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 모임 불참의 변(辯) : 죽음 혹은 삶에 대한 예의
정모 참석을 독려하고, 심지어 모임 공지에 참석 여부 하나를 적는 일이 뭐 그리 힘든 일이냐고까지 하면서 설치던 녀석이 나였다. 그런 녀석이 막상 모임터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뻔뻔한 일구이언도 없다. 전형적인 위선자의 모습이다. 라고 하실 분들 계시지 싶다. 맞다. 내가 한 짓만으로도 그런 소리 들어도 싸다.
하지만, 약간의 변명은 있다. 정모 전에 내게 일어난 사정(私情)일 뿐이긴 하지만, 모임이 끝나고 나면 나눌 분들에게 하려던 변명이다. 나 역시 얼굴만 대해도 좋을 그런 분들에다, 말 한 마디라도 섞으면 더욱 반가웠을 그런 분들이 늘비했으므로.
*
장모의 죽음으로 1주일 정도를 문원(文院)에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간 날. 그날은 마침 김장을 하고 있었다. 식당 아주머니와 안집의 도우미 아줌마 등 모두가 배추를 절이는 일에 동원되고 있어서, 점심은 근처의 식당으로 가서 먹었다.
그 자리에서야 내가 장모상으로 자리를 비웠음을 알게 된 이문열 선배가 한 마디 했다.
- 처가의 애경사는 잘해야 본전이고, 자칫 잘못하면 평생 말을 듣는 일이지, 허허허.
그 딴에는 내 나름 수고했노라는 공치사를 그리 한 모양이지만, 그건 내 안에서 작지 않은 소용돌이로 돌아왔다.
처가의 애경사는 잘해야 본전이라... 그러니까, 이번의 내 경우도 그런 형식적인 집안행사의 하나일 수도 있거나, 그랬을 것이다, 로 그냥 쉽게 넘겨짚거나 때워도 되는 일 정도라는 얘기일 수도 있었다.
아니다. 결단코 아니다. 나는 장모의 죽음을 ‘처갓집 애경사’의 하나로 여기지도 않거니와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 분은 내게 처가 여부를 떠나서, 죽음맞이를 통해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 삶의 전체를 다시 돌아보게 했고, 그 과정에서 더욱 머리를 조아리게 했다.
그런 분을 세상에서 떠도는 말마디에 불과한 ‘처갓집 애경사’의 하나로 가볍게 쓸어담아서, 쓰레기봉투 꼭지 비틀어 매듯해서 내던질 수는 없다. 내가 이번 송년 모임 자리에 나가지 않기로 한 것은 그런 그 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갖추기 때문이었다. 그 분을 11일 선산 장지에 모셨는데 25일이면 삼칠일도 지나지 않았을 때다. 겨우 2주가 되는 날.
굳이 예전 예법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인에 대한 최소한의 근신 기간으로 세이레가 회자되어온 데는 그 만한 이유가 있는 듯하다.
한 마디로, 오늘 아침 아내가 소리 죽여 눈물을 흘렸다. ‘엄마가 보고 싶어’ 소리 한 마디를 뱉으며. 그 동안 4년 8개월의 시간 동안에, 격주로 주말마다 당진에서 파주로 왕복 4시간씩 3년 간을 운전하면서도 힘든 줄 몰랐었다며, 딱 두 번 눈물을 쏟았던 그녀다.
한 번은 2007년 봄이다. 장모님이 날벼락만 같은 폐암 말기암 확진 판정을 받고 나서 얼마 뒤, 우리가 파주와 당진에 각각 떨어져 머물 때, 장모님 집에 가서 하룻밤을 머물며 둘이서 울었다. 고 나중에 말했다. 우리들 앞에서는 눈물 한 방울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장모님도 딸을 부둥켜안고 한없이 눈물을 흘리시더라는 얘기를 한참 뒤에야 했다.
그리고 나서 얼마 뒤, 아내는 혼자서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었다. 안방 문을 닫고서 한 시간 넘게. 그리곤, 그 뒤로 눈가에 물기 자국을 전혀 보이지 않던 아내였다. 장모님과 똑같이...... 그러던 아내가, 오늘 아침 눈물을 보였다. 장례식장에서 혼자서 있을 때만 조용히 눈물을 닦아내고 하던 아내였는데...
*
장모의 묘비명을 생각해 봤다. 가족들이 무어라고 적을 건지 모두 생각해보고 나서 정하자는 큰처남의 이야기에, 내가 제일 자신 있게 해낼 수 있는 일이자, 장모님에게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건 그런 것들일 뿐이므로.
- 그 모든 사랑, 이곳에 와 다 이루다.
- 그 모든 갈망, 이곳에 와 다 이루다.
- 모든 희망, 이곳에 와 다 이루다.
실제로 그 분에게 드리고 싶은 건 두 번째 것이지만, 그녀를 잘 모르는 분들은 넘겨짚기로 ‘한(恨) 많은 분이었구나...’ 소리부터 앞세울까봐, 그런 갈망과 희망까지도 모두 담아낼 수 있는 건 사랑인지라, 첫 번째 문구를 묘비명으로 바치고 싶다.
아내와 나는 공통점이 많지만, 그 중의 한 가지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자라오면서 아버지에게 단 한 대의 매질도 당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뺨이든, 등이든, 종아리든...
대신 나는 우리 엄니한테 등짝을 여러 번 얻어맞았다. 일하기 싫어서 마루 밑에 숨어서 책 보다가 들킨 때도 등짝을 맞았고, 학교에서 늦게 오려고 거짓말 하다가 들켰을 때도 그랬다. 그리고, 욕도 제법 많이 얻어먹었다. 말없는 남편에 대한 화풀이를 자식들에게 돌려서 해댄 것이라는 알 턱이 없었던 그 시절에는 속으로 “우리 엄니 욕 대회에 나가면 최우수상은 못 받아도 입선은 하실 겨...” 했다.
그런 나에 비해서, 아내는 하늘나라에서 살았다. 장모님 욕이란 게, 엉덩이를 두들기면서, “돈 잘 벌 놈!”, “집안 기둥 될 놈!” “효녀 딸 될 놈!” “장군감 손녀!”... 식이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그 말대로 자식이나 손자 손녀들 모두 그렇게 컸다. 말처럼 그리 되었다. 모두, 하나 같이.
장모님 이야기로만 해도, 책 한 권이 모자란다. 얼마 전 잡문 말미에도 소개했듯이, 재기와 유머 감각은 천재적이다.
한 해에 잘해야 한두 번 정도 감기 치레를 하는 아내인지라 한번 아프면 정말 며칠이고 제대로(?) 앓는데, 그때 온 위문전화에다 대고 내가 장난을 걸었다.
- 장모님. 집사람 성능이 션찮아서 그런지 올해는 이틀 만에 못 일어나네요. 어떻게 애프터서비스 좀 안 될까요?
장모님의 답변.
- 이 사람아. 애프터서비스 기간이 끝난 지가 언제인데? 버얼써 끝났으니까, 그냥 저냥 고쳐 써 이 사람아.
*
장모님은 말기암 확정 판정을 받으시고도 가족들 앞에서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 덕분에 우리는 어떤 모임에서고 항상 즐겁게 뛰놀았다.
위에 간단히 적었듯, 딸을 부둥켜안고 한 번 우셨고, 장인장모님 두 분이 함께 우신 적이 딱 두 번이다. 두 분의 두 번째 울음은 올해 국립암센터에서 이제는 통원치료 할 게 없다며, 호스피스를 소개해주겠노라는 말씀을 들으셨던 날이라고, 나중에야 내가 알았다.
<2년전 9월 어느 날. 봉일천중학교 운동장에 나가 운동하실 때
내가 장모님을 업고서...>
<두 해전 추석날 가족 노래 때, 기뻐 노래하시던 모습>
<두 해전 추석 연휴 때, 삼릉에 갔을 때, 입구에서부터 첫 묘역까지 다시 업어드렸다.
걸음이 불편해서가 아니라, 빠진 몸무게를 확인(?)한답시고... 자식과 손주들을 통틀어
그녀를 업고서 줄어든 체중을 확인한 건, 짓궂은 사위 외엔 없다. >
장모님은 돌아가시기 직전 달까지도 꼼꼼히 가계부를 적으셨다. 두 분 식사 준비도 거의 마지막까지 당신 손으로 하셨다. 마지막 한 달은 자주 딸 도움을 받으며...
그리고 가시는 날도, 그날 점심까지 드셨다. 준비해간 암죽을 끝까지 잡수시려고 애썼다. 자신이 떠날 화요일 약속을 지켜야만 한다며. 그 분이 제 정신을 놓고 지내신 시간은 딱 5시간이다. 임종일 오후 4시경부터 9시 8분까지.
그렇다고 해서 말기암 환자들에게 반드시 찾아오는 그 격심한 통증으로부터도 자유로우셨던 건 아니다. 돌아가신 뒤 보니, 아편계통의 진통제로서는 가장 강력한 헤로인이 큰 병으로 가득이었다. 그 통증들까지도 내색 안 하시고 혼자서 견뎌내신 것...
그런 분의 마지막 마무리도 참으로 멋지셨다. 세상에, 입관 무렵의 얼굴이 그처럼 맑은 것도 처음이지만, 거기에다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은 어쩌면 기네스북 기록감일지도 모르겠다.
장례사까지도 돌아가신 분이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은 난생 처음 본다고, 그 말을 염습 내내 입에 달았다.
나는 그 분의 그런 죽음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운다. 교과서 몇 권 분량의 가르침보다도 더 많다. 삶의 시작보다도 마무리 과정에서 지녀야 할 태도나 마음가짐이 무엇인가를,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나는 그 분에게서 배웠다. 천복이다.
내가 송년 모임 참석을 미루면서까지 그 분의 가르침에 숙연해 하면서 근신하고자 하는 까닭. 그것은 그런 나의 천복을 제대로 새기고자 함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유가 있다. 모임 자리는 내가 어떻게 한다 해도 그런 근신과는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나의 그런 사정(私情)이 그 자리에 함께 한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그늘을 지게 하는 것은 그 또한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
우리는 죽는다. 인간이 언젠가는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는 걸 제대로 알게 되는 건 죽음의 가치를 제대로 떠올렸을 때다. 죽음은 씁쓸해서 많이 아쉽고, 예외 없이 엄중하다.
때문에, 죽음은 생의 유한함에 열정을 더해준다. 확정된 죽음처럼 나날의 일상에 윤활유로 작용하는 것도 없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끌어안고 지내는 이들에게도 같다. 어쩌면 더 열심히, 하루를 더 아쉽게 살아내려는 힘은 죽음에 쫓겨서 얻어지는 열정의 열매에서 나오는 삶의 호르몬인지도 모른다.
장모의 죽음. 나는 거기서 참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위에 적은 것도 그런 생각들 중의 일부분이다.
장모님은 안으로 가득 찬 열정을 제대로 다 풀어내지 못하고 가셨다. 그것을 유머와 재치, 그리고 예수 사랑으로 수렴해내신 멋진 분이시기도 하고. 나는 그걸 오래 오래 제대로 기억하고 싶다.
그 분 가신 지 이제 겨우 2주. 고리타분하다고 할지도 모르는 삼칠일을 고집하면서까지, 내 자신 최대한 근신의 자세로 살아내고 싶은 것은 그 분의 그런 삶을 조금이라도 닮고 싶어서다.
그 분에게 돌아갔을 천국행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내가 그 분 생각을 죽을 때까지 가슴에 담고 살아낼 수 있었으면 하고, 감히 염원한다.
내가 모임 자리에 나갔다 쳐도, 얼굴을 대한 분들에게 어쩌면 미소 짓기와 가벼운 시시덕거리기로 함께 하기의 시간을 채우고 자리를 떴지 싶다. 그건 불성실한 땜질 참석이다.
그것을 피하고자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 결례와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바란다. 앞에서 설치고 뒤로 한 발 뺀 이중인격자라고 손가락질 당해도 할 말은 없다. 그저 내 개인사로 인한 것이었을 뿐이므로.
끝으로, 그런 고단한 모임을 뒤로 하고 다시 패자부활전 진출 경연을 위해 오늘도 마음과 몸으로 애쓰실 분들에게, 성원의 박수를 보낸다.
[27 Nov. 2011]
사진으로 쓰는 후기(3) : 허경희 왕누님/왕언니 희망 모임(2012.1.4) (0) | 2012.01.11 |
---|---|
카섹스 현장 사진 보셨어요? (0) | 2011.12.14 |
떠나신 장모님께 : 불효막심, 혹은 임종 부재(不在) 알리바이 (0) | 2011.11.09 |
고무신 신고 야구 하다 (0) | 2011.11.02 |
댓글, 그리고 맞장구/대꾸 (0) | 2011.1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