까지 끌고 갔고, 호텔에서 그들은 발코니로 나와 군중의 갈채에 답했다.
이태리 제노바 출신의 니콜로 파가니니(1782 ~ 1840)는 리스트보다 29세 연상이지만 그보다 26년이나 먼저 58세에 죽었다. 헝가리에서 태어난 프란츠 리스트(1811 ~ 1886)는 75세까지 장수했다. (아참, 내가 이들의 생몰년이나 얘기하려던 것은 아닌데...)
이 두 사람은 당대의 천재적 음악가들 중에서 단연 빛났던 이들이다. 공통점은 각각 바이올린과 피아노에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필설로는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최고의 연주 기교를 뽐낸 이들로 인정받는다는 점이다. “이들의 연주를 들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한들, 무감각한 철자와 죽은 단어의 나열, 그저 해독 불능의 상형문자에 불과할 것이다.”라는 신문 기사가 단적으로 당시 상황을 압축하고 있다. 화려한 여인 편력 또한 둘의 공통점이다. 다른 점이라면 파가니니는 기괴한 천재이자 도박 중독자인 반면 리스트는 점잖은 신사에 가까웠던 것이라고나 할까.
연주가로서의 이 둘은 독일인들이 흔히 뷔넨탈렌트(Bühnentalent. 직역하면 ‘무대 재능’인데, 진정한 의미는 ‘집 안에 있는 대중과 무대에 있는 예술가를 직접 연결시키는 신비로운 능력’에 가깝다)라고 부르는 청중 흡착력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파가니니의 신기 들린 듯한 연주 앞에서 관객은 실신하기도 할 정도로 한번 연주를 대하면 열광적인 팬으로 변했다. 기법은 탁월했고 발상도 기발하게 독창적이었다. 바이올린 활 대신 나뭇가지로 연주하기도 했고, 현을 다 끊고 한 줄로만 연주하기도 했으며 악보를 거꾸로 놓고 연주하기도 했다. 그는 즉흥연주의 대가 중 대가였다.
오죽하면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를 두고 악마에게 혼을 팔아 얻은 기교라는 평이 그의 임종 때까지 따라다녔을까. 그런 말에 귀가 솔깃해진 사제 하나가 그의 임종 자리를 찾아가 그 말이 사실이냐고 끈질기게 파대자, 파가니니가 그의 바이올린(과르네리[Guarneri])을 가리키며 ‘저 안에 악마가 들어 있소.’라고 소리를 질렀는데(화가 나서였는지, 지겨워서였는지는 모르지만), 그 말이 그의 최후의 말로 남아 있다. ☜[참고] 그의 일대기를 그려 2014년 4월에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된 영화의 제목이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인 것도 이러한 것들과 관련된다.
리스트는 연주도 시작하기 전에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무대에 올라가 손짓 하나 표정 하나를 바꾸는 것으로도 객석에서는 감탄과 비명, 한숨 소리가 나왔다. 여인들은 그런 소리들을 죽이기 위해 손수건을 자주 써야 했다. 넋을 잃은 관객들은 리스트가 건반에 손을 대는 순간 정신을 되찾곤 했다. 리스트에 대해서는 여러 뒷말들도 많지만, 무엇보다도 연주가로서의 리스트에게는 고유한 '음색'이 있었다. 피아노 연주에서 기술적 능력은 누구나 익힐 수 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살아남는 것은 ‘터치’, 즉 ‘음색’에 대한 기억인데, 리스트에게는 리스트만의 음색이 있었던 것으로 요약된다.
이제 이쯤에서 파가니니와는 결별해야 한다. 그 이유는 아래에 요약된 바와 같다.
....탐욕에 가득하지만 매번 돈을 잃는 상습 도박꾼이었던 그는 항상 바카라를 하기 위한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온갖 선전 수단을 동원해 평생 자신의 무기로 삼았던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욱 조장하려 했다. 사기를 당할지 모른다는 라틴인 특유의 의심 때문에 그는 늘 다음 공연의 입장권을 팔고 있는 매표소에 나와 감시했다. 음악회가 끝나자마자 그는 부리나케 사라졌다. 아마 우중충한 호텔 방에서 카드 도박을 즐겼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나중에 자신이 죽었을 때 아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줄 돈을 세면서 다른 도시로 출발했다. 그 아들의 어머니는 유명한 무용가인 안토니아 비안키(Antonia Bianchi)였다. [중략] 순회공연에서 큰 성공을 거둔 뒤에 그는 파리에 도박장을 개설하려 했다가 파멸했다. 경찰이 도박장 개설 허가를 거부한 충격이 그의 죽음을 앞당겼다. 그는 수년 동안 결핵을 앓고 있었는데, 1840년에 결국 결핵으로 사망했다... -<반 룬의 예술사>에서.
위의 글 속에 나오는 아들 이름이 아킬레인데, 파가니니가 죽은 뒤 여러 해가 지나도록 그 악마와의 결탁설 때문에 교회 무덤에 묻히지도 못하고 있는 것을 끝내 청원과 뇌물로 해결하여 36년 만에야 제대로 아버지를 편하게 모셨다. 당시 그의 나이 50세로 14살 때 아버지를 떠나보낸 그였다. 어머니의 낭비벽과 아버지의 도박 중독으로 이혼한 뒤 아버지가 거둬온 고마움을 그렇게 갚았다고나 할까.
파가니니가 기인이라면 리스트는 신사였다. 하지만, 안으로는 좀 복잡했다. 아버지는 헝가리 사람이었으나 어머니는 독일계 오스트리아인이었다. 여러 민족과 언어가 뒤섞인 나라에 사는 어린이들은 대개 어머니의 말을 배우게 마련. 어린 페렌츠(Ferencz)는 프란츠(Franz)가 되었고 평생 헝가리인이 아니라 독일인으로 살았다. 그는 모국어를 약간 알았지만 만년에 동포들이 그를 조국의 살아 있는 상징으로 떠받들기 전까지는 헝가리어로 글을 쓰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는 어느 민족 집단에 속하기보다는 괴테처럼 그냥 ‘유럽인’이었다. 사랑에서도 유럽적으로 지극히 포용적이어서 한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여인들과 교유 이상의 관계를 유지했다.
유럽인으로서는 당대 문화의 중심지인 파리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일. 리스트 역시 그곳을 드나들면서 다구(d'Agoult) 백작 부인을 만나게 된다. 당시 그녀는 조르주 상드와 조지 엘리엇이 그랬듯이 유럽 여인들이 남자 이름으로 작품을 내는 유행을 따라 대니얼 스턴(Daniel Stern)이라는 남자 이름으로 (전혀 재미없는) 책들을 썼으며 살롱을 소유하고 있었고, 이미 두 아이를 두고 있는 유부녀였다. 그 살롱에서 하이네가 시를 낭송하고 쇼팽이 야상곡과 왈츠를 연주하면 파리의 문학, 음악, 미술계 인사들이 모두 모였다. ☜[참고] 당시 파리에 머물던 쇼팽에게 장작불 같은 사랑을 지폈던 조르주 상드도 쇼팽보다 6년 연상이었다.
한 해 동안 그녀를 향해 열심히 애를 쓴 그는 1835년(23세) 둘째아이의 죽음으로 흔들리던 여인에게 그녀와 함께하지 않으면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 결심에 기꺼이 동조한 연인을 데리고 리스트가 간 곳은 장 칼뱅의 고향인 제네바. 어떤 예술가라도 결코 편하게 느낄 수 없는 도시였지만 둘은 거기서 몇 년간 연인으로 머물며 자식 농사를 짓는다.
5년이 채 안 되는 사이에 셋을 두었는데, 나는 그중 코지마(Cosima)라는 둘째딸에게 주목하고자 한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우아한 신사로 불렸던 리스트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평가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남편을 버리고 아버지와 친구이기도 한 바그너에게 빠져버린 그녀의 대찬 행보 때문이다.
다구 백작 부인과의 요란스런 동거는 길게 가지 못했다. 딸 코지마와 모든 면에서 닮은꼴이었던 백작 부인은 점차 연인의 신경과민에 싫증을 느꼈고, 함께한 지 세 해도 안 되어 리스트 또한 또 다른 여인으로 러시아의 권력 실세이기도 한 비트겐쉬타인(Sayn-Wittgenstein) 후작 부인을 만나기 시작했다. 결국 1840년(리스트의 나이 29세)에 두 사람은 결별한다. (비트겐쉬타인 후작 부인과는 나중에 바이마르로 가서 13년을 함께 지내고 다시 결별한다. 결별 이유가 걸작인데, 나이 50에 이른 자신에게 비 오는 날엔 비옷 걸치라, 몸에 좋지 않으니 식탁에서 코냑은 두 잔 이상 마시지 마라... 등으로 잔소리하는 여자는 질색이라고 했다나 뭐라나. 그는 뒤늦게 그녀와의 결혼을 공식화하고자 사제복까지 입고서 교황청에 잘 보이려 애썼지만, 실패했다.)
딸 코지마 얘기로 돌아가자. 그녀는 어머니를 닮아 총명하고 대찬 여성이었다. 1857년 그녀는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제자 한스 폰 뷜로(Hans von Bülow)와 결혼한다. 뷜로는 원래 피아니스트였지만 나중에는 당대 최고의 지휘자가 되어 '베토벤 이래 최고'라는 찬사를 받았는데, 그 뛰어난 능력으로 뷜로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곡을 지휘했다. 당시 바그너는 인정을 받기 위한 40년에 걸친 전쟁을 시작하려던 참이었으므로 뷜러에게 깊은 감사를 느끼고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그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것은 친구이기도 한 뷜로의 아내인 코지마를 훔쳐 위대한 음악가 리스트의 사위가 된 것이었다.
먼 훗날 1929년 파리의 전시회 도중 살바도르 달리는 동료 폴 엘뤼아르의 부인이던 러시아 여인 엘레나(갈라)를 데리고 홀연히 잠적해 버렸는데, 어쩌면 그는 그 분야의 대선배인 바그너의 수법을 베낀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코지마는 유부녀인 어머니를 연인 삼아 자신을 생산한 용감한(?)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고.
그런 바그너(1813 ~ 1883)는 자신을 주목할 만한 음악인으로 꼽고 있던 장인과 두 살 차이의 친구이자 동료로서, 장인보다 세 해 먼저 죽었다. 리스트가 유럽 여행 중 사위의 사망 소식을 듣고 장례식 참석 차 돌아가다가 병을 얻어 죽을 정도로 리스트는 바그너를 아꼈다.
뷜로의 아내에서 바그너의 아내로 자리바꿈을 한 리스트의 딸 코지마. 엄마의 성격을 빼닮은 그녀는 그 뒤로도 당차고 대차게 활동을 했는데, 나의 관심사는 아버지에 대한 그녀의 평가다. 코지마는 아버지로서의 리스트에 대한 평을 부탁받자 이렇게 우회했다.
- 천재란 밖에서 붙여준 이름이고, 가족들은 평생 그런 천재가 드리운 어두운 그늘 아래에서 지내게 마련이죠. 그런 그늘이 뭔지 설명이 필요하세요? 특히 먼저 늙어가거나 철이 든 아내의 얼굴과 잔소리를 대해야 하는 천재들이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하면 말이에요.
이와 비슷한 투로 가정 밖에서의 활약이 빼어났던 남편 또는 부친을 평가한 이들은 많다. 특히, 예술계와 철학, 그리고 정치 분야에서 역사적으로 기록될 만큼 크게 활약한 이들의 아내와 딸들이 그랬다.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 자리에 놓고 싶은 이는 교육론의 고전 명저라 꼽히는 <에밀>의 저자 루소다. 그는 세탁부(그나마 그녀가 그와 가장 오래 관계를 맺은 여인이다)와의 사이에 낳은 자식을 처음부터 고아원에 보냈다. 당시 중상류 사회에서 이런저런 사유로 아이를 고아원에 보내는 일이 흔한 일이었다고는 하지만, 그 아이는 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된 뒤로 내내 어떤 마음이었을까.
2. 연상의 여인들이 스스로 드리우는 그늘들
여인 A. 제법 오래 전 그녀의 짧고도 긴 술회를 들은 적이 있다. 자신과 남편의 정확한 나이 차이를 시댁 사람들과 아이들은 물론 남편조차도 모른다고 했다. 나도 묻지 않았다. 글 쓰는 일과 그런 사소한(?) 디테일은 무관하다고 생각했으므로. 당시 그녀의 문장력은 기성 작가들의 뺨을 여러 대 칠 정도로 빼어났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남편과 밖엘 나가면 사람들이 누님이냐고 물어대는 그 통과의례가 죽도록 싫었고, 그게 하루 이틀도 아니게 되풀이되다 보니 둘 사이의 거리도 벌어지더란다. 그때 생각난 것이 운동. 나이든 티도 멈출 수 있을 듯하고 땀을 잔뜩 흘리고 나면 기분도 개운해지니 일석이조. 그런데 여인은 일석삼조의 행운을 거머잡았다. 운동을 하면서 근사한 남자까지 생기고 보니, 처음에는 그리 여겼다.
뒷얘기를 요약하자면, 여인은 몇 달 동안 깁스를 한 채로 출근했다. 사건이 나던 그날도 기분이 울울해서 근무를 마치고 밤늦게 (여인의 직장은 야간대학원 교무과) 스키를 타러 갔는데 돌아오는 길에서 교통사고의 가해자가 되었다. 옆자리에 타고 있던 남자는 사망. 사건의 뒷수습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전말이 드러나게 되자 여인의 삶은 몽땅 재설계되었다. 그녀가 사십대에 들어서기 한 해 전의 일이었다.
여인 B. 남편과 세 살 차이였던가. 들은 지 하도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직장생활을 하다가 진학한 여인은 그를 같은 과 동기로 만났고, 둘 다 외지 생활이다 보니 생활비 절감 차원에서 저절로 동거로 이어졌다. 졸업 후 우여곡절을 거쳐 결혼했다. 생긴 건 그럴 듯하지만 맨손뿐인 남자를 선뜻 사위로 맞이하려는 집안은 예전에도 드물었다.
잘생긴 예술가(화가) 남편을 둔 대가는 비쌌다. 여인의 얼굴은 젊었을 때에도 나이 들어 보이는 형이었는데, 미남인 남편의 얼굴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아름다워졌다. 그의 차 안에서 화장품 냄새가 나는가 하면, 어느 날은 긴 머리칼도 보였고 스카프가 뒷좌석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밤에도 문자 메시지가 왔고, 남편은 자주 베란다나 화장실로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 여인은 남편의 전화기에 담긴 전화번호들을 수첩에 옮겨 적은 뒤, 남편이 나가고 난 뒤 가장 잦은 연락이 오고간 곳에 전화를 직접 걸어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생각을 바꿨다. 어차피 이혼을 할 것이 아니면 까짓 거 내버려두고 내 길을 가자! 쪽으로. ‘대책도 없는 내가 뭘 어쩌겠다는 생각도 없이 단순히 기분이 상해서, 다른 여인 따위의 일로 속을 썩이며 손해를 본다면 내가 바보다.’라는 결론을 단호하게 집어 들었다. 여인은 40대에 대학원에 들어갔고 오롯이 학위를 따는 일에만 전념했다. 남편의 여자니 뭐니 하는 따위는 싹 잊고서.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50대의 여인은 지금 행복하다. 직장에서 인정받고, 사회 활동 또한 보람차게 해내고 있다. 군대까지 마친 두 아들도 듬직하기 짝이 없다. 남편도 수굿해졌다. 기력이 떨어진 건지는 몰라도(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다.) 그녀는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기도 했던 40대 초중반 시절에 그처럼 현명하게 대처했던 자신에게 상을 주는 것도 잊지 않은 듯하다. 바람결에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그렇다.
여인 C. 이 나라의 최고 명문여고를 나온 그녀는 같은 과 2년 후배가 남편이다. 당시 ‘농활’로 줄여 부르던 농촌 봉사 활동에서 후배 남학생의 눈길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가진 단둘의 뒤풀이가 그 뒤로도 이어지게 되어서다. 학교를 먼저 졸업하여 교사가 된 여인은 시골에서 나고 자라난 맨손뿐인 남자의 뒷바라지를 했다. 줄줄이 매달린 시동생과 시누이가 신혼 살림집에서 끼여 자며 지내기도 했다. 그들의 금전적 뒷바라지까지 했다.
남자는 여러 해 동안 대학원에 적을 둔 끝에 학위를 땄고, 지방대학이지만 국립대학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시인으로, 교수로 웬만큼 이름도 내걸었다. 외고와 과학고를 졸업한 딸과 아들도 명문대를 졸업했다. 일반적인 기대대로라면 아이들은 물론 부부의 앞길 역시 탄탄대로여야 하지만, 그 집안은 요새 살얼음판이다.
명문대 영문과를 나온 딸은 대기업 취직에 실패하자 자신의 취미 분야와 연결된다싶어서 중소기업에 취직했다가 몇 달도 못 되어 뛰쳐나왔다. 취업 후 아버지에게 어떤 꼬투리도 잡히기 싫어서 즉시 방을 얻어 따로 살기 시작했는데(그것도 같은 서울에서), 그 방값과 생활비를 남편 몰래 (그는 딸이 회사생활을 잘해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지라) 여인이 갖고 있던 ‘딴 주머니’로 처리한 것을 뒤늦게 남편이 알게 되었다.
아들은 과학고 출신에 어울리게(?) 국립대 물리학과를 마친 뒤 미국 유학을 떠났는데 석사 학위 취득을 위한 시험을 앞두고 슬슬 아프기 시작하여 마감 기간을 넘기도록 두문불출했다. 그럼에도 같은 기숙사에서 머무는 어느 누구도 두어 달 동안이나 보이지 않는 그의 행방에 대해 궁금해하거나 걱정하는 이가 없었다. 그곳에서 두 해 넘게 생활해왔는데도... 귀국 후 찾아간 병원에서 나온 진단은 육체적 질병은 하나도 없으니 열심히 헬스클럽에 다니면서 운동을 하라는 것이었다. 딸 역시 재학 시절 간간이 우울증 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3. 딸아, 너만은 연하의 예술인에게 시집가지 마라!
여인 C. 그녀는 요새 ‘연하의 예술가에게 시집가지 마라!’라는 소리를 달고 산다. 딸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다.
맏이인 딸이 치료받았던 우울증이나 사회생활에서의 원만함 부족 등에서부터 아들의 소극적 회피성 행동들이 모두 자신들의 탓, 그중에서도 늘 신경이 곤두서있다시피 하는 시인 아버지를 둔 탓이고 그 다음에는 그런 남편 아래에서 늘 안으로만 삭이고 살아온 자신의 탓이라고 여기게 되어서다.
계획에도 없던 아이가 들어서는 바람에 낳게 된 맏이에게는 더더욱 미안해한다. 어린 시절 달리 맡길 데도 없어서 집에 있는 남편 옆에 두고 출근하곤 했는데, 남편은 학위 논문에 매달리느라 만지면 팅 소리가 날 정도로 늘 신경 줄이 곤두서있던 참이었으니, 옆에서 아이가 울기라도 하면 돌아갈 것은 뻔했다. 더구나 당시 그녀의 남편은 아빠가 되기에는 어리디어린 20대 후반의 사내였다.
그 뒤 시인의 삶은 온 가족을 기속(羈束. ①얽어매어 묶음. ②남을 강제로 얽어매어 자유를 빼앗음)했다. 일상의 표현에서도 산문은 중언부언에 속했고, 간단명료해야 했다. 단문이야말로 삶의 안팎에서 가장 효과적이면서도 빼어난 이들이 써야 하는 표현법이라고 세뇌했다. 즉답보다는 묵혀서 나온 답이 알맹이에 가깝다는 건 집 안에서 상식이었다. 주입식 반복 교육은 단답형으로 이뤄질 때 더욱 효과적이라는 걸 입증하는 실험장이 그들의 일상이었다.
연하의 남자로서 가장의 위엄을 제대로 지키려면 그처럼 온 가족 앞에서 무게를 잡는 일이라고 여기게 된 탓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연상의 아내 모습조차도 그런 태도를 굳히는 데에 도리어 채찍질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시댁에 물질적인 도움은 물론 시간적인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수없이 마음을 다잡으면서 가난한 집의 장남을 남편으로 선택한 자신의 원죄를 수시로 깨우치며 살아내는 아내의 모습조차도, 우리의 짐작과는 달리 그에게는 안쓰러움이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부담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으므로.
여인은 평생 단발머리로 살아왔다. 남편이 40대 후반을 넘겨서야 그런 대로 중후한 모습이 갖춰지면서 연상 연하의 느낌이 지워졌지만, 특히나 그들의 속내를 잘 아는 이들 앞에서는 외견상으로는 절대로 연상의 여인으로 보이기 싫어서다. 여인은 그들이 그걸 잊고 있지 않을 게 뻔하다는 생각을 평생 지운 적이 없다. 연상의 여인이라는 명패는 그녀에게 인두로 새겨진 되돌이표였다.
자식들의 손주를 안아보면서 살아가고 싶은 게 가장 긴박하고 요긴한 꿈이라는 여인에게 그 꿈이 쉬 이뤄질 듯하지 않다. 일반적으로는 가장 소박하고도 일상적이어서 시간만 흐르면 저절로 이뤄지기도 하는 그 꿈이... 예산상의 문제 때문에 명퇴 신청조차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나이 육십에도 여전히 평교사로 또다시 학교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 여인은 끝내 팔자타령을 하고야 만다. 남편 복이 없어 자식 복도 없는 사람에게 무슨 복이 있으랴... 그러면서 되뇐다. 딸아, 너만은 제발 나처럼 연하의 예술가에게 시집가지 마라! [Nov. 2014] -溫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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