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대산 삼길포 뒷산, 2009년)
유난히 벚꽃 앞에서 설레는 여심의 진실/최종희
...사쿠라꽃 피면 여자 생각난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사쿠라꽃 피면 여자 생각에 쩔쩔 맨다.
이것은 김훈의 기행 산문집 <풍경과 상처> 중 ‘여자의 풍경, 시간의 풍경’이라는 제목에 담은 김훈의 벚꽃 감상기 압축물이다. (전문이 궁금하신 분들은 이곳에 가면 대하실 수 있다 : http://blog.naver.com/jonychoi/20066302055)
이 글을 대하고, 어떤 이는 이런 짧은 감상기를 덧붙였다.
...이 사람은 사쿠라꽃을 모르는 사람이다.
사쿠라꽃은 질 때 더 여자 생각이 난다.
미친 것들처럼 빨리 그토록 허무하게 화르르륵 지는
그 낙화를 보면 정말 여자 생각이 난다.
사내가 하는 여자 생각이 가장 아름다운 때는 더 이상 누릴 사랑의 여분이 없을 때이다. (이상국)
내가 어떤 벚꽃 사진을 대하고 나서 거기에 매단 댓글은 이렇다.
...벚꽃은 꽃이 질 때, 더 아름답죠.
왕성해서 분분하고
의기팽창으로 야무지고
바닥에 내려서도 풍성함으로 의젓하고...
특히, 달빛 아래 소복하게 쌓인 채 안 밟힌 벚꽃들은
한 해 한 번의 요정들 야회(夜會)라고나 할까.
버려져서 보물섬이 되어 버린
그 섬에서
이 벚꽃들은 앞으로 오래 제대로 사랑받을 듯싶군요.
김훈과 이상국의 시선은 어쩔 수 없이 남성의 그것이다.
어쩔 수 없다고 적은 것은 그들의 감상기 밑바닥에는
벚꽃과 관련된 이 나라의 여인상들이 깔려 있어서다.
그들은 벚꽃 앞에서 벚꽃만 같았던 여인이나
벚꽃과 함께했음직한 여인들을
밑그림과 배경으로 ‘어쩔 수 없이’ 채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는 벚꽃 앞에서
사족을 못 쓰는 처지들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꽃 앞에서 여인들이 사족을 못 쓰는 건
벚꽃이 압도적이다. 실상을 알고 보면 그렇다.
화전(花煎. 1.찹쌀가루를 반죽하여 진달래/개나리/국화 따위의 꽃잎이나 대추를 붙여서 기름에 지진 떡.
2.여러 가지 색으로 물들인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꽃 모양으로 만들어 지진 떡) 놀이의 대표선수로
꼽히는 진달래꽃도 있지만, 그건 꽃을 따다가 앉아서 붙여먹는 과정이 주된 일.
진달래꽃을 따러 나간댔자, 그저 방안을 벗어나 잠시
봄바람을 쐬는 일로 그치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진달래꽃을 따러 가면, 거기까지 따라 와 봐주는
남정네들은... 없다!
예전에 소풍을 ‘원족(遠足)’이라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동네를 벗어나 좀 멀리 바람 쐬러 발품을 파는 걸 뜻했다.
그런 시절 봄철 원족의 목적지에는 대부분 벚꽃이 있었다.
그것도 흐드러지게 피어나거나, 꽃비처럼 떨어져 내리는 벚꽃들이.
(‘꽃비’의 원조는 그러므로 단연 벚꽃이다. 암만...)
예전에, 요즘의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불리던 시절
<창경원 밤 벚꽃 놀이>라는 게 있었다.
통상의 폐장 시각인 6시를 밤 열 시론가 늦춰주는 것이었는데
문 닫을 시각이면, 아직도 못다 푼 춘정의 끝자락을 부여잡고서
어둠 속을 찾고 또 찾아 그곳 경비원과 숨바꼭질을 해대는
연인들도 적지 않았다.
밤 벚꽃 놀이 때 여인들은 하나같이 원피스나 스커트 차림이었다.
놀러오는 데 웬 정장? 하겠지만, 그런 여인들과 자리를 함께한
이들은 그 쓰임에 뒤늦게 크게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연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좁은 사무실에서 가끔 부딪히는
은근한 눈길을 부담스러워하던 여인도 그날 그런 날만은
종아리에 머무는 사내의 눈길을 굳이 거부하지 않아도 좋았다.
<표준국어대사전>에조차 남녀 성기를 곧이곧대로 등장시키는 바람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고상한(!) 축에 드는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봄 0지가 쇠 저를 녹이고 가을 0이 쇠판을 뚫는다.
(우리 조상들의 밝고 현명한 ‘돌직구’ 식 인간관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나는 굳이 ‘고상한’이라는
패찰을 매달았다. 형식적인 내숭처럼 음험해서 낭비로 끝나는 소모적인 것도 다시없는 것이기에.)
이처럼 여인들의 춘정을 끓어오르게 하는 꽃이 바로 벚꽃이다.
여인들은 벚꽃 앞에서 말을 잃는다. 그저 아아!! 소리만 되뇐다.
여인들을 그처럼 한 방에 보내버리는(?) 벚꽃.
도대체 그 녀석에게는 무슨 비밀이 있는 걸까.
어째서 그처럼,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 부자와 빈자, 잘 생긴 사람과 못 생긴 사람 등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모든 여심들을 그것도 제 발로 그 앞에서 녹다운되거나 널브러지게
만드는 것일까. 무슨 근거라도 있는 것인가?
답은 ‘있다’다. 내 관찰에 의하면 그것도 무척 과학적(?)이다.
꽃에는 화식(花式)이라는 게 있다. 꽃받침, 꽃잎, 수술, 암술 등의 기호 뒤에 숫자를 써서 그것들이
몇 개인지를 나타낸다. 전문가들은 그 화식만 보고도 무슨 꽃인지를 대충 감 잡을 정도.
꽃받침 5, 꽃잎 5, 수술 여러 개, 암술 1개인 벚꽃의 화식(花式)은 K5C5A∞P1로 표시된다.
잘 보면, 암술 하나에 수술이 왕창(?) 많다. 오죽하면 무한대 표기를 사용했을까. 하하하.
(참고 : 화식 표기에서의 무한대 ∞ 표지는 실제로 그처럼 무한대로 많다는 건 아니고,
수가 많다보니 헤아리기 힘들거나 구분이 어려운 경우에 쓰인다.)
암술이 발달해야 향기도 제법이긴 마련인데, 사정이 이렇다 보니 (숫놈들이 설치다 보니) 벚꽃에는
향기가 없다. 향기가 없다고 해야 할 정도로 미미하다. 하지만, 여인들은 이미 향기 따위에는
무심하다. 꽃의 향기란 벌.나비를 유인하는 것처럼 주로 유혹의 도구로 쓰이기 마련인데, 여인은
이미 벚꽃이 피워올린 봄기운에 제대로 유혹되어 흠뻑 빠져든 터. 자신의 유혹 업무(?)조차도
까마득히 잊어버린 걸 어쩌랴...
글을 줄이자. 우리 주변에서 흔히 대하는 꽃 중에 이처럼 수술이 무한대로 표기되는 꽃은 벚꽃뿐이다.
향기도 거의 없을 정도로, 미미한 것 앞에서 그처럼
알아서 제 발로 우리를 널브러지게 만드는 것도 없다.
꽃비의 원조라 부르기에 차고 넘치는 것도 벚꽃이다.
그런 벚꽃 앞에서 여심들이 녹아내리는 데에는
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낱개의 사연들은 각양각색이지만 꽃비로 휩쓸려 내려갈 때는
한 색깔일 뿐인 여심들이어서다.
벚꽃 앞에서 설레기.
그것처럼 자연스럽고도 건강한 여성성은 없다.
벚꽃 앞에서 설렘이 없는 여인.
미안하게도 그 사람은 이미 여자가 아니다.
그 설렘의 회복을 서두르는 일이 삶의 회춘에도 지름길이 되지 않을까.
[追記] 벚꽃에 과한 소품 진실들
1. 포토맥 강가의 벚꽃 이름 영문 표기
미국의 수도 워싱턴DC 남쪽을 흐르는 포토맥 강가에는
유명한 벚꽃 길이 있다. 그곳 벚꽃에 처음 매달린 푯말은
Japanese Cherry였다. 그걸 보고 분개한(?) 청년 외교관
한표욱은 모든 자료를 찾아서, 그것이 한국 원산지인
왕벚나무임을 밝혔고, Korean Cherry로 이름표를 바꿔 달았다.
그러자, 일본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난처해진 미국 측은
이름을 Oriental Cherry로 바꿔 달아서, 두 나라를 다독였다.
이 얘기는 당사자인 한표욱 교수님(주영 대사를 끝으로
5개국 대사를 역임했던 명 외교관이자, 국제정치학 교수)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긴데, 그의 저서 <한미 외교 비사>에도 나온다.
2. 제주도 왕벚나무의 원산지 논쟁과 산벚나무
‘겹사꾸라’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진 이 겹벚꽃의 원산지는
제주도 한라산이다. 왕벚나무의 기원에 대해서는 올벚나무와 산벚나무의 교배로 생긴다는 설 등 많은 논쟁이 있었으나, 1932년 일본 교토대학의 고이즈미겐이치[小泉源一] 교수가 한라산의 해발고도 약 600m 되는 곳에서 왕벚나무의 자생지를 발견, 확인함으로써 이에 대한 논쟁이 끝났다. 최초 발견자는 1908년 4월 15일 프랑스 신부 타크. 한라산 북쪽 관음사 부근의 숲속에서 발견했다.
아직도 이런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두 나라의 아마추어들 사이에서는 입씨름들이 이어지고 있으나, 혹시라도 그런 일이 있으면 이 자료를 제시하면 된다. 일본에는 왕벚나무 자생지가 발견된 곳이 없다.
제주 서귀포시 신례리에는 이를 기념하여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왕벚나무(1964년. 천연기념물 제156호)가 있다. 해발고도 약 500m 되는 곳이어서, 차에서 내려 좀 가야 한다.
참고로, 벚나무에는 아종이 많다. 외견상으로는 전문가도 쉽게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교배종이 많이 생긴 탓이다. 들어도 모를 정도로 많다. 개벚나무(Prunus leveilleana), 흰겹벚나무(for. albo-plena), 가는잎벚나무(var. densiflora), 사옥(var. quelpaertensis), 잔털벚나무(var. pubescens), 털벚나무(var. tomentella) 등등.
일반인들은 겹벚꽃과 겹꽃이 아닌 것 두 가지로 구분해도 족하다. 후자에 속하는 것들을 ‘산벚나무’라는 통칭으로 부르고 있는데, 정식 명칭은 아니다. 요즘 아파트나 거리 조경수로 많이 심는 게 이 산벚나무다. 겹벚꽃에 비해 나뭇값이 싼 이유도 한몫하고 있다.
3. 재질로서의 벚나무
목질이 참 좋다. 조각가들은 한결같은 결과 질감 때문에 느티나무를 으뜸으로 치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벚나무만 고집하는 이도 있을 정도. 이렇게 표현하면 좀 그렇지만, 사랑을 듬뿍 받은 중년 여인만 같다. 느티나무가 30대 여인의 그것이라면 벚나무는 40대 여인의 그것. 재질도 좋고 광택이 아름다우며, 가공성이 좋기 때문에 고급 가구나 악기재 또는 정밀기계의 목재 부분으로 사용된다.
영국의 2대 수제 명품 자동차에 드는 벤틀리의 차내 인테리어에 자연산 우드 필름으로는 딱 한 가지만 쓰는데, 그게 벚나무의 밑동과 뿌리다. 벤틀리에는 같은 무늬가 있는 게 단 한 대도 없다.
4. 진해 군항제와 장복산(長福山) 벚꽃 구경
나는 개인적으로 진해 군항제 때의 벚꽃 구경보다는 장복산(마산-진해 간에 진해 진입 직전 왼쪽에 있는 산)의 밤 벚꽃을 열 배 스무 배 좋다고 말하곤 했다. 이유는 딱 한 가지다. 진해 벚꽃은 그 외모와 숫자로 장관이지만 그 앞에서 사랑하는 여인과 뽀뽀를 할 수는 없다. 꽃비 감상은 물리도록 할 수 있지만, 그 길을 다 걷고 나면 여인과 맞잡은 손의 손바닥엔 땀이 흥건하다. 꽃비 아래에서는 대낮에 뽀뽀해도 이쁘게들 봐주면 좀 좋으랴만... 하하하.
예전 장복산 벚꽃 길 초입에는 차들이 많았다. 밤에는 특히나. 차창을 열고 올라갈 때부터 심상치 않은 공기가 덮쳐오는 곳이다. (야외 조각공원까지 갖춰졌다는 요즘에는 어떤지 잘 모르겠다.)
그 길지 않은 길을 다 걷진 못한다. 어디서고 멈춰 서서 저절로 연인의 입술을 찾게 되므로. 둘 다 누구랄 것도 없이... 그리고, 그곳에서는 그런 연인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이들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때쯤의 장복산 밤 벚꽃은 사랑교 교주님으로 손색이 없다. 완벽하게 모든 사람들을 사랑에 빠져들게 한다. 장복산(長福山) 벚꽃 앞에서 사랑을 하면 오랜(長) 복된(福) 사랑의 시발도 된다. 믿거나 말거나... [April 2015]
-溫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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