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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광등 뒤가 더 어둡다 : 우리 집의 인간 극장

[내 글]슬픔이 답이다

by 지구촌사람 2014. 12. 11.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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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광등 뒤가 더 어둡다 : 우리 집의 인간 극장

 

아침 식탁. 부엌에 매달린 손바닥만 한 티브이가 흐릿한 그림과 말소리를 쏟는다. KBS1<인간극장>. 5부작으로 월~금요일 간에 방송되는데 이번 주의 제목은 <사랑은 아직도>이든가...

 

억지로 끼워 맞추고 쥐어짜고 비틀어대면서 경망을 떨어대는 바람에 3급수로 변질되어 이제는 찍어내기와 자기네들의 밥벌이용으로 전락한 지상파 방송의 드라마들. 그런 것들과 별로 친하지 않은 우리 집이지만 <인간극장>은 보는 편이다. 자연산 무공해 감동이 있기에. 낙엽까지 섞어 담고 졸졸거리며 흘러가는 1급수를 대하는 듯만 한 신선함이 그 화면에서는 솔솔 묻어난다.

 

시간이 맞으면 식탁에서 밥을 먹으며 부엌 티브이로 그걸 보곤 하는데, 한 가지 불편은 있다. 화면이 손바닥만 한지라 식탁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얼굴 모습이나 자막 등을 읽어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예술 영화도 아닌 데야... 그냥 대충 스토리 중심으로 본다.

 

이번 주 이야기의 주인공은 세는나이 40에 접어든 전직 방송 기자 '강남구'. 그는 백혈병으로 7살짜리 아들(민호)을 남기고 두 해 전에 떠나간 아내의 빈 자리를 야무지게 대신하고자 직장에 사표를 내고 전업 주부의 일을 하고 있다.

 

오늘 아침의 일이다. 민호 아빠에게 무슨 음식인가를 들고 온 여인이 등장했다. 그녀에게 건네지는 '남구' 씨의 대답은 처음부터 끝까지 말끔한 존경어 투. 그동안 그 프로그램에 100% 성실하지 못했던 나는 그녀가 그의 장모인가 싶어서 아내에게 물었다. 아내의 대답 역시 불확실... 식사를 먼저 끝낸 아내가 티브이 앞으로 바짝 가더니 자막을 살폈다. 혹시나 등장인물 설명이 나오나 싶어서.

 

그러더니 티브이 화면 방향을 바꾸고 얼굴을 바짝 들이댄다. 1~2초나 흘렀을까. 들이댄 얼굴에 갸웃거림까지 얹히더니 더 바짝... 아내는 어렸을 때부터 심한 근시인데 요새는 노안 증세까지 심해져서 가까운 것을 볼 때마다 고생하는 편인데, 표정이 이상야릇해진다. 잘 안 보여서 짓는 그런 표정이 아니다.

 

내가 물었던 답을 찾기 위한 표정과도 좀 거리가 멀다... 라고 느끼는 순간, 아내의 입에서 외마디 소리가 나왔다.

- 어마! 이거 언니 아냐???

 

                                        *

 

세 해 전에 돌아가신 장모님은 그 집안의 막내. 그것도 맏이와 20년 이상 차이가 나는 까마득한 막내. 그러다 보니, 맏언니의 첫딸과 장모님은 겨우 한 살 차이. 게다가, 언니들은 생산력이 왕성(?)하여 소생이 많고, 하나뿐인 오빠에겐 외아들 하나일 정도로 씨뿌리기 실력들에서는 불균형이 심하다.

 

여하간... 그런 처지이다 보니 장모님 쪽 사람들과 한꺼번에 만나게 될 때면 늘 누가 누구의 자식인지 헷갈릴 정도여서 나는 진작 사람 외우기를 포기했다. 그저 꾸벅꾸벅 인사만 잘하면 되었다. 나는 그 집안의 막내를 장모님으로 모시는 처지인지라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끗발이 없는 졸병이었다. 

 

화면에 나온 70대 여인은 장모님의 둘째언니의 첫아들의 부인이었다. (아고야. 촌수 한 번 복잡타). 진 모친 입에서 대뜸 언니소리가 나온 건 그 때문이었다. 이종사촌오빠의 부인이었으니까. 제대로 가려서 부르자면 방배동 둘째이모의 첫째아들인 형렬오빠의 부인. 즉, 그 언니의 아들이 바로 화면 속 주인공인 강남구씨였다.

 

그제야 비로소, 아내도 그 남구씨를 얼마 전 결혼식장에서 대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어쩐지 그때 아들만 데리고 오더라니...’ 소리와 더불어.

 

부대원(部隊員?)이 많으면 일일이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나이 40이 된 남구라 하더라도, 아내에겐 한참 졸병인 이종조카(姨從姪). 우리 장모보다 한 살이 더 많은 남구의 부친이 장모에게 꼬박꼬박 이모님이라고 불렀으니, ‘남구도 우리가 어려웠을 터. 

 

그나저나... 우리는 겨우 서너 달 전에 본 남구를 알아보지 못한 탓을 찾아내야만 했다. 제일 먼저 오븐 위 귀퉁이 쪽에  매달린 손바닥만 한 티브이 화면 크기를 손가락질했다. 그 다음에는 시력이 안 좋은 핑계를 댔고, 이어서 이모들이 많은데다 웬 자식들이 그처럼 많고 그 자식들의 소생은 어찌 또 그리 대부대(大部隊)인지... 소리를 잇댔다.

 

그러다가, 내가 한마디 했다.

- 그런데, 남구녀석 정말 신통하네. 어찌 제 엄마한테 그처럼 꼬박꼬박 처음부터 끝까지 존댓말이래. 난 그걸 보고 장모인가 했는데...

아내의 대답이 돌아왔다.

- 그 집은 물론이고 이모네 자식들이 얼마나 똑똑하고 바른데. 잘못된 사람 하나 없고 다들 반듯반듯하잖아.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어진 내가 한마디 보탰다.

- 얼른 <가족 밴드>에다가 내일 다들 방송 보라고 올리셔. 내일이 마지막 방송이잖아.

 

아침밥을 먹고 도서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뒤숭숭했다. 뭔가 헛바퀴가 돌아간 듯했고, 괜히 찜찜해져왔다. 그처럼 야무지게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려는 멋진 사내 남구에게 뭔지 모르지만 우리가 크게 잘못한 것만 같았다. 결혼 당시에 이미 아내가 불치의 병에 걸려 있음을 알고서도 결혼했던 남구였다그런 며느리의 죽음을 경사도 아닌 터에 번거롭게 하지 말라며 주변에 알리지 않은 채 조용히 장례를 치른 그 아버지의 아들답게... (그 바람에 내 처가 쪽에서는 아무도 그런 사실을 몰랐다.)

 

우리는 살아 있는 감동 앞에서 그 감동의 실체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알아채고 나서도 쉽게 잊는다. 그리곤 뒤늦게 이런저런 핑계를 대기에 바빠한다. 바로 오늘 아침의 나처럼.

- 요새는 형광등 뒤가 더 어두운 법이야.

그러면서 요새어쩌고 하면서 시절 탓을 덧댄다. . [Dec. 2014]

                                                                                             -溫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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