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 남용과 외래어 오용(5) : 객지에 나와서 고생하는 영어들
○ 객지에 나와서 고생하는 영어, 질식사 앞둔 우리말 : ‘시크하다’면서 ‘시크’의 철자를 모르고, ‘썸남썸녀’는 something의 진짜 의미를 모른다
[문] 여고 1년생인데요, 며칠 전 미용실에 가서 순서를 기다리다가 거기에 있는 여성 잡지들을 봤어요. 그런데, 그곳 기사에 나온 말들을 하나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더라고요. 외국 말이 우리말보다도 더 많았어요. 우리말에 그런 말들이 없어서 그리 적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들이 있는 건지 궁금해요. 그리고, 알려주시는 김에 그런 말들을 제가 올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들로 바꾸어 주실 수 없나요? 제 짐작과 맞춰보고 싶어서요. 아래에 그런 말들을 적어 놓았어요.
- 이날 출국장에 모습을 드러낸 김00는 산뜻한 트렌치 코트에 화이트 데님 진을 매치했다. 다크블루 색상의 페도라가 포인트였다.
- 000은 봄 분위기가 물씬 풍겨오는 화이트 재킷에 화려한 스키니 팬츠로 패셔니스타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는 긴 웨이브 헤어스타일에 오버사이즈 보잉 선글라스로 내추럴한 스타일링을 완벽히 소화하며 세련미를 과시했다.
그리고요, 눈에 띄는 말들을 몇 가지 아래에 적어 보았는데 꼭 이런 외국 말로만 써야 하는지도 궁금하지만요, 제 느낌으로도 말이 좀 안 되는 것들도 있는 것 같아요. ‘카리스마 있는 섹시미’란 말도 어렴풋이 감만 오고 우리말로 하면 정확히 어떤 걸 뜻하는지 잘 모르겠고요. 제 또래의 여고생이 ‘시크릿 팬미팅에 간 게 시크릿하다’라고 했는데, 그 말이 정확히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디스패치의 촉’은 또 무슨 촉을 의미하는지도 궁금해요. ‘디스패치’란 말도 처음 듣는 말이고요.
그런데, 제 친구들도 이런 말들을 많이 쓰긴 쓰거든요. 심지어 ‘카리스마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을 뜻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시크한 사람’이라고 말해주더라고요. 그럴 땐 저는 둘 다 정확히 그 뜻을 모르지만 그냥 아는 체하고 넘어가곤 해요. 답답한 마음에 여쭤봅니다.
- 최명길, '올 화이트 룩이 엘레강스하네' [기사 제목]
- 카리스마 있는 섹시미
- 시크릿 팬미팅에서 팬들에게 “솔로도 달달하세요”... 팬 하나는 “시크릿 팬미팅에 온다는 자체가 계탄거에요. 제가 올 수 있었다니, 정말 시크릿하네요"라며 울먹였다.
- 팬도 못 본 대기실 비하인드도 나갑니다. 디스패치의 촉을 피할 수는 없지요.
[답] 참으로 기특한 학생이라고 칭찬부터 해주고 싶네요. 요즘 많은 학생들이 이런 걸 대하고도 그냥 지나치거나, 아예 관심조차 안 하는 사람, 모르면서도 아는 체하는 사람 등 다양한데, 학생처럼 이렇게 삶의 주변에서 궁금한 것들을 한 가지씩이라도 자신의 힘으로 알아가는 사람은 무척 드문 편이거든요. 그게 진짜 공부이기도 하고, 그런 사람들이 훗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알차게 마련이지요.
‘촉’을 보니 생각나는 일화가 있네요. 대기업 면접장에서 어떤 사람이 대답을 하면서 ‘제게도 촉이란 게 있잖아요.’라고 한마디 보탰는데, 결국 낙방했지요. 그런 말 한마디 때문에 떨어진 건 아니겠지만, 사람의 내면이나 품격, 그리고 참 실력은 그런 자리에서 얼결에 드러나는 말 한마디로도 알 수 있게 되는 경우가 흔하거든요. 제가 자주 말하듯, 언어는 그 사람이니까요. 앞으로도 죽 이런 태도를 지켜갔으면 좋겠어요. 그러실 거죠?
질문 내용이 여러 가지라서 답변은 아래에 따로 적을게요.
우리말이나 쉬운 말로 풀어 쓰는 건 내 설명을 참고하면서 000 양이 한번 해보도록 하셔요. 그것도 좋은 공부니까요. 그리고, 한 가지 더요. 이런 잘못된 언어들의 유통은 일시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란 거예요. 일종의 유행이죠.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걸러지거나 폐기되는 것들도 많으니, 00 양의 경우는 지금처럼 올바른 말에 관심하는 버릇만 계속 갖고 있으면 돼요. 친구들과의 소통은 지금처럼 그런 식으로 때우듯 해서 넘길 수 있으면 최상책이고요. 외톨이로 밀려나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기특한 00 양에게 선물 하나 드릴게요. 위의 질문 문장에 ‘시크릿 팬미팅’ 등의 표현이 있는 걸 보니 아마도 요즘 흔히 말하는 ‘아이돌스타’ 관련 기사인가 본데, ‘아이돌스타’는 ‘아이들스타(idol star)’의 잘못이어요. 외래어 표기법상으로도 잘못이지만 막상 영어권에 나가서도 ‘아이돌스타’라고 말하면 그쪽 사람들은 무슨 소린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한답니다. 그러니 그처럼 엉터리 영어 부스러기가 들어가 있는 말들을 일부러 애를 써서 익히고 창피당할 필요는 더욱 없겠죠?
아닌 게 아니라 질문자가 예를 든 것처럼 우리의 주변에서 보이고 쓰이는 말들 중에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부스러기 외국말이 어지럽게 설칩니다. 패션 관련 기사를 보면 글자만 한글일 뿐 태반이 외국어들인데, 진짜 문제는 그런 외국어들이 엉터리인 경우도 흔하다는 점입니다. 그런 말들에 오래도록 노출되면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들을 불쑥 사용하게 되거든요. 진짜 외국어를 써야 할 자리에서요.
흔히 외국어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부스러기(엉터리) 외국어를 남용하는 버릇이 있는데요. 그런 경향까지 보태져 그릇된 현상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 바람에 엉터리 말들이 우리말 환경은 물론 외국어까지도 오염시키고 있고, 황사로 오염된 바람처럼 널리 번지고 있어서 상황이 심각하죠. 그 손해가 그런 말들을 사용하고 유통시키는 이들에게만이 아니라 같은 언어 환경에 처해 있는 이들에게까지 직접적인 피해가 미친다는 점에서요. 마치 간접흡연의 폐해만치나 심각하달 수 있습니다.
질문자가 제시한 자료를 보기로 하죠.
- 이날 출국장에 모습을 드러낸 김00는 산뜻한 트렌치 코트에 화이트 데님 진을 매치했다. 다크블루 색상의 페도라가 포인트였다.
짧은 두 개의 문장에 외국말이 6개나 들어가 있군요. 그중에는 (불행히도) 우리말로 쉽게 옮길 수 없는 말이 두 개 있습니다 : ‘트렌치코트, 페도라(fedora. 챙이 말려 있고 높이가 낮은 중절모)’. 그 밖의 것들은 문제적인 표현이거나 우리말로 바꿔 써도 좋은 말들이고요.
우리말에 적절한 번역어가 없는 두 말 중 ‘트렌치코트(trench coat)’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말로, ‘길이가 짧고 방수(防水)가 되는 외투’를 이르는 외래어죠. 따라서 영어 단어로는 두 낱말이지만(영어에서도 최근 한 낱말로 붙여 쓰기도 한다) 우리말인 외래어로 편입되어서는 한 낱말인 ‘트렌치코트’로 붙여 써야 합니다.
‘데님 진’에 쓰인 ‘데님(denim)’은 옷감의 명칭으로서 ‘두꺼운 무명실로 짠 능직(綾織)의 면직물’을 이르는데요. 이를테면 청색의 ‘블루데님’이 바로 ‘진(jean. 올이 가늘고 질긴 능직의 무명. 또는 그것으로 만든 옷. 주로 작업복이나 평상복으로 사용)’입니다. ‘블루진’을 우리말로 ‘청바지’라 하는 것처럼 ‘진’은 기본적으로 청색이고요. ☞[참고] 요즘 허리/엉덩이부터발목까지 몸에 딱 달라붙는 청바지들을 즐겨 입는데, 그 영어 명칭은 skinny jeans이다. 우리말로는 ‘스키니진’으로 적으며 이 외래어의 순화어는 ‘맵시청바지’.
위의 기사에 ‘화이트 데님 진’이라는 표현이 보이는데요. 우리말로 하자면 흰색의 능직 바지인 듯한데, 그렇다면 그것은 ‘화이트 데님 바지’를 잘못 표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은 기본적으로 ‘청바지’이므로 ‘데님 진’은 ‘능직 청바지’가 되는 것이거든요. 그러니 그 앞에 붙인 ‘화이트’와는 전혀 ‘매치’되지 않는(하얀 데님 청바지가 되므로) 거죠. 심하게 말해서 엉터리 표현이 되는 겁니다. 그런 경우에는 그냥 ‘하얀 데님 바지’라 하는 것이 더 명확하고 올바른 편이었고, 작성자의 무지를 드러내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위에서도 쓰였듯 걸핏하면 남용하는 말 중에 ‘매치(match)’가 있습니다. 주로 조화를 이루어 잘 어울린다는 뜻으로 자주 쓰는데요. 영어에는 그런 뜻 외에 ‘맞먹다/필적[경쟁]하다’라는 좀 심각한(?) 뜻도 있습니다. ‘The two players were evenly matched.’라 하면 ‘두 선수는 대등하게 맞먹었다.’가 되는 식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잘 어울린다’라는 부드러운 뜻으로만 익혀 온 경우에는 이처럼 쉬운 영문 표현 앞에서도 당황하거나 제대로 사용하질 못하는 경우가 아주 흔합니다. 그러니, ‘매치된다/매치시킨다’라는 말보다는 ‘잘 어울린다/어울리게 한다’라는 우리말을 쓰는 편이 진짜 영어 실력* 배양에도 도움이 된다는 걸 알 수 있겠죠?
[참고] 부스러기 영어 애용자의 영어 실력 : 누차 말하지만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이런 부스러기 도막 영어를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match’ 자체가 ‘어울리게 하다/어울리다’의 뜻인데, 거기에 다시 ‘–된다/-시킨다’ 따위의 불필요한 말을 덧대면 말도 괴상해지고 언어경제적으로도 낭비가 된다는 걸 알기 때문. 그러므로 ‘미스테리하게’와 같은 엉터리 토막 영어를 애용하는 이들의 영어 실력은 바닥이라고 생각하면 거의 틀림없다. 영어로도 ‘미스터리’로 발음하고, 외래어로도 ‘미스터리’로 표기하는 말로서 ‘미스테리’가 아닐 뿐만 아니라, ‘미스테리하게’라는 표현은 상황에 따라 ‘괴이하게/이상하게/이상야릇하게/알 수 없게’ 등으로 얼마든지 우리말로 표현할 수 있고 그런 편이 훨씬 나은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런 부스러기 영어 애용자의 영어 실력과 관련하여 아주 재미있는 조사 결과가 있다. 모 신문사의 국어연구소에서 중고생들에게 거의 입에 달고 사는 듯한 ‘아이돌(idol. ‘우상’이라는 뜻으로 ‘아이들’의 표기 잘못)’의 의미를 물었더니, 60%가 넘는 학생들이 그 정확한 뜻을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일부 의견으로는 그처럼 영어에 ‘절망’ 상태인 사람들이 그나마 부스러기라도 만지고 싶어하는 것이 그게 무어 그리 나쁘냐라면서 아무 소리도 하지 말자는 의견도 있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인생 자체가 통째로 선택인 터에...
‘다크블루 색상의 페도라가 포인트였다.’라는 표현도 한껏 외국말 덧칠로 멋을 부린 문장인데요. 이것은 ‘암청색의 페도라가 (단연) 눈길을 끌었다.’거나 ‘암청색의 페도라가 주목거리(注目-.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였다.’는 식으로, ‘페도라’를 제외하고는 얼마든지 우리말로 표현해도 내용이 손상되지 않습니다. 되나 못 되나 무조건 외국말 부스러기를 갖다 붙이려는 그 사고방식과 태도와 버릇이 문제죠. ‘다크블루 색상’이란 긴 말 대신에 그냥 ‘암청색’이라고 표현한다고 해서 어디 그 격이 떨어지기라도 하나요.
‘다크블루’와 같은 외국어 애용 버릇은 요즘 너도 나도 따라 쓰기에 바쁜 ‘버건디(←burgundy color. 붉은 포도주와 같은 진한 자주색)’ 어쩌고 하는 데서도 드러납니다. ‘버건디’ 대신에 ‘진자주색/진홍색/암적색’이라는 말을 쓰면 ‘버건디’를 잘 모르는 이들과도 쉽게 소통되는데, 굳이 ‘버건디’를 갖다 붙이는 겁니다. 모름지기 언어란 소통이 그 으뜸 목적이 아니던가요.
그런데 정말 우스운 것은요. 막상 이 ‘버건디’란 말을 애용하는 사람에게 정작 ‘버건디’의 본뜻을 아느냐 물으면 선뜻 답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아주 흔한, 어디서고 쉽게 접하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버건디’는 프랑스의 부르고뉴(Burgundy)산 포도주를 이르는 까다로운 영어이기 때문이죠.
이런 예는 또 있답니다. 널리 알려진 ‘코냑’이 그렇습니다. 포도주를 증류하여 만든 술이 ‘브랜디’인데, ‘코냑’은 그 브랜디 중에서도 (당시) 왕실의 제조면허를 받아 일정한 지방(코냐크)에서만 생산된 일정 품질의 것에만 그 이름을 붙이도록 특별히 허가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거든요. 즉, ‘코냑’도 브랜디의 한 가지일 뿐인데,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 두 가지가 포도주를 원료로 해서 만든 같은 증류주라는 걸 모르는 이들이 아주 많습니다. 태반이 그렇습니다. 지금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세요. 코냑도 브랜디의 한 가지라는 걸 아는 이는 상당한 교양을 갖춘 이라고 해도 됩니다. 술꾼 여부와 관계없이요. 코냑도 브랜디의 하나일 뿐이라는 걸 통 모르는 그런 이들일수록 다른 유명 브랜디, 예를 들면 ‘코냑’에 못지않은 ‘아르마냑[Armagnac 프랑스 보르도(Bordeaux) 지방의 남쪽 피레네산맥에 가까운 아르마냑 지역에서 생산되는 브랜디의 이름]’과 같은 것에는 무지한 채, 그저 ‘코냑’이 최고라는 소리만 해댑니다. 취향에 따라서는 이 ‘아르마냑’을 ‘코냑’보다 더 좋아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데 말이죠.
이처럼 정작 영어나 외국어 실력이 부실한 사람들, 외국 풍물에 정통하지 못한 이들일수록 이 외국어 부스러기를 마치 애완물(愛玩物. 좋아하여 가까이 두고 다루거나 보며 즐기는 물건)처럼 끼고 다닙니다. 초면의 사람과 대화할 때 그 사람이 유독 영어(외국어) 부스러기를 많이 사용한다면 그는 영어(외국어) 콤플렉스가 심한 사람이거나 고등교육 수준에서 좀 처지는 사람으로 보면 십중팔구 맞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반 도막 외국어 끼워 넣기 버릇을 버리는 것이 영어(혹은 외국어) 콤플렉스에서 당당하게 벗어나는 한 가지 길도 됩니다.
나아가, 그까짓 영어 좀 못한들 하늘이 무너질 일은 없습니다.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외국 땅에서 길을 찾을 때 미소를 띤 채 상냥한 어조로 우리말을 천천히 하면서 손짓 발짓을 사용하고, 필요하면 땅바닥에 그림까지 그려서 의사를 전달해 보세요. 생각 외로 수월하게 상대방이 알아듣습니다. 상대방 역시 그 나라 말로 그대가 했던 몸짓, 그림들을 이용하여 대답해 옵니다. 그런 것입니다. 언어는 태도의 소산이기도 하거든요.
두 번째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000은 봄 분위기가 물씬 풍겨오는 화이트 재킷에 화려한 나염 스키니 팬츠로 패셔니스타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긴 웨이브 헤어스타일에 오버사이즈 보잉 선글라스로 내추럴한 스타일링을 완벽히 소화하며 세련미를 과시했다.
이 표현을 대하니, 문득 한때 회자되던 짧은 광고 대사 하나가 생각납니다. 한쪽에서 ‘디지털!’ 하니까 나이 드신 분께서 ‘돼지털?’하고 되묻던 어느 대기업 광고 말입니다. 위의 글을 중⋅장년 남성들에게 보여줘도 그와 비슷한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싶네요.
하기야, 패션 용어 중에는 정확히 들어맞는 우리말 번역어가 없거나 번역하면 도리어 아주 긴 말이 되어 불편해지는 것들도 있긴 합니다. 위의 글에 나오는 것으로는 ‘재킷(jacket. 앞이 터지고 소매가 달린 짧은 상의. 보통 털실 따위의 모직물로 만든다)’, ‘웨이브(wave. 머리 모양 따위가 물결처럼 이리저리 굽어져 있는 것)’, ‘스키니 팬츠(skinny pants, 허리부터 발목까지 몸에 딱 달라붙는 바지)’ 등이 그런 말이 되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말들인 ‘패셔니스타, 오버사이즈, 내추럴한, 스타일링’ 등은 우리말로 바꿔 쓸 수 있는 말이고, 바꿔 쓴다고 해서 격이 떨어지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예를 들어 ‘패셔니스타((fashionista)’는 뛰어난 패션 감각과 심미안으로 대중의 유행을 이끄는 사람을 뜻하는데, 순화어로 ‘맵시꾼’이라는 말이 있거든요. 비교적 널리 알려진 쉬운 외래어로는 ‘패션리더’도 있고요. ‘오버사이즈(oversize)’는 ‘특대형’으로 표현해도 되고(때로는 ‘너무 큰’이란 말이 어울릴 때도 있다), ‘스타일링’은 여기서는 ‘맵시 가꾸기/다듬기’쯤으로 바꿔 쓸 수 있겠네요.
여기서 가장 거슬리는 부분은 ‘내추럴한’이라는 괴상한 혼혈 표현입니다. 앞서 언급한 ‘매치된다’나 ‘미스테리하게’ 따위와 똑같습니다. 이 말들은 각각 우리말로 ‘어울린다/괴이하게/자연스러운’이라고 표현하면 될 것을 굳이 ‘내추럴’이라는 영어에 우리말 ‘-한’을 덧붙여 부자연스러운 혼혈 사생아 말을 조립하고 있습니다.
마치 ‘세련된’이라는 적절한 표현이 있는데도 요즘 굳이 영어 ‘시크’에 우리말 ‘-한’을 덧붙여 ‘시크한’이라는 괴상한 비정상 조어를 어디에고 간에 갖다 붙이고 보는 것과도 상통합니다. 막상 거기에 쓰인 ‘시크(chic)’의 영어 철자가 뭐냐고 물으면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덜 ‘세련된’ 이들일수록 그리하지요. ☜[참고] 영어에서 ‘세련된’을 뜻하는 ‘refined’라는 말에는 ‘교양/품위 있는’, ‘고상한’의 뜻도 있는데, 그처럼 학식과 교양을 갈고 닦은 품격 있는 사람을 세련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refined society’는 ‘상류사회’라는 뜻이 된다. 우리말에서도 ‘세련되다’는 ‘말쑥하고 품위가 있다’는 뜻이다. 유행하는 도막 외국어 따위를 따라하는 겉모양 베끼기만으로는 결코 세련된 사람이 될 수가 없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실은 위의 문례에서 정작 크게(?) 문제 삼아야 할 말은 따로 있는데요. ‘나염’이라는 표기가 그겁니다. 이 말은 ‘날염(捺染. 피륙에 부분적으로 착색하여 무늬가 나타나게 염색하는 방법)’의 잘못이거든요. 피륙에다 무늬가 새겨진 본을 대고 누른 뒤 풀을 섞은 물감을 발라 물을 들이는데, ‘捺染’을 한자사전에서는 ‘무늬찍기’라고 할 정도로 누르는 일이 요긴합니다. 그래서 捺(누를 날)을 씁니다. 이 말에서 ‘날(捺)’은 그만큼 중요한 의미소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도 ‘나’로 표기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이들이 확인도 없이 그냥 ‘나염’으로 쉽게 베껴 쓰고 있지요. (심지어 이런저런 전문용어 설명 책자에도 ‘나염’으로 표기된 경우들이 숱합니다.)
위 기사의 작성자도 의상 관련 용어들을 외제로 잔뜩 치장만 해놓았지, 정말로 중요한 ‘날염’과 같은 염색 용어는 없는 말, 틀린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제 제대로 알고 써야 하겠죠? ‘날염’은 눌러서 무늬를 착색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를 날(捺)’을 꼭 써야 한다는 것을요. 도장은 꾹 눌러찍기 때문에 날인(捺印. 도장을 찍음)이라고 하고, 눌러서 하는 부분 염색이므로 ‘날염(捺染)’이라고 한다고 기억해 두면 편리합니다.
<다음 편에 계속>
* 이 글은 오는 7월 발간 예정인 졸저 <한국어 실력이 능력이다 - 업무 능력(NCS) 시대에서의 우리말의 힘>에 수록될 내용의 일부다. 출판사와의 협약에 따라, 이 글의 부분 또는 전부의 복사/전재 및 일체의 상업적 활용을 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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