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 남용과 외래어 오용(4) : 미국에는 '맥아더'가 없다
○ 외국어도 외래어도 아닌 엉터리 말 : ‘관계쉽/바란스/웰빙/타켓/말티즈/런닝 맨’
미국 시민권자인 동포 지인 하나가 목소리를 낮춰서 내게 물어왔습니다. 합석 중이던 사업가가 화장실행으로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입니다.
“저 분이 아까부터 자꾸만 중요하다고 얘기하는 ‘관계쉽’이라는 말이 대체 무슨 뜻입니까? 제 짐작엔 중국에서 흔히 말하는 그 ‘꽌시(关系)’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한데, 정확한 의미를 모르겠어서요.”
내게서 웃음이 터져 나갔습니다. 한국을 오래 떠나 있던 그로서는 요해(了解. 깨달아 알아냄) 불능의 말일 수도 있으니까요.
‘관계쉽’이란 말은 ‘관계’라는 한자어에 영어의 ‘-ship’을 결합한 다국적 혼혈아입니다. ‘relationship’이라는 영어 낱말을 알고 있지 못하거나 제대로 구사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귀동냥으로 체득한 말 중의 하나인데, 알게 모르게 제법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인간관계’나 ‘연줄’ 또는 ‘인맥 관리’ 등을 뜻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모두를 아우르는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연줄(인연이 닿는 길)’의 의미로 더 많이 쓰이는 중국어 ‘꽌시(关系)’와 아주 가깝습니다. 그래서 다국적 혼혈아라 한 것이죠.
‘인간관계’나 ‘인맥/연줄’이란 말을 써도 될 자리에서 이런 괴상한 부스러기 외국어를 굳이 쓰려드는 이들의 배경에는 학력과 외국어의 열등콤플렉스(inferiority complex.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하는 데 방해가 될 정도로 마음속에 맺혀 있는 열등감)가 똬리를 틀고 있을 때가 흔합니다. 하기야, ‘인간관계’나 ‘인맥/연줄’과 같은 말을 떠올린 뒤 골라 쓸 정도의 언어적 소양을 갖춘 사람은 이미 그러한 열등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있을 때가 많지만요.
더구나 열등콤플렉스는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보상하고자 하는 심리 작용이 힘이나 우월의 욕구로 뻗치기 마련이므로 언어를 통해서라도 우월감을 과시하려 들게 마련이지요. 하지만, 그것이 도리어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음을 당사자는 모르고 있을 때가 흔합니다. 특히 영어 부스러기를 덧붙인 괴상한 말들을 즐겨 쓰는 이들일수록 더욱 그런 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외국어 부스러기를 사용하여 조금이라도 우월감을 표시하고자 하는 이들이 내놓고 쓰는 말 중에는 ‘바란스’도 있습니다. 이 또한 국적 불명의 사생아 낱말이죠.
‘바란스’는 영어 ‘balance’의 자연스러운 우리말 표기일 듯도 싶지만, 아닙니다. ‘밸런스*’로 적고 읽어야만 우리말(외래어)이 됩니다. 그럴 때만 ‘균형’을 뜻하는 외래어가 됩니다. 이유는 두 가지랍니다. 영어 balance는 어떻게 읽어도 ‘바란스’*가 되지 않으며(영어에서도 ‘밸런스’로 읽는다), 이걸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적으면 ‘밸런스’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란스’는 ‘스리퍼(x)/슬리퍼(o)[slipper]’에서와 같이 영어의 ‘l’과 같은 설측음 발음이 약점인 일본인들의 발음 버릇을 얼결에 따라하게 된 사람들이 잘못 퍼뜨린 말이기도 하지만요. 스스로의 검증을 생략한 채 무조건 따라 하고 보는 습관의 합작품이기도 합니다. 차라리, ‘균형’이나 ‘형평’ 등의 우리말로 쓰면 좋으련만, 위에서 언급한 열등콤플렉스에서 비롯된 우월 과시 버릇에 젖어 도리어 자신의 값을 떨어뜨리곤 하는 거지요.
[참고] 우리말의 ‘ㄹ’ : ‘ㄹ’은 초성으로 쓰일 때와 종성으로 쓰일 때 그 음이 다르다. 언어학적으로 구분하면 ‘바란스’의 ‘란’에 쓰인 초성 ‘ㄹ’은 탄설음(彈舌音. 두들김소리. 혀끝과 잇몸 사이가 한 번 닫혔다가 열리는 동안 혀 옆으로는 공기가 새어 나가면서 나는 소리. 치조 탄음[ɾ])이라 하고, ‘밸런스’의 ‘밸’에 쓰인 종성 ‘ㄹ’은 설측음(舌側音. 혀옆소리. 혀끝을 윗잇몸에 아주 붙이고, 혀 양쪽의 트인 데로 날숨을 흘려 내는 소리. ‘쌀/길’ 따위에서의 ‘ㄹ’음. 치경 설측 접근음[l])이라 하여 구분한다. 여기서 더 엄밀히 구분하자면 현대 한국어에서는 모음 ‘ㅣ/ㅑ/ㅒ/ㅕ/ㅖ/ㅛ/ㅠ’ 앞에서의 경구개 설측 접근음[ʎ]으로 구개음화하는 경우까지 있어서, 세 가지가 된다.
[참고] 또 다른 ‘밸런스’ : ‘커튼의 봉/고리 따위가 보이지 않도록 가려 주는 장식/장막’도 balance라고 하는데, 이 또한 ‘밸런스’로 표기할 수 있는 외래어다. ‘밸런스커튼’(balance curtain)이라고도 하는데, ‘밸런스커튼’도 외래어. 주의할 것은, 앞서 언급한 ‘탱크로리’처럼 한 낱말의 복합어로 처리된 말이므로 띄어 적지 말고 붙여 적어야 한다.
설측음 ‘l’ 대신 탄설음 ‘r’ 발음으로 잘못 표기된 ‘바란스’와는 정반대로, 본래 설측음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없는 걸 굳이 끼워 넣어서 도리어 잘못된 경우도 있는데요. 바로 ‘백밀러/사이드밀러’ 등에 쓰이는 ‘밀러(x)/미러[mirror](o)’가 그것입니다. ‘백밀러/사이드밀러’는 잘못이며, ‘백미러/사이드미러’가 옳은 발음이자 올바른 표기입니다. ☜[참고] 이와는 조금 다르지만, 영어에 없는 발음을 넣어 괴상하게 된 것으로는 ‘쇼파/소파(sofa)’ 또한 만만치 않은 오기 사례에 든다. 조금 어려운 경우로는 흔히 ‘세무 잠바’ 등으로 쓰는 ‘세무’도 있는데, ‘섀미(chamois. 무두질한 염소/양의 부드러운 가죽)’의 잘못이다.
‘바란스’처럼 외국인 앞에서 기껏 영어로 말했는데도 알아듣지 못하는 콩글리시 중에는 ‘라벨(label. 종이/천에 상표/품명 따위를 인쇄하여 상품에 붙여 놓은 조각)’도 있습니다. 올바른 발음은 ‘레이블’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바란스’와는 다른 대우를 받고 있는데요. 하도 많은 이들이 오랫동안 사용해 온 말이어서 ‘라벨’은 현재 외래어로 채택되어 있습니다. 또한 올바른 발음에서 온 ‘레이블’도 외래어로서, 두 말은 동의어이며 복수 표준어랍니다.
이와 같은 국적 불명의 사생아 표기 중 근래 이 나라를 휩쓸고 있는 것의 대표 격으로는 ‘웰빙’이 있습니다. 모두 다 알다시피 그 영어 표기는 ‘well-being’으로 ‘행복(감)’을 뜻하는 말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웰빙’이라는 한글로 바뀌면서 그 뜻도 ‘심신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함’이라는 거창한 뜻으로 몇 단계나 껑충 뛰어올랐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웰빙’으로 적고 발음하면 그런 영어는 없게 된다는 점입니다. ‘웰빙’은 잘해야 ‘wellbing/welbing’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 다 알다시피 ‘well-being’은 ‘웰비잉’으로 발음되는 말이고, 외래어 표기법대로 적어도 ‘웰비잉’이지 ‘웰빙’은 될 수가 없습니다. ‘웰빙’으로 표기하는 한, 그 의미의 원천인 영어는 없는 말이 됩니다.
그 때문에 국립국어원에서도 이 ‘웰빙’만은 어떻게 해도 외래어로 대우할 수 없어서 아직까지도 사전에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웰빙’이 국적 불명의 사생아라고 적은 이유입니다. ‘웰비잉’이라는 올바른 표기로 돌아가면 외래어로 처리될 수 있겠지만, 이미 언중들의 입에 익은 ‘웰빙’과의 결별은 환골탈태(換骨奪胎. 사람이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변하여 전혀 딴사람처럼 됨)보다도 더 어려울 듯합니다. 언중들이란 내리막 활강은 시키지 않아도 잘하지만, 오르막 되올라가기는 여간해서 하려들지도 않거니와 그리하도록 이끌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웰빙’의 문제는 발음 탓이 큽니다. 대충 발음한 대로 대충 적으려 든 게 잘못의 출발입니다. 이처럼 한번 잘못된 발음이 유통되고, 생각 없이 그것을 따라 하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그걸 고치기가 엄청 힘들게 됩니다. 그런 말 중에 몇 가지 예를 들면 ‘타켓/플랑카드/미세스(Mrs.)/말티즈/런닝 맨/썸머 스쿨’ 따위도 있습니다.
‘타켓(타케트)’은 ‘target’에서 온 말인데 영․미어 어디서건 ‘타깃’으로 발음됩니다. 어떤 연유로 ‘타켓(타케트)’과 같은 국적 불명의 발음이 유통되게 되었는지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영어도 2음절어이고(tar-get), -g-이므로 ‘타깃’으로 적어야 하는데요. ‘타깃’은 현재 외래어로 인정된 우리말입니다. 그 관련어인 ‘타깃존’(target zone. 변동 환율제에서, 환시세의 목표로 정한 환율대), ‘타깃앵글’(target angle. 자신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다른 항공기 또는 선박에 대한 방위), ‘타깃타이밍’(target timing. 레이더 목표의 계속적인 각(各) 위치의 시간 측정) 등도 외래어이고요.
이와 같이 뜬금없는 발음 왜곡 때문에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말로 앞서 다룬 ‘플랑카드/플랭카드’도 있습니다. 본래 ‘플래카드(placard)’인데, 느닷없이 원어 표기에도 없는 받침 -ㅇ-까지 붙여서 발음하는 이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플래카드’로 적고 발음해야 합니다. 아예 자신이 없으면 ‘현수막’이라는 말을 쓰는 게 낫습니다. 국립국어원에서 정한 ‘플래카드’의 순화어가 ‘현수막*’입니다.
[참고] 가로로 걸린 것도 ‘현수막’이라 할 수 있는가? : 할 수 있다. 본래 현수막(懸垂幕)이란 세로로 길게 드리운 막을 뜻했다. 하지만, 요즘 ≪표준≫의 뜻풀이를 보면 ‘①극장 따위에 드리운 막. ②선전문·구호문 따위를 적어 걸어 놓은 막’ 등으로 되어 있다. 즉, 세로로 드리워진 것이라는 설명이 빠져 있다. 그렇게 하여 현수막의 형태와 관계없이, 가로로 걸린 것에도 이 말을 쓸 수 있도록 하였다. 즉, 가로로 걸린 플래카드를 ‘현수막’으로 순화하면서 완화된 뜻풀이이기도 하다. 현재 ‘플래카드’의 뜻풀이는 ‘(형태에 관계없이) 긴 천에 표어 따위를 적어 양쪽을 장대에 매어 높이 들거나 길 위에 달아 놓은 표지물’로 되어 있다.
‘플랭카드(placard)’(x)처럼 원어의 철자에 들어 있지도 않은 엉뚱한 발음으로 유통되었던 것으로는 ‘스티로폴’(x)도 있습니다. 원어는 styrofoam이므로 ‘스티로폼’으로 적어야 합니다. 원어의 어디에도 ‘폴’로 적어야 할 게 보이지 않는 말이었는데, 다행히도 지금은 올바른 표기로 꽤 많이 바로 잡혔습니다. Mrs.를 철자에도 없는 ‘미세스’로 발음하는 것 또한 잘못된 발음 버릇이 아주 널리 유포된 경우에 속합니다. ‘미시즈’라고 해야 하며, 영․미어 어디에서도 ‘미세스’로 발음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와는 조금 다른 얘기지만, 구분 표기가 아주 까다로워서 헷갈리거나 실수하는 말도 있습니다. 집시들의 춤이라고 하면 대뜸 떠오르는 그 춤을 뭐라고 할까요. 답부터 말하면 ‘플라밍고(플라멩고) 춤’(x)은 잘못된 말이고 ‘플라멩코(flamenco) 춤’(o)이 올바른 표기랍니다. ‘플라밍고(flamingo)’는 홍학과의 아름다운 새로 몸빛 일부와 부리, 그리고 다리가 붉은색이죠. 즉, 홍학은 ‘플라밍고’이고 춤 이름으로는 ‘플라멩코’라고 하여야만 올바릅니다. 까다롭죠?
개 이름으로 가볼까요. 반려동물의 으뜸인 애완견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기르고 있는 품종으로 섬나라 몰타(Malta)가 원산지인 Maltese가 있습니다. 세계지도를 보면 몰타 섬은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인 시칠리아 아래쪽에 점 하나 찍은 것처럼 작은 섬이지만(서울시 면적의 절반 정도. 시칠리아 섬의 1/80 정도의 크기) 버젓한 국가죠.
그처럼 작은 나라인데도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섬나라 ‘몰타’라는 이름과 발음에는 대체로 익숙합니다. 그런데, Maltese에만 이르면 하나같이 ‘말티즈’라고 해댑니다. 그런 개 품종은 없습니다. ‘몰티즈’라고 해야 합니다. 왜냐, 몰타 섬 출신이니까요. ‘몰티즈’는 현재 개의 품종을 뜻하는 외래어로 인정되어 있는 말이고, ‘말티즈’는 당연히 없는 말입니다.
모 방송국 프로그램 명칭 중에 ‘런닝 맨’이 있습니다. 이 또한 결과적으로는 콩글리시입니다. 최소한 ‘러닝 맨’이라고 적어야 ‘running man’을 뜻하게 되지만, 영어로 ‘running man’이라 표기해도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는 말입니다.
이 말을 작명하면서 어쩌면 단순히 ‘달리는 남자(사람)’라는 뜻으로 사용하고자 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뜻이라면 ‘runner’라고 하거나 어순을 바꿔야 합니다. 즉 ‘a man running all the way(줄곧 달리는 사람), a man running on the street(거리에서 달리는 사람)’ 등에서 보듯 running을 뒤에 붙이고 그다음 갈무리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running man’으로 표기할 경우 자칫하면 ‘달리기(용) 인간’ 정도로 오인될 수도 있기 때문이죠. 운동화를 ‘running shoes’(러닝슈즈), 부통령 후보나 동반 출마자를 ‘running mate’(러닝메이트)라고 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명사 앞에서 쓰이는 영어 ‘running’은 용도나 목적이 으뜸 의미거든요. 그래서 ‘running man’은 결과적으로 콩글리시가 된다고 한 것이고요. 이 ‘running man’과 관련된 일화(逸話.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아니한 흥미 있는 이야기) 한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혹시 ‘달리는 기관차(running locomotive)’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1952년 헬싱키에서 올림픽이 열렸을 때인데요. 우리나라도 참가하여 전쟁 중임에도 동참했다고 많은 나라의 박수를 받았지요. 그 올림픽의 영웅이 체코의 육군 중위인 에밀 자토펙이란 사람이었답니다. 육상 10,000m와 5,000m에서 금메달을 얻고 생전 처음 출전한 마라톤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거든요.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요.
그래서 그에게 붙여준 칭호가 ‘달리는 기관차’였습니다. ‘인간 기관차’라고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90년대에 세 번의 한국 신기록을 세우며 2시간 12분대에서 4분여를 단축한 마라토너 김완기를 일부 매스컴에서 ‘달리는 기관차’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참고] 사족 : 현재 우리나라의 마라톤 기록은 15년 전인 2000년에 이봉주가 세운 2시간 7분 20초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다.
그처럼 주자(走者)를 뜻하는 runner라는 말이 버젓이 있음에도, ‘달리는 사람’을 뜻한답시고 ‘런닝 맨’에서처럼 running을 앞에 붙이면 ‘달리기용 인간’과 같은 비유적인 뜻이 될 뿐 정작 ‘달리는 사람’이란 뜻과는 멀어집니다. 그래서 콩글리시라 한 것입니다. 좀 더 쉽고 흔한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헬스클럽’에 가면(이 또한 한국에서 유통시킨 조어인데, 구미에서는 ‘피트니스센터 fitness center’라 한다. 구미에서 ‘헬스클럽’이라고 하면 본격적인 운동을 하는 체육관을 뜻한다), 그곳의 필수 기본 장비로 ‘런닝 머신’이 있습니다. ‘런닝’이라고 힘주어 발음까지 하는 기계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영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나오질 않습니다. 섭섭하게도 이 또한 콩글리시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위에서 설명한 대로 ‘running machine’이란 그런 장비를 뜻하는 게 아니라 ‘기계처럼 달리는 것(사람)’을 뜻하는 비유적 의미일 뿐이지, 실제의 올바른 장비 명칭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이 기계의 진짜 이름을 찾아보면 ‘트레드밀(treadmill)’이라고 나옵니다. 다람쥐 쳇바퀴처럼 계속 돌아가는 기계, 디딜방아처럼 발로 밟아 돌리던 예전의 기구들을 뜻하는 말이지요.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그 기계를 보거든, ‘런닝 머신’이라 하지 말고 ‘트레드밀’이라 부르셔요. 아셨죠?
다시 ‘런닝 맨’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 ‘런닝 맨’은 외래어 표기법에서도 문제적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영․미어 발음에서도 running을 ‘러닝’이라고 해야만 올바르고, 외래어 표기법에서도 ‘러닝’으로 적어야만 올바른 표기가 됩니다. 외래어 표기에서는 -nn-/-mm-과 같은 경우에 겹자음 표기가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죠.
그런 점에서 ‘summer school’을 ‘썸머 스쿨’로 표기하거나 발음하는 것 또한 잘못이어요. ‘서머스쿨’로 적고 그렇게 읽어야 외래어로도 합격이고, 영어로도 뜻이 통하는 말이 됩니다(실제의 영어 발음*에서는 ‘s’가 된소리로 난다). 참고로, ‘서머스쿨’은 외래어로 인정된 우리말이지만, 지정된 순화어로 ‘여름학교’도 있답니다.
이처럼 -nn-/-mm-과 같은 경우에 겹자음 표기가 허용되지 않는 말 중 흔히 실수하는 것으로는 ‘컨닝(cunning), 캔낫(cannot)’ 따위도 있는데요. 외래어 표기 규정에 따를 경우에도 각각 ‘커닝/캐낫’으로 적어야 하지만, 영어 발음에서도 ‘러닝’처럼 ‘커닝/캐낫’으로 읽어야 올바른 발음이 됩니다.
[참고] 외래어 표기와 외국어 발음과의 관계 : 외래어 표기법의 근본 목적은 외국어에서 비롯되었으나 우리말 속에 들어와 우리말로 사용되는 말들을 통일된 방식으로 적기 위한 것이지, 외국어 발음 교육을 위한 것은 아니다. 외래어 표기법은 한국어로 일상적인 의사소통을 하는 가운데 표준 표기형을 제공하기 위한 것일 뿐이며, 외국어를 말할 때에도 그대로 발음하라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런닝 맨’은 외래어 표기법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외래어로서도 인정받지 못한 말이고, 영어로서도 콩글리시에 속하는 엉터리 표기입니다. 현재 이 ‘러닝-’이 들어간 말 중 외래어로 인정된 것들에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있다는 걸 참고하셔요. 유의할 것으로는, 흔히 쓰는 ‘러닝셔츠’는 ‘러닝샤쓰’와 함께 복수 외래어라는 점입니다. 대중들에게 두 말 모두 비슷한 빈도로 쓰이고 있어서죠.
러닝메이트(running mate)? ①어떤 특정한 사람과 항상 붙어 다니는 사람. ②어떤 일에 보조로 함께 일하는 동료. ‘동반자’로 순화. ③경마에 출전하는 말의 연습 상대가 되는 말. ④미국에서, 헌법상 밀접한 관련이 있는 두 관직 중 차위(次位) 직의 선거에 출마한 입후보자. 특히 부통령 입후보자.
러닝셔츠(▼running shirt)≒러닝샤쓰? 운동 경기할 때 선수들이 입는 소매 없는 셔츠. 또는 그런 모양의 속옷.
러닝슈즈(running shoes)? 경주할 때 신는 신발.
러닝슛(running shoot)? 농구ㆍ핸드볼 따위에서, 골을 향해 뛰어 들어가며 공을 던져 넣는 일.
러닝패스(running pass)? 축구ㆍ럭비ㆍ농구 따위에서, 달리면서 같은 편의 선수에게 공을 넘기는 일.
러닝타임(running time)? 방송 프로그램이나 영화의 상영 길이.
러닝캐치(running catch)? 야구ㆍ농구ㆍ핸드볼 따위에서, 달리면서 공을 잡는 일.
러닝백스(running backs)? 미식축구에서, 라인 후방에 있다가 공을 받아서 달리는 공격 팀의 선수를 통틀어 이르는 말.
러닝브로커(running broker)? 자기 자본으로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상인들을 중개해 주고 구문을 받는 사람.
러닝호머(▼running homer)? 야구에서, 타구가 펜스를 넘지는 않았지만 야수가 공을 쫓고 있는 사이에 타자가 베이스를 돌아 홈인하는 일. ←‘장내홈런(場內home run)’은 신어 목록에 있지만, 아직은 표준어가 아님. ☜[참고] ‘장내홈런’을 뜻하는 올바른 영어 표기는 Inside-[the]-park home run[homer]임.
러닝보어경기(running boar競技)? ≒러닝 게임 타깃 사격(라이플 사격에서, 움직이는 표적을 쏘는 경기).
[덤] ♣ 미국에는 ‘맥아더’가 없다
미국인들과의 대화에서 맥아더 얘기가 나왔을 때, 그들에게 ‘맥아더’라고 말하면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어떤 이는 그런 사람이 미국에 없다고도 말합니다. 아니, 인천상륙작전으로 유명한 그 ‘맥아더’ 원수, 미국에서 마지막 별 다섯 개 자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명언을 남긴 사람, 원수(元帥)가 해임될 수도 있다는 신기록까지 세운 사람을 모르다니요. 무식해도 분수가 있지... 하지만, 알고 보면 그리 씩씩거릴 일은 못 된답니다.
그들에게 우리의 ‘맥아더’는 ‘매카서(MacArther)’입니다. ‘매’를 발음한 뒤 아주 짧은 휴지를 둔 뒤 ‘아서’의 ‘아’에 힘(악센트)을 주어 발음하기 때문에 우리 귀에는 ‘매카서’로 들리는 거죠. 그래서 우리도 우리의 맥아더 장군을 의미하려면 그리 발음해야만 미국인들이 알아듣습니다. 위에서 외래어 표기가 외국어 발음 교육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적은 것과도 연결됩니다.
더구나 우리의 ‘맥아더’는 외래어 표기에서 관용 표기를 따른 경우이기도 합니다.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적으면 ‘맥아서’가 되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영국의 ‘아서(Arther)’ 왕을 적을 때 ‘아더’ 왕으로 적으면 잘못이랍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은 이미 우리 입에 그렇게 익은 이름이기 때문에 뒤늦게 표기법을 고집하기 어려워서, 관행대로 표기한 것이고요.
이처럼 미국 등에 가서 우리의 외래어 표기 방식대로 발음을 하면 전혀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MacArther 장군의 경우처럼 앞에 Mac(또는 Mc. ~의 아들/자손이라는 뜻) 따위가 붙은 말들이 대표적입니다. 햄버거 체인점으로 유명한 MacDonald’s도 그중 하나입니다. 배가 고파서 택시를 타고 ‘맥도널드’ 집으로 데려가 달라고 해봐도 기사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매카서’에서처럼 ‘맥’에서 짧게 휴지를 둔 뒤 ‘다날즈’의 ‘다’를 아주 힘차게 발음해야 알아듣습니다. ‘맥다날즈’가 되는데요. 앞의 ‘맥’은 때로 거의 들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다날즈’라고 해도 알아들을 정도지요.
이와 비슷하게 앞의 꾸미개 말을 아주 약하게 발음하고 뒤의 첫 음절을 강하게 발음하는 것으로는 ‘몽고메리(Montgomery)’와 같은 것도 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2차대전 영웅인 몽고메리 원수도 있고 미국 앨라배마 주의 유명 도시 이름이기도 하죠. <빨간 머리 앤>의 저자인 캐나다 여류 소설가도 루시 몽고메리로 표기하고요.
이 ‘몽고메리’ 역시 외국어로 발음할 때는 ‘Mont’을 살짝 발음한 뒤 짧은 휴지를 두고 나서 나머지 ‘-gomery’를 발음해야 합니다. 실제 발음은 ‘멍가머리’에 가깝지요. 40여 년 전 얘긴데요. 앨라배마 주에서 우리나라 영문학자가 택시를 타고 ‘몽고메리’로 가자고 했는데 엉뚱한 곳으로 데려다 주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분이 용감하게도 그런 얘기를 악센트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털어놨기 때문에 알려진 거지만요.
우리의 외래어 표기가 외국어 발음 교육과는 무관하다는 것, 이제 확실히 아셨죠?
* 이 글은 오는 7월 발간 예정인 졸저 <한국어 실력이 능력이다 - 업무 능력(NCS) 시대에서의 우리말의 힘>에 수록될 내용의 일부다. 출판사와의 협약에 따라, 이 글의 부분 또는 전부의 복사/전재 및 일체의 상업적 활용을 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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