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효막심, 혹은 임종 부재(不在) 알리바이
- 떠나신 장모님께 드리는 약속의 글
2011년 11월 8일 저녁 9시 9분. 장모님께서 임종하셨다. 4년 8개월 동안의 폐암 말기암 투병 끝에...... 국립암센터에서 가장 못된 의사로 널리 알려진 - 병원 홈페이지에는 그녀에 관한 불만 글이 가장 많다 - 담당 여의사로부터 ‘할머니께서는 별나게도 오래 사시네요!’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오래 그리고 참으로 의연하게 버텨 오시던 분.
이틀 전 일요일 오후에 급격한 호흡곤란으로 가정용 산소호흡기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때, 신속한 119의 출동 덕택에 한 차례 위기를 넘기시자 장모님은 이렇게 말했다. 안경 안으로 자꾸만 시야가 뿌예 와서 고개를 숙인 채 장모님 손발을 주무르고 있던 내게.
“얼굴 들어 이 사람아. 화요일에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으니까, 웬만하면 하나님께서 그 소원을 들어주실 겨. 자네도 그렇게 기도하게. 목요일에 우리 손녀 수능도 있고, 주말엔 진이 어미 음악회 행사도 있으니 마치는 걸 봐야지. 그리고 월요일은 목사님들의 휴일이시니까, 그날은 피해서 화요일 날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다네.”
엊저녁 밤새 흘리는 땀을 닦아드리고, 최고압으로 단계를 올려서 조정한 산소호흡기의 도움으로도 힘든 호흡곤란이 올 때마다, 가슴으로 머리를 받아 안아드리느라 온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한 아내. 오늘 아침 집으로 돌아오자 나에게 며칠만 이천으로 가 있는 게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나는 어제, 수술이 화급한 급성 디스크 환자로 확인 사살(?)된 몸이었다.
어제 아침 나는 동네 병원에 갔다. 그리고, 전문 병원으로의 진찰의뢰서를 받았다. 급성 디스크인 것은 맞은데, MRI촬영을 해야만 진행 상태와 신경근증(神經根症, radiculopathy. 의사의 진단의뢰서에 적혀 있어서 나도 알게 된 단어.) 치료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며.
전국망을 갖춘 전문병원이라고 최근 크게 떠오르고 있는 일산의 모 병원에서 오후 내내 시간을 보냈다. 진료대기와 촬영(엑스레이와 MRI)대기를 반복하면서.
결과는 어제 당장 입원해서 수술을 받으라는 것. 의사의 표현 그대로 적자면 “확실하게 터져서” 수술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고, 수술도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반드시 하라는 거였다.
‘확실하게 터지다’. 그 말을 듣자, 지난 1년 내지는 두 달 동안 내 척추가 얼마나 나를 손가락질 했을까 싶었다. 그 동안 30여 년 넘게 공들여 왔던 허리를 내 미련한 단순함 때문에 하루에 박살낸 셈이므로.
1980년. 서양 여자들이 잔뜩 지켜보는 3미터 깊이의 다이빙 풀장에서 똥폼을 잡는답시고 물속에서 급회전을 하다가 한 번 허리를 다쳤고, 바닥이 콘크리트인 곳에서 테니스 로빙 볼을 멋지게 처리한답시고 개폼을 잡다가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또 한 번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당시 국내에는 그 명칭조차 생소하던 카이로프락틱 치료를 받고 허리 운신이 가능했다.
그 뒤로는 맨손체조, 스트레칭은 기본으로 했고, 항상 앉는 자세를 신경 써서 똑바로 고쳐 앉곤 했다. 운전석 의자조차도 거의 직각에 가깝게 했고, 중역들에게 제공되는 똥폼 잡기식 대형 가죽의자를 내버리고 내 몸에 맞는 듀오백 의자를 내 돈으로 사서 바꿔 앉곤 했을 정도로 허리에 신경을 써왔는데......
작년 7월부터 하루 10시간씩 컴퓨터 작업을 해왔다. 그리고 이곳 부악문원에 들어와서는 이런 황감한 환경과 과분한 팔자에 보답하는 길이란 내가 그저 열심히 일을 해내는 것뿐이라는 생각으로 하루에 15시간 이상씩 의자에 앉아 일했다. 중간 휴식이래 봤자, 담배 한 대 피우고 그때마다 커피 한 잔씩 하는 정도. 5분이나 되었을까.
그렇게 50여 일을, 의자 지키기로 미련을 떤 게 주범이었다. 앉아 있는 자세가 서 있을 때보다도 2~3배의 하중을 척추에 가한다는 걸, 이번에야 알았다. 그 때문에 반드시 1시간에 최소한 10분 정도를 쉬어 주어야 하고, 그럴 때마다 일어서서 걷거나 움직여줘야 한다는 것도.
몇 년씩 파대는 고시생들이 보면대(譜面臺)에 책을 얹고서 선 채로 책을 보기도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를 제대로 알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처럼 잠깐씩 수시로 제때 풀어줘야 하는 운동을 쌓아두었다가, 나처럼 하루치를 아침에 몰아서 해대는 건 최고의 바보짓이라는 것도 이번에야 알았다.
‘확실하게 터진’ 디스크라서 신경절단술이나 또 다른 방법들을 쓸 수도 없다는 의사에게, 평소에 꾸준히 체조와 스트레칭, 심지어 허리용 전문체조까지도 해왔는데 이럴 수가 있느냐고 (속으로는 엄청 억울해서... 정말이지 디스크 환자는 문제 있는 반대쪽 다리를 45도만 들어 올려도 아파서 끙끙거리는데, 나는 지금도 90도를 꺾을 수 있다) 슬쩍 항변했을 때, 의사의 답변이 그랬다.
제아무리 힘세고 건강한 당나귀라도 1톤짜리 돌덩어리를 억지로 지우고 걷게 하면 그 허리가 견뎌납니까?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천하의 헛똑똑이... 그게 이번의 급성 디스크를 자초한 내 모습이었다. 급격히 왼쪽 다리에 힘이 빠지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걸음걸이조차 저절로 심하게 절룩이게 되는 그런 꼴로 장모님 앞에 나서서 걱정을 더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 역시도 아내의 그 말이 나오기 전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확실한 그림이 나오지 않은 터에 아내가 이천행을 권유한 것. 내가 오늘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이곳 부악문원으로 향하게 된 사연이었다.
*
나는 이번에도 또다시 임종을 못했다. 임종 부재, 그게 또 되풀이되었다. 이제껏 내 가까운 피붙이의 마지막 자리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몫이었다.
늘 내게 남은 건 임종 현장 부재 증명, 곧 임종 알리바이뿐이었다. 지금도 그러하듯이.
내 아버지. 32년 전인 1979년에 돌아가셨다. 시골에서 국제전화를 건다는 일조차도 희귀하던 그 시절에, 아버지께서 내게 전화를 해오셨다.
-둘째야. 휴가가 언제냐? 요즘... 네가 보고 싶구나.
말수가 아주 적으신 아버님께서 국제전화까지 거셔서, 휴가날짜를 물어 오시는 까닭을 수화기를 놓자마자 알았다. 정식 휴가가 한 달 뒤였지만, 아주 높은 윗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던 나여서 휴가를 앞당겼다.
서울로 들어와, 병원에 계시던 아버지를 퇴원시켜 집으로 모시고 가는 택시 안에서 아버지는 내내 내 무릎에 머리를 얹고 계셨다. 그 뒤 며칠을 지켜보았지만 상태도 괜찮아보이셔서, 잠깐 내 집으로 돌아가 있는 사이에 새벽에 전화기가 울었다.
그리고, 그 잠깐 사이를 떠나 있었던 내 안은 오래 울었다. 사내자식이 아버님을 보내고 여러 달이 지나도록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나의 인생 모델인 아버지를 그렇게 떠나 보낸 불효까지도 파도처럼 밀려오곤 했다.
내 어머니. 당참과 껴안기 너비만으로도 손에 꼽히고도 남으실 분이지만, 내게 ‘나도 울 엄니처럼 잘 죽고 싶다’는 꿈을 남기고 가셨다. 1985년 초가을. 뒤늦게 유학을 꿈꿔온 내게, 국내에서도 영어로 쓰고 말하고 가르치고 생활할 뿐만 아니라, 전 학년 장학금에다 생활비까지 주는 대학원이 있으니 여기로 오라. 그 대신 전원 기숙사 생활(무료)을 해야 한다...고 선전하는 곳이 있어, 그곳에 몸담고 있을 때였다.
어머니는, 막내며느리가 점심 밥상을 차려들고 들어가서 “어머니 잡수시자는 국수로 해왔어요!” 하자, 대답이 없으셨다.
안방에 앉으신 채로, 마치 고승들이 앉아서 입적하는 그런 자세로, 막내며느리와 작별하셨다.
드러난 지병으로 크게 고생하신 적 없으신 채, 상(床)을 받으시고 우리에겐 상(喪)을 주셨으며, 뒤에 남은 사람들은 그런 어머니의 마지막을 칭송하는 것으로 큰 상(賞)을 기꺼이 드렸다.
내 형님. 그 인생 궤적은 소설책 두어 권으로도 모자랄 정도의 분. 나의 초등학교 5년 선배로서, K중학교와 B고교를 거쳐 S대 법대를 단숨에 들어간 게 앞면의 모습이라면, 중2때 빈집에 들어가 동네 형들과 노름을 하다가 걸려서 강제 귀향 조치까지도 당하고, 삥땅 방지를 위해 차주 가족들이 버스 앞자리에 올라 승하차 머릿수를 인원판에 적기도 하던 시절에 도리어 차장 아가씨와 공모하여 소규모 삥땅을 치고 그걸로 용돈 규모를 늘렸던 괴짜.
이런 비화들은 상대도 안 될 정도의 사건도 있었다. 신문지상에까지 실릴 정도로 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일. 낮엔 최고의 명문대 학생이면서 밤에는 S동 소재 N극장파 깡패 두목으로 1인2역을 하다가 전국 깡패 일제 소탕전에 걸려서, 제주도의 516도로 건설에 강제노역 1년 종사. 그게 내 형님의 화려한 이력(?) 중 일부다.
그런 분이 이 좁은 나라가 싫다며 넓은 땅 미국에서 활개를 치다가, 성격이 괴상한 줄도 모르고 결혼했던 재미동포 형수를 벗어나고자 프랑스 지사 근무를 자원하고, 나중에는 그걸 현지법인으로 키워서 초대 법인장이 되어 프랑스에서만 30여 년을 보낸 그.
한국엔 업무차로 여러 번 들렀지만, 짧은 출장 중에는 왔다 간다는 말도 없이 슬그머니 다녀가기도 했던 그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길 설고 낯선 곳이 되어가는 이 땅에서 어느 밤중에 음주 차량에 희생된 게 2000년의 일이다.
지갑 속의 명함 이름으로 아무리 조회를 해도 신원이 파악되지 않는 탓에 (그분은 주민번호 뒷자리가 현재의 7자리가 아닌 6자리 시절에 이 나라를 떠난 분. 주민번호가 처음에는 6자리였다는 걸, 나도 그때서야 알았다.) 돌아가신 지 한 달 만에야 천안의 모 대학병원 시체실에서 그를 대할 수 있었다.
무연고자 처리가 될 뻔했던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외교부에까지 탐색을 하고, 본적지를 찾아 면사무소를 방문하여 탐문한 끝에, 면사무소 직원 중 하나가 우리 집안을 잘 알고 있어서 우리와 연결이 되었는데, 그처럼 온갖 경로로 정성스레 추적했던 어느 40대 경찰의 덕분이었다.
하도 고맙고, 이 나라에 그런 분도 있다는 것을 알려야겠다 싶어서 당시 경찰청 차장으로 있던 아는 이에게 이야기했고, 경찰청장에게 편지를 썼으며 총리실에도 사연을 올렸다. 그 결과, 그에게 내려진 표창장이 더 높은 표창이 아닌 경찰청장 표창이라서 섭섭하긴 했지만, 마음 빚을 조금은 덜 수 있었다.
그 전에, 또 하나의 물건(?)이었던 내 동생의 죽음도 있다. 결혼을 하고 나서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거물급의 딸이라는 걸 알 정도로, 참으로 착하고 예쁜 제수와 미국에서 만나, 처가인 괌으로 활동지를 옮겼다가 현금이 많은 것으로 소문나는 바람에, 원주민 차모로 족의 강도행각에 희생된 동생.
1992년에 전화기 너머로 울음이 넘쳐나서 간신히 통화를 끝낼 수 있었던 제수와, 괌 땅의 제수네 가족묘지에 그를 묻고 나서, 내가 제수 손을 잡자 그 자리에서 혼절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마지막까지 벼텨 내던 그 의연함이 남편의 혈육 앞에서 무너져 내렸지 싶다. (당시 괌 상원의장이 동생의 장인이었는데, 동생 내외는 그런 거물급 처가 얘기를 결혼 후 한참이 지나도록 우리에게 뻥긋도 하지 않았었다. 제수는 지금도 홀몸으로 두 아이를 반듯하게 잘 키우고 있다.)
*
임종하지 못하기. 임종 부재. 예전에는 그것처럼 불효막심한 것도 없었다. 위급한 소식을 들으면 밤길을 도와서라도 화급하게 달려가곤 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임종 소식을 전해들은 지 2시간이 넘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난 일요일에는 시내로 나가는 버스가 없어 택시를 부른 김에 동서울터미널까지 5만5천 원의 택시비를 들여 달려갔는데... (그것도 착한 기사를 만나, 1만 원 이상의 에누리 혜택을 입은 것.)
두 가지 때문이다. 실은 오늘 돌아오면서 예감이 이상해서, 수시로 전화를 했다. 무엇보다도 엊저녁 꼬박 밤샘을 하다시피 한 아내가, 만약 일을 당하면 그 성격에 한숨도 자지 않고 버틸 것이 분명한 터라, 조금이라도 눈을 부치라고 여러 번 권하다 보니, 장모님이 의식 불명 상태로 들어간 것을 나도 저절로 알게 된 것.
그러다 보니, 불안감이 가중되었다. 지난 주 아무래도 이상해서 내가 매일 전화를 하면서 장모님 상황을 묻게 되었을 때와 똑같은 불안감. 그리고, 그런 내 불안감은 참으로 희한하게도 지금까지 적중(?)되곤 하는 불운을 겪어왔다.
그 다음은 이곳 교통편 탓이다. 중부고속도로 서이천 톨게이트와 지척인데도, 이천 시내 쪽에서는 완전 벽지다. 시골구석도 그런 구석이 없는 것이 평일조차 시내와 이곳 왕복 버스가 10편도 안 된다. 하나를 놓치면 두어 시간 기다려야 하는 게 예사.
택시를 이용할 수는 있다. 9500원에서 9700원이 나오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시간 기다려 동부터미널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거기서 다시 1.5시간 정도를 쉼 없이 가야 한다. 하여, 편도에 보통 4시간이 걸린다. 기다리는 시간 빼고.
내일 아침 첫 차편으로 파주로 간다. 절룩거리는 다리를 최대한 감추고... 뒤늦게지만, 나 역시 오늘 밤은 거의 뜬 눈으로 지낼 듯하다. 누워도 잠이 오지 않을 듯하다. 그럴 것만 같아서 잠자리에서는 잘 마시지 않는 커피를 망설이지 않고 먹었다. 벌써 석 잔째다.
나는 내 기구한 임종 부재의 연장선을 생각한다. 임종 현장에 함께 하지 못했을 때마다 내 안에 고여 왔던 다짐들을 떠올린다. 장모님은 내게 두 가지를 당부했다. 기도 자주 하고, 주일 성수하라고... 내가 엉터리 신자임을 익히 아시는 까닭이다. 동시에, 장모가 말하면 거역하지 않을 사위라는 것 또한 확신하시는 분.
이제는 임종 부재의 변명 대신에, 내가 장모님께 약속드린 것을 지켜야 한다. 기도는 자주 안 하지만, 그래도 매일 저녁 식탁 기도는 다른 집과 달리 3분 정도로 길게 합니다유.... 하면서 변명하던 것도 죄송스럽다. 그런 자리에서는 그저 “네~~~”하는 명쾌한 답변부터 드렸어야 했다.
주일 성수. 이젠 어쩔 수 없이 그리 될 것 같다. 결혼 전 11년 동안 대예배 반주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던 아내가 내 꼬드김으로 외박하는 바람에 하루를 빼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걸 뒤늦게 갚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홀로 계실 장인어른 때문이다.
그저께 주일 저녁. 병실은 우리가 지킬 테니 집에 가셔서 주무시라는 말에 “빈 집은 무서워!”라는 짧은 말 한 마디로 답하시던 장인. 그는 친구다운 친구도 없다. 그저 아내와 가족을 위해 살았고, 일찍 장로로 뽑혀 23년을 봉직하고 7년 전 원로 장로로 추대된 분인지라, 친구라고는 교인들뿐인데 이젠 대부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그분 곁을 떠났다.
혼자 있는 집! 처음에는 그걸 제대로 견뎌내시질 못할 분인지라 앞으로 당분간은 아내와 진이가 가서 밤마다 잠자리 동무를 해드려야 하지 싶다. 아내와도 그런 이야기를 이미 나눴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두 분 가까이로, 파주로 이사를 온 것은 참 잘한 짓이다.
장인 장모님은 평생 한 끈에 묶여 살았다. 어딜 가든, 함께였다. 교회로 가는 차안 조수석에는 만날 장모님이 앉아 계셨다. 그런 장인이 빈 조수석을 견뎌내시지 못할 듯하다.
그러니, 그 자리를 채워드리기 위해서라도, 나는 그 차를 타야 한다. 주일이면 하루도 빠짐없이 교회로 향하는 그 차를. 그러면 장모님이 당부하시던 주일 성수는 자동빵(?)으로 이행될 수 있으리라.
또 한 가지. 기도 자주 하기 역시 약속을 지킬 수 있을 듯하다. 불안감이 얹힌 예감이 자꾸만 증폭되어 낼 아침 첫차로 파주로 돌아가기로 아내와 입을 맞춘 터라서, 오늘 저녁만은 제발 울리지 말라고 전화기를 향해서 기도하고 싶었던 순간에 내 전화기가 울었고, 그때는 내 기도가 절반도 나가지 못했을 때였다.
전화기 너머로 아내의 울음 섞인 목소리, “... 엄마... 가셨어요.” 소리가 지나가고 한참 뒤,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차... 아까 장모님을 오는 화요일에 (그 전에는 말고), 하늘나라로 불러달라는 기도를 왜 좀 더 일찍 시작하지 않았을꼬. 혹시 내가 밥 먹고 한참 지나서 늦게 시작한데다, 기도를 완결조차 못하고 있어서, 그래서 그 어름에 천사가 바삐 업무 처리를 해버린 게 아닐까... 아이고, 장모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간절한 기도일수록 얼른 빨리, 만사 젖혀두고 얼른 했어야 하는데, 천사가 문간에 이미 도착했을 때서야 제가 기도를 시작했나 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장모님...
지금도, 나와 장모님 간에, 서로 웃음소리를 고치라고 해대던 그 ‘히히히’ 하는 웃음이 들리는 듯만 하다. 내가 ‘죄송합니다, 장모님’ 소리를 해대면, 그때마다 ‘이 사람아. 그러니깐 장모가 하는 말은 하나두 허투루 들으믄 안 되는 겨. 히히히’ 하시던 장모님의 웃음소리가.
-죄송합니다, 장모님. 제 기도발 하나도 제때 제대로 못 살렸습니다. 기도는 할 수 있을 때 자주하라는 그 말씀을 또 제대로 지키지 못했네요. 앞으론 위에서 덜 바쁘실 테니까, 션찮은 짓 할 때마다 오셔서 때끼 이 사람아 하면서 제 엉덩이 좀 때려주세요, 장모님!
[Nov.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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