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이 떳떳하지 못한 밀수입품인 연유
우리나라에서 이 ‘대통령’이라는 엄중한(‘예사로 여길 수 없을 정도로 중대한’) 용어를 정식 발의 절차조차도 없이 슬그머니 - 마치 정식 통관 절차를 거치지 않은 밀수품처럼 - 들여 와 유통시키다가 지금처럼 단단한 자리까지 내주게 된 계기는 상해 임시정부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앞서 짧게 적은 것처럼 이승만의 직책 표기에서 발원되었습니다.
상해 임정을 승인해달라는 청원서를 각국 공관에 보내면서 미국에서 국제법 부문 박사 학위를 취득했던 그는* 자연스럽게 ‘The President’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그것을 ‘집정관 총재(執政官 總裁)’라고 부연 표기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임정 요인들이 문제를 삼은 것은 ‘The President’가 아니라 그것을 해설/부연한 말 중의 하나인 ‘총재(總裁)’라는 표기였습니다. ☞[참고] 이승만은 1910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 중립론>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이승만은 박사 학위 과정 입학을 앞두고 하버드대와 프린스턴대 두 군데에서 영입 제안을 받을 정도였는데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프린스턴대로 갔고, 석․박사 과정을 3년 만에 마칠 정도로 천재였다. 배재학당에 입학 후 1년 만에 외국인 부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2년 재학 후 졸업하면서는 졸업생 대표로 영어 연설(시국 강연 수준)을 했으며, 5년간의 한성감옥 수감 중에는 영한사전을 집필했다. 그의 나이 서른이 되기 전의 일이다.
한성 임정과 노령(露領) 임정을 통합하여 뒤늦게 출발한 상해 임정에서 이승만을 초빙할 때 그는 이미 한성 임정의 ‘집정관’이었으므로 ‘집정관’은 문제 삼을 수 없었지만, ‘총재’는 아니었지요. 당초 상해 임정이 그에게 부여한 자리인 ‘국무총리’와 ‘총재’는 달랐습니다. 특히, 당시 입법권을 갖고 조각(組閣)을 서두르던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측에서 볼 때 국무총리는 부여된 권한 내에서 모든 업무를 총괄적으로 챙기는 사람일 뿐이지만, 총재는 글자 그대로 ‘모든 사무를 관리ㆍ감독하며 결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임시의정원보다 상위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명칭을 문제 삼자 미국의 ‘president’와 일본의 ‘大統領’이라는 두 용어 모두에 익숙하고 정통하던 이승만이 ‘총재’의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걸 양보 삼아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중심제로 개헌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승만을 필요로 했고, 조각을 빨리 마무리해야 할 임시의정원에서는 그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지요. 상해 임정의 1차 개헌은 이승만의 뜻대로 금방 이뤄졌고, 그렇게 해서 ‘대통령’이라는 일제 조립품은 우리나라의 최상위 권력층에 손쉽게 안착했습니다.
더구나 당시 실질적인 투쟁 조직인 군대도 없이 간판뿐이었던 상해 임정은 도처에서 내세운 임시정부들의 구심점에 서야 한다는 내부적 필요도 무척 컸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립을 위한 투쟁(활동)을 대내외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서라도 군(軍)과 정치, 외교를 아우를 힘 있는 통수권(統帥權. 한 나라 전체의 병력을 지휘하고 통솔하는 권력)을 상징할 명칭이 필요하기도 했고요.
호칭으로 드러나는 지도자의 이미지에 군사적 힘을 더하는 것도 한 가지 방책으로 여겨졌습니다. 일제 군사용어인 ‘대통령’에 대해 깊은 생각이 없이, 정치 제도의 기본 줄기가 바뀌는 일이라는 중대성을 고려하지 못한 채 덥석 안아들게 된 데에는 그러한 상황적 요인도 작용했습니다. ‘통령’에 간단하게 ‘대(大)’ 자 하나를 얹어서 그러한 통수권자의 이미지를 살리는 일은 지극히 효율적인 일이라고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측에서는 단순하게 여겼던 것이죠.
하기야 정식으로 앞뒤 따지고 재고 할 처지나 여력조차 없던 망명정부의 비애이기도 했습니다. 당시는 어느 누구도 ‘대통령(大統領)’이라는 말이 훗날 ‘온 백성을 다스리는 최고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변질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정식 절차가 생략된 채 비공식으로 수입된 일제 조립품에 불과했던 ‘大統領’이 대한민국의 안방을 차지하고 ‘대통령’으로 군림하게 될 줄은 당시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뢰벤슈타인(Karl Löwenstein)이 ‘왕관 없는 제왕’이라 칭할 정도의 절대 권력 수준으로 부풀어 올라 있는 현재의 우리나라 대통령 자리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정리]
총재[總裁]? 어떤 기관/단체에서 모든 사무를 관리ㆍ감독하며 결재함. 또는 그렇게 하는 사람.
집정관(執政官) : ‘정권을 잡고 있는 관리’를 뜻하는 말. 콘술(consul)(로마 공화정 때에, 행정과 군사를 맡아보던 장관)과 프랑스 집정 정부의 최고 행정관을 뜻하는 일본의 번역어.
총리(總理) : ‘전체를 모두 관리함’을 뜻하는 말. ‘국무총리’ 및 ‘내각 총리대신’의 준말로도 쓰임.
통수권[統帥權]? 한 나라 전체의 병력을 지휘하고 통솔하는 권력.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 1919년 중국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 안에 두었던 입법 기관.
* 이 글은 근간 예정인 졸저 <우리말 힘이 밥심보다 낫다 - 익혀서 남도 주자>에 수록될 내용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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