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 남용과 외래어 오용 관련, 세 번째 이야기.
일상 언어생활에서 꼬부랑말을 애용하는 사람치고
우리말을 제대로 하는 이들, 드물다.
은근히 유식을 자랑하려 들지만, 실제로는 무식을 광고하는 일.
외국어든 우리말이든 제대로 알려는(공부하려는) 노력부터 먼저 해야 한다.
자신이 사용하는 말들을 돌아보지 않는 '대충 대충파(派)'들의 삶의 안쪽을 들여다 보면
삶의 내용 역시 '대충 대충'이다.
언어는 그 사람이다. [溫草]
(2) ‘탱커’, ‘탱크로리’, 그리고 ‘탱크로리 트럭’
대형 탱크로리 트럭 등을 주·야간 가리지 않고 버젓이 정문으로 출입시켜 운행하는 방법으로 유사 휘발유를 중간 판매상들 상대로 울산 등 전국으로 판매해 왔다.
유사 휘발유를 불법 유통시킨 내용을 다룬, 2011년 10월 25일자 모 일간 디지털 신문 기사 중 일부입니다. 기사에서 보이는 ‘탱크로리 트럭’이라는 말은 ‘탱크로리’의 잘못입니다. 무지로 인한 또 하나의 과잉 친절 사례라 할 수 있는데, ‘탱크로리 트럭(tank lorry truck)’ 역시 콩글리시입니다.
‘탱크로리’는 tank lorry의 외래어 표기*인데, lorry는 ‘트럭’을 뜻하는 영국 영어입니다. 즉, 미국에서는 ‘트럭(truck)’이라고 하는 대형 화물차를 영국에서는 ‘로리(lorry)’라 하는 것이지요. 그중 ‘탱크로리’는 대형 화물차에 탱크 모양의 저장고를 장치한 것이라는 뜻의 영국 영어입니다. 여기서 ‘탱크’는 유조차나 사료/우유/시멘트 운반차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주 큰 통을 말하는데요. 요즘은 ‘탱크로리’나 ‘탱크 트럭’을 ‘탱커(tanker. 석유・가스・휘발유를 싣고 다니는 대형 선박을 뜻하기도 합니다)’로 줄여 부르기도 합니다.
[참고] ‘탱크로리’와 ‘탱크 로리’ : ‘탱크로리’는 외국어 tank lorry의 한글 표기인 ‘탱크 로리’가 외래어 지위를 획득하면서 복합어로 처리되었기 때문에 붙여 적은 표기이다. 즉, 복합어는 한 낱말이므로 붙여서 적어야 하는 원칙에 따라서 ‘탱크로리’로 붙여 적고, 한 낱말로 다룬다. 외래어 지위를 획득한 ‘탱크로리’는 ‘탱크 로리’와 달리 표준어이며, 우리말에 속한다.
그러니, ‘탱크로리 트럭’이라고 표기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탱크 트럭 트럭’이라는 우스꽝스런 말이 되는 거지요. 그럼에도 예전에는 이러한 의미 구분 노력이 생략된 채 몇 십 년을 두고 애용되다가 뒤늦게 조어법상의 잘못이 여러 번 지적된 덕분에 이제는 거의 사라진 말이 되었는데, 아직도 일부에서는 위의 기사에서처럼 그걸 통용시키고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로리’가 트럭을 뜻하는 말이라는 것을 모르거나 혹은 알아보려 하지 않고 사용하는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기자들이 그런 말을 사용하는 순간 그것은 무지나 지적(知的) 게으름을 드러내는 꼴밖에 되지 않지요. 거창한(?) 외국어까지 동원해서 무식을 광고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언어 의식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타인과의 대화에서 외국어 부스러기를 사용하는 것이 은근히 유식함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거나, 무식함을 가리는 유효한 수단이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고 합니다. 특히 잠재적 열등콤플렉스로 인한 우월 과시 욕구가 강한 이들에게서 흔히 관찰되는 현상이라고 하는군요.
[참고] 잘못된 외국어 선호 의식 : 외국어 선호에 대한 언어 현상적 연구 또는 자녀 교육관의 차이에 따른 예비 부모와 유아기 자녀를 둔 부모의 조기 교육 인식 등과 같은 연구 조사 결과를 보면, 학력이나 외국어에 대한 열등콤플렉스가 심하면 심할수록 외국어 토막말 사용을 더 선호하거나 의식하는 경향이 있으며, 학력이 높고 외국어에 자신이 없는 부모일수록 자식들의 조기 교육과 외국어 교육의 중요성을 신앙(?)하는 학부모들이 많은 것으로 나온다.
그에 비하여 외국어를 제대로 하려면 올바른 우리말 공부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대표적인 이가 소설 <하얀 전쟁>으로 널리 알려진 안정효(1941~ )인데, 그는 1989년 재미 작가가 아닌 한국 거주 작가로서는 최초로 자작 영문 소설 <하얀 배지(White Badge)>를 미국에서 출판하여 뉴욕 타임스 등의 호평을 받았다. 그런 그가 그 뒤로는 올바른 우리말 글쓰기를 위하여 <영어 길들이기>,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등의 역저(力著)를 출간하고 있다. 필자 역시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우리말을 제대로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외국어도 제대로 잘하지 못한다는 진리를 절감해 왔다.
자동차와 관련된 영국 영어 중 우리가 흔히 실수하는 것 중에는 ‘본네트(x)/보닛(o)’도 있습니다. 어쩌면 한국인의 95% 이상이 잘못 발음하는 대표적 영국 영어가 아닐까 싶네요. 표기는 ‘bonnet’(자동차의 엔진이 있는 앞부분의 덮개)이지만 올바른 발음은 ‘보닛’이랍니다. 미국에서는 이것을 ‘hood’(후드)라고 하는데, 차를 고치러 가서 ‘보닛’이라고 하면 못 알아듣는 미국인들이 대다수일 정도로 확연히 다른 말 중의 하나랍니다. 미국에서는 이 bonnet을 ‘바:넛’으로 발음하고 주로 ‘아기들이나 예전에 여자들이 쓰던 모자로, 끈을 턱 밑에서 묶게 되어 있는 것’을 뜻하는 말로 씁니다.
끝으로, 이 ‘탱크로리 트럭’의 표기와 관련하여 조금 재미있는 얘기 두 가지만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탱크로리와 특수 탱커의 지입 차주(持入車主. 운수 회사의 명의로 등록된 개인 소유 차량들의 주인) 모임이 있고 그 웹사이트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의 한글 표기 이름이 ‘탱크로리트럭 트럭연합(k-truck. co. kr)’입니다. 평가는 여러분들에게 맡깁니다.
또 하나. 제임스 본드 역으로 유명해진 영국 배우 숀 코네리(1930~ )도 이 ‘로리’와 친한(?) 편입니다. 그는 가난한 노동자 계급 출신으로 고교도 마치지 못한 채 벌이를 위해 16세에 해군에 입대했는데, 3년 뒤 그마저도 위궤양으로 그만두고 나와서 이 일 저 일 가리지 않고 했지요(벽돌공, 수영장 안전 요원, 관(棺) 광내기 등등).
그리고 나중에 성인이 된 뒤에는 화물차 운전도 했습니다. 그 직업의 영국식 영어 표기가 lorry driver인데, 우리 식으로 번역하면 ‘트럭 운전기사’입니다. 그의 운명을 바꾼 첫 007 영화 ‘닥터 노(Dr. No)’에 출연한 게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만 32세 때(1962년)의 일이니, 20대 청년 시절 빼곡하게 채웠던 그의 직업란 중 하나에 선명히 남아 있는 건 ‘트럭 운전사(lorry driver)’라는 표기입니다. 우리가 들춰본 ‘로리’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덤] ♣ 어떤 옷도 ‘메이커’ 없는 옷은 없다
수사관 :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것도 아니고, 호피 무늬일 뿐인 반코트 하나 값이 1,380만 원이면 너무 비싼 것 아닙니까?
앙드레 김(김봉남) : 메이커 있는 옷인데다, 옷값은 비싸야만 여자들이 더 좋아하거든요. 고급 옷으로 자랑할 수 있으니까요.
수사관 : 어째서 옷값 대납을 요구하는 배정숙 씨의 요구를 거절했습니까? 요구 받은 금액이 2,200만 원이라고 국회 청문회에서 말씀하셨죠?
이형자(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의 아내) : 메이커 있는 옷이라고는 해도 옷값이 너무 비싼데다가, 남편의 구속 문제가 확실하게 해결된다는 보장도 없고 해서요.
수사관 : ‘메이커 있는 옷’이라... 옷을 만드는 메이커 없이도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나오는 옷도 있나요?
위에 대화식으로 인용된 내용은 1999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특별검사제를 도입하게 되었던 이른바 ‘옷 로비’ 사건에서 다뤄진 것들입니다. 온 국민들은 IMF 사태로 인하여 고통 속에서 지내고 있을 때, 천만 원도 넘는 옷에 매달려 지내는 고위층 부인들의 행태에 국민들은 분통을 터뜨렸지만, ‘막상 국회 청문회에서 거둔 수확이란 게 앙드레 김의 본명이 김봉남이라는 것뿐이었다’는 자조가 유행될 정도로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청문회이기도 했지요.
위의 대화로 가보죠. 거기에는 ‘메이커’란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일반인들도 아주 흔히 쓰는데요. 대체로 알려진 제조업체가 만든, 유명 상표가 있는 그런 옷이라는 말을 할 때, ‘메이커 있는 옷’이란 말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 ‘메이커(maker)’라는 중학생 수준의 영어 단어는 누구나 알다시피 ‘무엇을 만드는 사람(제작자)/회사(제조업체)/기계(제조기)’를 뜻하지요. 그래서 film-maker는 영화 제작자, coffee maker는 커피 끓이는 기구가 되는 거고요. 그러니 어떤 옷이고 간에 그걸 만드는 사람, 곧 maker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수사관의 지적은 정말 정곡을 찌른 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옷은 누군가가 만들어야 합니다. 그걸 만드는 사람/업체를 뜻하는 말이 메이커입니다. 그러므로 메이커 없이는 어떤 옷도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메이커 없는 옷’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유명 브랜드 제품이라는 말을 꼭 쓰고 싶으면 메이커라는 말 대신에 그런 뜻을 담은 말로 짚어서 표현하는 게 좋습니다. 특히, 이런 식의 콩글리시가 입에 붙으면 막상 영어로 그런 말을 해야 할 때도 똑같은 실수를 하게 마련이니까요. 쉬운 말로 그냥 ‘이거 이름 있는 옷이야’ 정도면 어떻습니까.
명품 브랜드 제품을 영어로는 ‘branded goods'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영어로 ‘이거 이래 봬도 싸구려는 아냐. 명품 브랜드 제품이야.’라고 말해야 한다면 그때는 ‘This is not cheapie, no matter what this looks like. This is branded goods.’ 정도로 표현하면 됩니다. (‘cheapie/cheapy’는 싸구려를 뜻하는 구어). 이럴 때 maker라는 말을 써서는 전혀 뜻이 통하지 않습니다.
현재 이 ‘메이커’는 ‘메이커품(유명한 제작자나 제조업체의 제품)’의 동의어로 외래어로 인용되어 있습니다. 하도 많은 이들이 사용하고 있는데다(‘쓰임의 조건’) 원래의 뜻을 잃어버리고 엉뚱한 뜻으로 쓰이고 있어서(‘동화의 조건), 외래어가 되기 위한 두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보아서죠. 즉, 영어의 뜻을 잃어버리고 우리말이 된 말이기 때문에, 영어로 이 말을 쓸 때는 우리가 뜻하는 의미를 지니지 않게 되는 것이랍니다.
참고로, ‘브랜드 메이커(brand maker)’라는 말도 있는데요. 유명 제품을 만드는 이로 넘겨짚기 쉬운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기업명이나 상표·도메인명·인명 등 전문적으로 이름을 짓는 사람’, 곧 ‘네이미스트(namist)’를 이르는 말입니다. 우리말로는 ‘이름설계사’쯤 되려나요.
* 이 글은 오는 7월 발간 예정인 졸저 <한국어 실력이 능력이다 - 업무 능력(NCS) 시대에서의 우리말의 힘>에 수록될 내용의 일부다. 출판사와의 협약에 따라, 이 글의 부분 또는 전부의 복사/전재 및 일체의 상업적 활용을 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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