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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립고 고마운 이름들 : 말자야, 경희야, 순이야!

[내 글]슬픔이 답이다

by 지구촌사람 2014. 9. 20.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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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배꼽으로 나올 경우, 원본은 이곳에 있다 : http://blog.naver.com/jonychoi/220127267633

 

            그립고 고마운 이름들 : 말자야, 경희야, 순이야!

 

 

  말자/영희/명숙이/미순이, 선옥/경원/정애/혜란이, 그리고 진주/미라/홍례/장화/은심이.

  이름들을 써놓고 들여다본다. 하나씩 그 이름을 가만히 불러본다. 추억의 출석부 앨범을 펼치고 얼굴들 위에 이름을 얹어 호명해 본다. 그러자 이름 안섶을 들춰보기도 전에 가슴 안쪽이 뭉클해지고 눈자위가 뜨듯해온다.

 

  ‘말자의 뒤에는 영자/경자/미자/숙자/순자/옥자/선자/명자/정자/혜자/홍자/춘자/추자/애자/연자가 길게 줄 서 있다.

  ‘영희의 동무들은 경희/명희/숙희/순희/선희/연희/옥희/은희/정희/종희/진희/춘희.

 

  ‘명숙이에게는 경숙/동숙/말숙/미숙/성숙/영숙/애숙/예숙/옥숙/원숙/은숙/정숙/진숙/혜숙이가 이 나라 어디에선가 시간대를 함께했을 글동무이자 씨동무(소중한 동무)였다.

  ‘미순의 이름 뒤에 경순/명순/은순/영순/옥순/연순/정순/진순/혜순/춘순/말순(끝순)’이를 줄 세우다가 나는 잠시 멈춘다. ‘끝순이라는 이름 대신 말순이라는 이름까지도 감수해야 했던 어떤 이가 떠올라서다. 그녀는 딸그만이라는 이름을 들고 면사무소를 찾아간 아비에게 그런 한자는 없으니 말순(末順)’으로 하라는 면서기 덕분에 딸그만이끝순이를 면하게 되었다고 했던 이다.

 

  ‘선옥이에게는 명옥/순옥/진옥/영옥/은옥/연옥/경옥/춘옥이가, ‘경원이에게는 혜원/정원/미원이가, ‘혜란이에게는 영란/미란/경란/옥란/명란/정란/애란이가 얼굴도 모르는 동기간만 같은 이들이었다.

  ‘정애에게는 영애/경애/순애/미애/선애/명애/정애/진애/춘애, ‘장화에게는 미화/연화/명화/영화/경화/옥화/정화등이 거처를 모르는 이웃들이었고, ‘홍례에게는 정례/춘례/순례/명례/옥례/분례, ‘진주에게는 영주/순주/선주/옥주/은주/연주/경주/혜주/애주, ‘미라에게는 혜라/애라가 그런 이들이었다.

 

  그랬다. 세월을 40~50년 전으로 돌려보면 이 나라 여인네들의 이름 두 자는 거의가 /////////////////////////등에 들어간 있는 글자들의 조합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위에서 거명되지 않은 은영/미영/순영/영심/경은/혜은/정은/은정등도 그런 예에 든다.

  지금 그들은 40대인 막내에서부터 70대까지 분포되어 있다. 주력부대는 아무래도 50~60대라고 해야 한다.

 


[문범강(천경자 사위. 미 조지타운대 교수) 작, '순자 시리즈' 중 각각 '순자', '영자', '옥자'

당시 그들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적확하게 우회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2008년 메릴랜드주 예술상 수상작]


 

 

  지금이야 이름이 촌스럽다고 하더라도 그 핑계를 동명이인이 많다거나 혐오감을 줄 수도 있다는 식의 그럴 듯한 변명거리만 있으면 개명 신청이 받아들여질 정도로 인간적으로 변한 판사님들 덕택에 비교적 쉽게 이름을 바꿀 수 있지만, 예전에는 개명 허가 판결을 받기 위해서는 참 무던히도 고생을 해야 했다.

  법전에 특정한(特定-. 특별히 정하여져 있는) 사유가 아니고는 판사라는 사람들이 꼼짝도 하지 않으려는 그 꽁생원 보수성 탓에 심지어는 <분례기[糞禮記]>(방영웅 작. 1967)에도 나오는 분례’(糞禮. 한글 뜻으로는 똥례)라는 이름의 개명 신청이 1심 법원에서 거부된 적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사제(私製) 개명도 이뤄졌다. ‘말자은정으로, ‘명순이는 미정이로, ‘숙자화진으로, ‘순이아영으로, ‘영심이는 은아. 그리고 그 새 이름이 자신과 가까운 이들 사이에서라도 많이 불리게 되기를 염원했다.

  그런 이들 중 글줄이라도 긁적이는 사람들은 백이면 백, 필명부터 지었다. ‘두심이는 애린으로 명희자린으로, ‘정희으로... 글을 통해서나마 자신의 이름 석 자가 속박하거나 제한해 온 자유를 되찾고 싶어했다. 그 이름을 써보고 싶어서, 퍼뜨리고 싶어서, 글을 쓰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갈수록 그들은 지은 죄도 없이 이름 석 자 앞에서 주눅들어했고 통성명을 할 때면 살그머니 얼굴을 붉히는 일도 생겼다. 괜히 자신의 이름 앞에서 마음이 먼저 가난해지곤 했다.

  그것은 마치 대를 물린 가난만 같기도 했다. 하기야, 이름 석 자는 아비나 집안 어른이 자신에게 물려준 것 중에서 죽을 때까지 붙안고 가야 할 가장 확실한 유산이긴 하다.

 

                                                         *

  그들이 이름 앞에서만 가난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 모든 것에서 가난했다. 다 부족하고 다 모자랐다. 먹을거리, 읽을거리, 볼거리는 물론 시간//기회에서도 다 가난했다.

  맘대로 만지고, 공짜로 맛보고 실컷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흙과 맑은 공기, 그리고 하늘이 전부였다.

 

  먹을거리는 절대 부족이어서 배불리 먹는 것이 으뜸 소원이었던 아이들은 이 나라에 차고 넘쳤다. 있는 집에서조차도 하루 세 끼니를 꼬박꼬박 찾아먹으면 없는 집에 죄 짓는 일이라고 끼니를 줄이거나 밥상 위의 차림을 줄이기도 했다.

  야산의 칡이나 산딸기 따위는 남아나지 않았고, 사내아이들은 심지어 송기(松肌. 소나무의 속껍질)까지도 밝혔다. 점심시간이면 보리쌀이 더 많은 도시락조차도 싸올 수 없어서 물배(물만 먹어서 채운 배)로 끼니를 때운 척해야 하는 아이들도 적지 않았다. 1960년대까지도 여전했던 풍경이었다.

 

  읽을거리 역시 태부족이었다. 교과서 외에 참고서라도 있는 아이들은 부잣집 아이들이었다. 학년이 올라가기 전부터 상급생 언니/오빠/형 집을 미리 찾아가 헌책 예약을 단단히 할 정도로, 교과서 구하기도 하늘의 별 따기였다. 오죽하면 헌책방에까지 가서 교과서를 구하곤 했을까. 당시는 교과서도 무상 배포가 아니었다.

  하여, 동네에서 책 한 권으로 돌려가며 읽기는 예사인 터인지라,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처녀 총각들이 읽어대는 <명랑> 잡지 따위의 <어찌 하오리까> 난을 읽으며 조숙해지기도 했다.

 

  넉넉하지 않기는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놀 시간이나 공부할 시간 대신 집안일에 매여 살았다. 책을 잡고 있을 시간이 없었고, 그럴 시간을 주지도 않았다. 밭일 돕기는 예사였고, 집 안에서 널고 썰고 걷고 하는 일에는 어린나이라고 봐주는 일도 없었다.

  일꾼으로 끌려 나갈 나이가 되지 못하면 코흘리개 동생을 돌봐야 했다. 업고, 먹이고, 닦고. 그 시절 초등 고학년 여학생 정도이면 밥 짓고 걸레를 빠는 데에는 선수였다. (요즘은 시집갈 나이가 되어도 그때까지 밥 한 번 지어본 적 없다는 말이 자랑이 되기도 한다든가 뭐라든가...)

 

  꿰고 걸칠 옷가지 또한 턱없이 모자랐다. 아이들 새 옷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집들이 많았다. 설빔 옷조차도 깨끗이 빤 옷이거나 기운 곳 표 안 나게 갈무리한 옷을 입은 아이들을 대하는 일은 익숙한 명절치레였다.

  구멍 난 양말은 예사이고 팬티도 기워 입었다. 가을 운동회 때 걸칠 흰색 광목천 팬티가 없어서 그날 결석한 적도 있다고(그때는 남녀 구분 없이 그런 팬티가 운동회 고정 유니폼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40주년 기념 동창회에서 어느 친구가 주먹으로 눈물 자국을 훔치며 털어놓기도 했다. 그 기억이 그녀를 N수산시장의 큼지막한 가게 주인이 되게 한 힘이었다며.

 

  그뿐이랴. 가장 모자란 것은 돈이었다. 농촌 같은 데서는 현찰을 접하는 일 자체가 드물었다. 품삯을 받거나 곡식을 내다 팔거나 계란 줄이나 내다 팔아야 겨우 아이들 학용품이나 옷가지를 사줄 수 있었다. 현찰이 들고 날 구멍 자체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돈이 없어서 중학교 진학조차 못하는 동무들은 수두룩했다. 중학생이 된 동무들이 교복과 교모를 입고 쓰고 등교를 하는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혹은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그 시간대가 되면 길을 피해서 가거나 담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내 초등학교 동기 중 대학물까지 먹은 건 겨우 남학생 둘에 여학생은 단 하나뿐이니 말해서 무엇하랴. 더구나 오빠나 남동생은 어떻게든 가르쳐도 딸내미 따위야 후순위로 밀어놔도 그다지 가슴 아파하지 않는 부모들도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저런 부모들의 속사정 뒤에서 아무 소리도 못한 채, 그 시절의 한복판을 뚜벅뚜벅 맨발로 뚫고 나온 이들 중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에 그치고 있는 이들은 죄다 그놈의 가난이 죄였지, 공부를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 당시 공부를 하기 싫어하는 아이들은 이 나라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을 시골에서 도회지로 불러낸 것은 1960~1970년대에 전봇대에 붙기 시작한 차장/미싱공/식모...’ 모집 전단지였다. 먼저 나와 자리를 잡은 이들이 친구, 언니, 동생들을 부르거나 소개했고, 아직 시골을 빠져나오지 못한 이들은 아는 이들에게 연신 부탁을 해댔다.

  ‘8도 잔디 운동장’(명절 때 고향을 다녀오면서 각자 떠온 잔디로 꾸민 운동장)으로 유명한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는 섬유업체가 여공들의 그러한 면학 열망을 채워주기 위해 공장 부지에 설립한 특수학교였는데, 인가 조건에 미흡함에도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학교로 태어난 곳이다. 척박한 노동 여건개선 운동의 불사조로 새겨진 전태일(1948~1970)의 분신도 그런 시대 상황에 대한 헌신적인 몸부림의 하나였다.

 

   그런 시대의 풍경화 하나로 잊히지 않는 게 있다. 서울 문리대 뒤편 낙산 쪽의 고지대에 위태롭게 서 있던 아파트들. 그 아파트 단지에는 서민아파트중산층아파트라는 이름이 떡 걸려 있었다.

  당시는 마루를 들치고 연탄불을 갈아 넣어야 하는 10평대의 주공아파트조차도 감지덕지하던 때이긴 했지만, 대놓고 서민아파트라니... 하기야, 그 중산층아파트라는 것도 겨우 3동인가 있었는데, 모두 26~28평 정도였다. 5층짜리임에도 엘리베이터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밤늦게 돌아와 계단을 오를 때 지금처럼 자동 점등되는 그런 고급(?) 시설 따위는 꿈도 꿀 수 없었고.

 

  요즘 같아서는 그 아파트 이름 하나를 두고도 어쩌면 벌써 국가인권위원회에 아파트 이름이 인권 차별적이라면서 서울시에 개명을 권고해달라는 청원을 넣고도 남았으리라.

 

                                                                  *

   그처럼 없는 것, 모자라는 것투성이인 시절을 묵묵히 감내하고 살아온 이들. 그들 덕분에 이 나라가 지금의 형편을 이뤄낼 수 있었다. 그들의 도움을 아주 크게 받았다.

  비록 자신의 가방끈은 조금 짧더라도, 자식들의 그것만은 한참씩 길게 길게 늘여 키운 이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들을 자식 대에서는 이뤄주기를 바라며, 자신의 부모들이 해주지 못한 것들을 두 배로 제 자식들에게 해주기 위해 몸과 시간을 바쳐온 그들. 그들 덕분에 지금 이 나라가 세계 어디에서고 이만한 행세를 하고 지내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 그들은 그런 자랑스러움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어떤 혜택을 받은 것도 없고, 대한민국의 발전에 공헌한 명예의 전당에 떳떳하게 헌액되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이름 앞에서 괜히 부끄러워하거나 주눅 들어 하는 것도 하나의 증좌다.

  이러면 어떨까. 희망자들 모두에게 조건 없이 개명을 허가해주는 것이다. 별달리 큰돈이 드는 일도 아니고, 표창장이나 메달 따위를 얹어주는 비용이나 시간도 들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조치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뿌듯해 할 것이다. 그들이 살아낸 구절양장의 삶을 이 나라와 이 나라 사람들이 기억하면서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라도 공인받는 일이므로.

   미래에서의 진짜 가난은 외로움이지만, 한편 미래의 부자는 돈이나 권력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사람 값(가치)으로 정해진다(In the future, the poverty in the true sense is loneliness. However, the wealthy person in the future is not made by money or power, but by human value appreciated by people). 이미 그런 조짐이 보이고 있어서 반갑고 우리에게는 그런 이들이 이미 주변에 많이 있다. 수많은 순자와 영자도 그런 이들 중의 하나다. [Sep. 2014]              -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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