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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분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1)

[내 글]슬픔이 답이다

by 지구촌사람 2014. 10. 12.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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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배꼽으로 나올 경우 원본은 이곳에 있다 : http://blog.naver.com/jonychoi/220148183417

 

       지금 그분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1)

 

며칠 전 막을 내린 아시안게임을 보고 있을 때다. 양궁 시합을 보면서 다른 방송에서는 뭐라고 하는지 궁금해서 채널을 돌리다가 김수녕(1971~ )이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는 화면을 대했다. 40대 중반의 넉넉한 아줌마로 편하게 변신한 모습이 반가웠다.

 

김수녕. 한국 양궁에서 오직 그녀에게만 신궁이란 별명이 붙는다. 한국 여자 양궁을 세계 최고로 끌어올린 김진호에게는 양궁 여왕’, 1984LA올림픽의 금메달리스트 서향순에게는 신데렐라’,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과녁 한가운데 설치된 방송카메라 렌즈를 연거푸 깨뜨린 김경욱에게조차 명궁이란 별명이 붙었을 뿐인데.

 

그처럼 최고의 칭호를 받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몇 가지를 꼽으라면 여고생으로서 당시 쟁쟁하던 선배들을 물리치고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깜짝 1로 뽑힌 것은 물론 아시안 게임을 위시하여 1988년 서울올림픽 개인전·단체전 2관왕,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단체전 금메달과 개인전 은메달의 주인공이었던 점 외에도, 당시 9개가 넘는 세계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지금도 세계선수권 대회의 2연속 2관왕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고 들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19999, '신궁(神弓)' 김수녕이 선수로 복귀한다는 뉴스가 신문 1면을 장식했을 때 나도 놀랐다. 1993년 당시 21살의 젊은 나이에 돌연 은퇴한 이후 평범한 주부,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았던 그가 다시 활을 잡는다니 정말로 깜짝 놀랄 수밖에. 그리고 그녀는 6년 만의 복귀임에도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하여 시드니 올림픽에서 후배들을 도와 단체전 금메달을 따는 데에 수훈 갑이 되었다.

 

그리고 진정으로 내가 그녀를 흠모(?)하는 데는 다른 이유들도 있다. 하나는 88올림픽 개인전에서 LA 올림픽 때의 김진호처럼 첫발을 6점에 쏘았음에도 (그래서 김진호는 무너지고 말았지만) 초연하게 10점 행진을 이어간 뒤 개인전 1~3위를 한국이 휩쓸고 난 뒤 그녀가 했던 말 때문이다. “전 시위를 떠난 화살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이런 흔들리지 않음을 두고, 장영술 감독은 훗날 그녀를 이렇게 요약했다. “한마디로 독사 같다고 해야지요.” (화살이 빗나가면 그녀는 상대방이 알아차릴 수 있는 조준기 조정을 하지 않고 표정의 변화조차 없이 그 자리에서 오조준을 해서 쏘는 데에 천재다.)

 

또 다른 흠모 사유로는 절정기이던 21살의 나이에 과감하게 은퇴를 결정하면서 했던 생각을 훗날 알게 되어서다. 그 무렵 시합이 FITA 그랜드 방식(총점 합산제)에서 토너먼트 방식으로 바뀌게 되자, 늘 이길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현실화되고 그런 압박감은 결국 그녀로 하여금 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게했다. 그것이 그녀의 돌연한 은퇴 이유였다. 정상에 오르고 나면 밀려날 때까지 무리를 해서라도 정상에서 오래 머물려고 욕심을 부리는 게 인지상정인데, 그녀는 정상에서 제 발로 성큼 내려와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 졸업을 하자 같은 과(고려대 체육학과) 2년 선배로서 평범한 체육교사를 하고 있던 사람과 후딱 결혼을 하고서는 얼른 아이 키우기로 확실하게 선회해 버렸다. 어떻게 그처럼 어린(?) 사람이 그토록 다부진 생각을 똑 부러지는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을까. 그녀의 그런 뒷모습이 너무나 멋져 보여서, 내게는 오래 기억될 사람만 같은 생각이 그때도 들었다.

 

지금 그녀는 양궁협회 이사로, 강연자로, 지도자로, 방송 해설가로 바쁘게 지낸다. 넙적한 얼굴에 편안한 미소를 넉넉하게 담고서.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방송 화면에서 대하고 나니 그날은 내 마음도 푸근해져 왔다.

 

어린 시절이나 청소년 시절 그녀의 삶은 몹시 스산했다. 버젓한 직업이 없어서 떠돌이 일감을 찾아다니느라 정착도 제대로 하지 못한 아버지 탓에, 출생은 서울이지만 청소년 시절은 충북에서 지내야 했을 정도로. 그런 삶의 안팎을 그녀의 독기로 평정하고 이제는 푸짐한 웃음까지도 망설임 없이 지어낼 수 있기에 이른 것이기에 내게는 더욱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 날이었다.

<지도자로서 양궁 연습장에서. 2009>

 

                                                        *

'86년 아시안게임에서 두 사람의 여고생이 온 국민의 시선을 끌었다. 김수녕과 임춘애. 불모지나 다름없던 육상계에서, 그것도 아시안게임에서, 임춘애(1969~ )는 세 개의 메달을 걸었다. 당시 그녀는 라면만 먹고 달렸다고 해서 라면 소녀로 알려졌지만, 그것은 훈련 후 코치 선생님이 간식으로 라면을 주곤 했다는 말이 와전된 것이었다.

 

나는 그 뒤로 이따금 그녀의 행방(?)이 궁금했다. 이 나라의 매스컴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단점으로 꼽히곤 하는 냄비 성향과 닮아 있어서, 금방 우르르 달려가서 반짝 기사들을 한꺼번에 써내는 데에는 도가 텄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이내 입 싹 씻곤 하는 그런 버릇들이 있는데, 그에 대한 내 나름의 항거(?) 방식이라고나 할까. 한번 관심하거나 사랑하면 진득하게 좀 해야 한다.는 게 내 똥고집 중의 하나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녀가 열심히 살아내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그것도 사람들이 선뜻 발길을 디디려 하지 않는 보험설계사로. 하지만, 나는 안도하면서 박수를 보냈다. 그 또한 어엿하고 멋진 직업이므로. 그리고 임춘애라면 너끈히 잘해내리라고 그녀의 성공을 미리 입도선매(立稻先賣. 아직 논에서 자라고 있는 벼를 미리 돈을 받고 팖)해 버렸다.

 

그 뒤 그녀가 서울에 자리를 잡고, 살고 있는 동네에서 이런저런 봉사 활동도 열심히 하고 주민들을 위한 체육 활동에도 도움을 주면서 씩씩하게 살아내고 있다는 소식까지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작년인가, 같은 86 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 하나와 도시락 사업을 시작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회사 이름은 <하니도시락>.

 

<하니>! 익숙한 이름이다. <하니>는 국민적 만화의 제목 일부이자 국민적 캐릭터가 된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처럼 만화와 그 주인공이 한꺼번에 드높이 떠오른 데는 바로 임춘애의 공이 엄청 크다. <달려라 하니>가 연재 중이던 때에 비관심 종목이었던 여자 육상 800m, 1500m, 3000m에서 어렵게 자란 임춘애 선수가 내리 3개의 금메달을 따는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던 까닭이다.

 

까맣게 그을린 가냘픈 몸매의 소녀 선수가 결승선을 지날 때마다 온 국민이 열광했고 라면 먹으며 자라온 꿈나무라는 신문기사와 라면 먹고 이긴 춘애야라는 사설 등에서 전 국민이 감동과 희망의 메시지를 얻었다. 이후 이 기사가 훈련이 끝나면 간식으로 라면을 줬다는 코치의 이야기가 와전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언론의 영웅 만들기라는 비난이 나오기도 했지만.

 

여하간, ‘임춘애 스토리는 당대 우리 시대가 원했던 감동적 요소였다. 그 주인공이 이제 다시 하니의 이름을 업고 나타났다. 임춘애로 인하여 우리에게 더욱 훈훈하게 다가왔던 하니 스토리의 번안판(飜案版)으로. 그녀의 창업 소감 말대로, 그녀의 사업 번창이 국민적 성원에 대한 조그만 보답의 기회로 꼭 이어졌으면 한다. <하니도시락>은 수익의 일정 분을 밥을 굶는 이들에게 쓸 계획인데, 처음부터 매출의 일정액을 도시락으로 만들어 지방자치단체 등에 제공하여 배포하는 방식으로 그리한다고 한다.

 

<2013년의 임춘애 모습>

 

                                                                    *

이처럼 나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혀 무관한 사이인데도 불쑥 저간의 소식이 궁금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의 하나가 장명부 선수다.

 

장명부(張明夫, 1950 ~ 2005)는 지금의 SK 와이번즈가 삼미 슈퍼즈로 불리던 1983년 혜성 같이 나타나 그해 30166세이브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사람이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44게임을 선발로 뛰었고 36게임을 완투했다. 427이닝이라는 단일 시즌 최다 이닝 투구 기록은 덤이라고나 할까. 그의 승패 기록이나 선발/완투/최다 이닝 투구 기록 등은 아직까지 누구도 넘보지 못하고 있고, 지금처럼 투수 관리가 제대로 이뤄진다면 앞으로도 영원히 깰 수 없는 기록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1억 원이라는 보너스를 둘러싸고 삼미 측과 갈등*이 발생했고, 그 여파로 1985년에는 단일 시즌 최다 패배 기록인 25패를 당하기도 했다. 1986년 빙그레 이글스로 이적했다가 그 해를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다. 롯데 자이언츠 투수코치에서 물러난 이듬해인 19915월에 박찬, 성낙수와 함께 히로뽕(일명 필로폰)을 사용한 혐의가 드러나 마약 사범으로 구속되었다가 그 해 7월에 풀려났다. 그리고 그 대가로 그는 한국 프로야구계에서 영구 제명되었고, 대한민국에서는 영구 입국 금지 명단에 올랐다.

 

[참고] 삼미는 장명부의 놀라운 활약을 보고 설마 30승까지 할 수야 있으려나 싶어서 농담처럼 30승을 올리면 특별 보너스로 1억 원을 준다고 했다는데, 장명부는 신문에까지 대서특필된 그걸 진의로 여기고 30승을 달성하자 구단에 그 금액을 요구했던 것. 구단 측이 지급을 거절하자 소송전으로까지 이어지면서 갈등이 커졌다고 한다. 당시 1억 원은 현재 가치로 최소한 10억 원이 넘는 거액.

 

이후 그는 더 이상 고국으로 올 수 없었으며, SK 와이번즈에서 200444일 문학야구장 개막전 기념으로 그를 초청하려고 했으나, 일본 내에서 그의 행적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한 해 뒤인 2005413, 자신이 운영하였던 와카야마 현의 한 마작 하우스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향년 56. 사인은 마약중독이었다.

 

나는 그가 그처럼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나 알았다. 어느 날 뜬금없이 그가 생각나서 일본의 인터넷으로 들어가 그의 일본명인 후쿠시 히로아키(福士敬章)와 야구 선수 등록명인 후쿠시 아키오(福士明夫)까지 뒤진 끝에.

 

그가 그처럼 오래도록 내 뇌리를 점거하고 있었던 이유를 나는 지금도 잘 모른다. 비슷한 시대에 태어나 암울한 시대를 힘겹게 지내왔던 탓일까. 그야 그와 나만의 일도 아니고 당시 시대가 품고 있던 공기가 누구에게나 찬바람이 더 많았던 점에서는 크게 공통점이랄 것도 없다. 누구나 다 바람맞이에서 생을 영위했으므로.

 

야구 때문이었을까. 내가 제일 잘하고 제일 좋아하는 종목이기는 하다. 하지만, 나는 종목보다는 선수 개개인의 노력과 미담에 더 관심하는 편이다. 장명부 역시 한국에 영입될 때 일본에서는 한물간 퇴역 선수이긴 했다. 그럼에도 그가 선 보인 슬라이더, 체인지 업, 너클 볼 등에 우리나라 선수들은 난생 처음 보는 것들인지라 눈이 휘둥그레지곤 했다.

 

너구리라는 좀 달갑잖은 별명 앞에서도 장명부는 여전히 까닭 모를 웃음을 지었다. 빈볼을 던지고도 여유를 짓는 모습을 보고 지어진 별명인데도...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그의 웃음에 대한 내 나름의 임의적 해석을 덧붙이게 되었다. 말도 서툰 조국 땅에서, 그를 고급 용병으로만 여기는 구단이나 야구 풍토에 대한 그 나름의 대응이었을 터라고. 내성적인 그가 화통하게 소통하지 못한 채 웅크리고 지낼 수밖에 없었던 한국은 더 이상 조국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였다. 그의 이른 죽음을 뒤늦게 알게 되자 새삼스럽게 그를 껴안고 싶어지면서 든 생각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그의 행방에 대해서 궁금해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나는. 그는 하늘나라 어디선가 오늘도 그 자신이 편히 머물 수 있는 쉼터 위치에 대해 수소문하고 다니고 있을지 몰라도.

그가 마운드에 서 있을 때도 이따금 카메라에 잡힌 그의 시선이 포수 자리를 건너 운동장 바깥쪽으로 자주 향하고 있었던 기억들이 아직도 선명하다. (계속) [Oct.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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