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는 각성과는 거리가 먼, 각성제다/최종희
요즘 아주 흔히 눈에 띄는 게 테이크아웃 커피입니다. 길거리에서도 보이고, 출근 문을 여는 손길에도 들려 있을 때가 흔합니다.
하나같은 공통점은 원두커피라는 것인데, 값은 천차만별입니다. 소매점 기준 1,500원짜리가 있는가 하면(코레일의 편의점인 ‘스토리웨이’의 가격) 7천 원짜리도 있죠. 일부 호텔에서는 15,000원에다 ++를 하니까, 18,150원을 내야 하고요.
그렇다고 맛에 큰 차이가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어떤 7천 원짜리보다는 1,500원짜리가 더 맛있을 때도 있습니다. 원두커피를 내린 뒤의 경과 시간과 커피메이커 안의 온도, 첫물인지 바닥 것인지 등이 맛의 관건인 까닭이죠. 사용된 커피 원두가 동격이거나 유사한 등급의 것이라는 가정하에 말입니다.
나는 아직도 인스턴트커피를 주로 마십니다. 이유는 두어 가지 되는데요. 새벽에 책상 앞에서 일을 하다가 커피를 마시는데, 커피포트로 물만 끓여서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다 보니, 시간과 수고가 절약됩니다. 낮에도 내가 주로 머무는 도서관에는 그 흔한 자판기 하나도 없는지라 내가 커피를 만들어 먹어야 하는데 그때도 인스턴트커피 외엔 달리 방법이 없거든요.
그런 주제(?)인데도 내 커피 입맛은 까다로운 편이랍니다. 원두커피를 선택했을 때, 커피 원두 품질이 떨어지거나 배전(roasting)이 좀 잘못되었거나, 내린 지 오래된 끝물 커피에는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의식하지 않아도요. 한마디로 ‘못된 놈’입니다.
나는 커피를 좀 아는 편에 속합니다. 20여 년 전, 구매 담당이 아니었는데도 내 의견을 물어 정기적으로 공수해 오는 원두커피 구매처를 선택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식이 병이라는 말 맞고요. 시원찮거나 의심스러운 원두커피보다는 차라리 내가 잘 아는 ㄷ식품의 인스턴트커피에 손이 더 가게 됩니다. 무조건 원두커피를 인스턴트커피보다 윗길에 놓는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십여 년도 더 된 일인데, 커피에 관한 장문의 잡문을 긁적인 적이 있습니다. ‘커피 앞에서 알몸 되기’(2001년) 라는 제목으로. [원문 가기 : http://blog.naver.com/jonychoi/20055574113]. 인스턴트커피의 제조 공정이 한번 볶아대는 게 주공정인 원두커피보다 몇 배는 더 정성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것도 그 안에 담았는데, 그 부분을 보이면 아래와 같습니다.
...[전략] 이러한 인스턴트커피에 대하여, 그 실질적인 효용을 인정하는 많은 이들도 거기에 붙은 인스턴트라는 용어 때문에 커피의 등급이나 성상 자체에 대해서까지도 무조건 원두커피보다 한 단계 낮춰보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입니다. 만드는 과정으로 보면 인스턴트커피가 오히려 원두커피에 비하여 몇 배나 더 복잡하고 정성스러운 과정을 거칩니다. 원두커피는 그 과정을 요약하자면 커피원두를 잘 골라 씻은 다음 적당히 볶은 뒤 가미를 하거나 해서 진공포장을 하면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스턴트커피는 그런 과정의 중간 중간에 분쇄하고(grinding), 원액을 추출하고(percolating), 원심분리기를 거쳐 진공 농축 후 동결 저장했다가 분쇄 사별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러고 나서 동결 건조기로 가공합니다. 그래야만 커피향도 보존되고 장기 보관이 가능해집니다.
인스턴트커피라고 해서 그 제조공정까지도 손쉬운 인스턴트 방식은 아닙니다. 몹시 까다롭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집니다. 마치, 싱거운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고 해서 그 사람 전체가 싱겁기 짝이 없는 게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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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 얘기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사현상(傾斜現象. 우르르 남들 따라 하기)’에 빠지지 않는 것은 자신의 몸수고로 제대로 앞뒤를 알아보려는 노력들이 생략되는 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허세 부리기가 될 때도 많습니다만.
이를테면, 커피 이름 앞에서도 그런 일은 흔히 벌어집니다. 한때 유행했던 것 중에 ‘카페 라테’니 ‘카페 오레’니 하는 것들이 있었죠. 그것들도 알고 보면 암 것도 아닙니다. ‘라테’나 ‘오레’는 각각 ‘우유’를 뜻하는 이탈리아 말과 불어일 뿐이거든요. 밀크커피와 같은 뜻입니다.
‘비엔나커피’라는 말이 아직도 쓰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 말이 쓰인 ‘비에나(비인)’에 가면 그런 커피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 부르고 있는 커피를 애써서 찾아내 보면 그 이름은 ‘아인쉬페너(Einspaenner)’인데, ‘말 한 마리가 끄는 마차, 독신 남자’란 뜻입니다. 어째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모르지만요.
한때 이 나라를 휩쓴 것 중에 ‘헤이즐넛’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무슨 대단한 커피인 것으로 여기고 그 이름을 입에 붙이고 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만, 그것 역시 별 것 아닙니다. 향커피의 일종일 뿐이거든요. 커피 원두 가공 시에 개암(개암나무의 열매)을 볶아 만든 가루를 섞은 것일 뿐입니다. 개암의 영어 이름이 헤이즐넛일 뿐이니까요.
사실 이 헤이즐넛 커피는 블루마운틴과 같이 원두커피의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고급 원두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중저가품을 쓰지요. 고가품은 그 자체의 커피 향만으로도 대접을 받고, 바로 그 때문에 높은 값을 받기 때문에 다른 것을 섞어 품격을 떨어뜨릴 일이 아니지요. 그러니 그처럼 떠받들기도 했던 헤이즐넛 커피의 원두 등급은 저절로 짐작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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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의 기원은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대체로 두 가지로 모아지는 것 같습니다. 에티오피아 아비시니아의 목동 칼디가 양들이 먹고 날뛰는 것을 보고 수도승에게 갖다 주자 수도승이 그걸 악마의 씨앗이라고 하여 불에 태웠는데 거기서 커피 기름이 나오고... 해서 결국 그것을 음료로 만들어 나중에 졸음이 오는 것을 쫓기 위한 용도로 쓰였다는 설이 그 하나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밤잠을 자지 않고 기도하는 마호메트에게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갖다 주었다는 설도 있지요. (이 천사장 가브리엘에 관한 기록은 코란에도 등장할 정도여서 이슬람교에서도 인정받는 유일한 기독교 인물입니다.)
이 두 가지 이야기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6~7세기의 일이라는 것, 거기에 등장하는 것은 커피의 원조 격인 아라비아커피라는 것, 그리고 그 주된 용도는 졸음을 쫓는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즉, 커피는 맨 처음 잠이 오는 것을 억제하는 각성제로 쓰였습니다.
각성(覺醒)은 ‘1.깨어 정신을 차림. 2.깨달아 앎’을 뜻합니다. 아주 멋진 말이지요. 그런데 막상 ‘각성제(覺醒劑)’라는 말에 이르면 그 뜻이 좀 고약해집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중추 신경을 흥분시켜 잠이 오는 것을 억제하고 피로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약. 습관성, 중독성이 있어서 제조와 판매를 법으로 규제하고 있다’로 나오거든요.
묘한 일입니다. 각성은 좋은 말인데, 각성제는 그렇지 못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두 말의 관계는 마치 원두커피 앞에 서 있는 우리들의 모습과 닮은꼴인 듯싶은 생각도 들게 합니다. 원두커피라는 말에 혹해서, “인스턴트커피 따위를 마시는 사람과는 격이 달라, 어떻게 촌스럽게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나” 하는 생각부터 하는 탓에, ‘커피라면 원두커피여야 해’라는 생각을 기성품처럼 꺼내드는 것은 아닐까요.
그 이면엔 테이크아웃 원두커피 컵을 든, 남들을 따라서 덩달아 해대고 있는 그 자신의 모습이 있지만, 그런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생각조차 안 하거나 못 한 채로 그러는 거지요. 최초의 쓰임이 각성제였던 커피를 마시면서, 그것도 인스턴트커피의 열 배 스무 배쯤 되는 비싼 원두커피를 아무 생각 없이 선택한 사람이, 정작 중요한 각성은 생략하거나, 귀찮다며 건너뛰는 거죠. 남들 따라서 덩달아 들고 다니는 테이크아웃 원두커피 한 잔이 ‘중독성이 있어서 규제를 받아야 하는 각성제’일 뿐일 수도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거나 못 하는 겁니다.
이 글을 마쳐야겠습니다. 10여 년 전에 긁적였던 잡문의 결론 부분을 인용하는 것으로요. 그때의 그 얘기가 여전히 유효한 듯해서, 조금은 답답하기도 합니다. 안타깝습니다. 커피 앞에서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는 일이 그처럼 어려운 일인가 싶어져서요. ‘각성’이란 말이 고급 낱말이어서 괜히 엄두를 못 낼 수도 있을 듯하여 ‘생각’이란 말로 바꾸어 보았습니다만.
...[전략] 통틀어 우리의 모습을 돌아다봐야 할 경우에는 인스턴트커피다 원두커피다 굳이 가리지 말아야 할 경우가 많은 듯합니다. 우리들의 통상적인 삶에서 맞이하는 가장 흔한 경우의 수, 선택의 조합이 바로 그런 까다로운 구분이 없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때 우리가 정작 해야 할 일은 인스턴트커피고 원두커피고 구분할 것 없이 관심사항에 불과한 커피라는 것에서 훌쩍 벗어나 진정한 삶의 책무라고도 할 수 있는 일들에 몰두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판기 커피가 되었건, 아내가 끓여주는 인스턴트커피가 되었건 아무 거나 한잔 들고 골똘하게 몰두해야 하는 대상은 삶의 본질적인 내용을 구성하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따금 커피 앞에서 발가벗을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커피 따위에 매달리거나 발목이 잡혀서 주춤거리는 일 따위에설랑 가볍게 벗어날 수 있도록, 때로는 알몸으로 삶을 대하는 훈련을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자판기에서 뽑아준 한 잔의 커피를 아무 생각 없이 맛있게 먹을 수도 있고, 맘에 드는 원두커피를 골라 정성스럽게 한 잔을 만들어 먹을 수도 있도록, 커피에 관해서만이라도 나는 자유롭고 싶습니다. 아무런 조건도 내걸지 않고 나는 그저 커피 앞에서 때때로 알몸이 되고 싶습니다.
칼디 목동이 양 떼의 도움을 받아 우연히 커피나무를 발견한 덕분에, 수도원장이 수도사들에게 기도 중에 졸지 말라는 의미로만 커피를 주었을 때처럼, 나도 커피 앞에서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일랑 접어두고 가장 단순한 모습으로, 한 올의 치장도 걸치지 않은 채로 그냥 살고 싶습니다...
[Mar. 2015] -溫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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