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너무’를 애용하면 면접에서 낙방까지 되는 걸까
최근(2015.6.) 국립국어원에서 ‘너무’의 뜻풀이에 살짝 손질을 했습니다. ‘일정한 정도나 한계에 지나치게’에서 ‘일정한 정도나 한계를 훨씬 넘어선 상태로’로요.
손질은 살짝 했지만, 그 파급효과는 엄청난 것이 지금까지는 이 ‘너무’를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인 느낌/어감을 담는 데에만 쓸 수 있었지만, 이번에 새로 예문에 포함시킨 것 중에는 긍정적인 경우들도 아주 많습니다. 즉, 앞으로는 긍정/부정을 가리지 않고 ‘너무’를 아무 데에나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요. 이런 변화를 ‘너무 좋은 일’로만 받아들여야 할까요? 결론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아래의 표현 묶음 두 가지를 보기로 하죠.
(1)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너무 기뻐요/오늘 너무 즐거웠습니다/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너무 슬펐어요/이곳이 넘(넘) 더 좋군/너무 끔찍한 광경/부모에의 효도는 너무 당연한 일/넘(넘) 아름다웠던 여인/넘(넘) 모르더군/그녀를 너무 사랑했던 그/너무 귀여운 여인/너무 예뻤다니까요/그동안 너무 수척해졌군/너무 어려운 시험이었다/너무 먹었더니 배가 거북해/넘(넘) 많은 사람 중에 하필 나를.
(2)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엄청 기뻐요/오늘 대단히 즐거웠습니다/매우 감동적이었습니다/몹시 슬펐어요/이곳이 훨씬 더 좋군/아주 끔찍한 광경/부모에의 효도는 극히 당연한 일/무척 아름다웠던 여인/전혀 모르더군/그녀를 끔찍이 사랑했던 그/정말 귀여운 여인/진짜(로) 예뻤다니까요/그동안 많이 수척해졌군/굉장히 어려운 시험이었다/잔뜩 먹었더니 배가 거북해/하 많은 사람 중에 하필 나를.
두 번째 묶음에는 ‘너무’가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걸핏하면 버릇처럼 갖다 써대는 그 ‘너무’가 전혀 쓰이지 않았는데도, 표현이 놀랍게도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그런데요. 혹시 이런 손쉬운 부사들을 적절한 곳에서 사용하려고 노력하는 걸 건너뛴 채, 그냥 ‘너무’를 손쉽게 갖다가 쓰진 않았나요? 그 건너뛰기가 혹시 버릇이 되진 않았나요?
실은 묶음 (1)에도, 예전의 쓰임에 따라 ‘너무’가 쓰이더라도 자연스러운 경우들이 제법 되긴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얼마든지 다른 부사들로 바꿔 쓸 수 있다는 점, 그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얼마든지 다른 적절한 말로 대체할 수 있거나 해도 될 경우에조차도, 남들이 퍼뜨린 걸 거부 없이 받아들이고 따라 하는 사이에 어느 결에 그 말이 자신의 뇌리에 새겨지고, 그 바람에 입에도 들러붙게 된 그런 말들에 의지하는 것은 풍요로운 언어생활을 스스로 포기하고 가난한 언어생활로 접어들게 되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심하게 말하면 언어생활의 퇴화이기도 합니다. 단적인 예로 미개 민족의 언어일수록 미분화 상태가 높습니다. 섬세한 언어로 분화/발전되지 않은 ‘단순 언어’, 곧 원시 수준의 언어들일수록 그렇습니다. 수많은 멋진 말들이 많은데, ‘너무’ 한 가지로 단순화시키는 것을 언어생활의 퇴화라 지칭한 이유입니다. 달리 보자면, 언어의 저급화라고도 할 수 있지요. 섬세하게 분화/발달된 고급 언어를 외면하기 시작하면, 끝내는 그걸 버리는 일로도 이어지기 때문에요.
‘너무’에 너무 의존하면 안 되는 두 번째 이유로는 언어 구사 능력이 상황 대처 능력 내지는 문제 해결의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는 점 때문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돌발 상황이나 응급 상황도 발발합니다. 임기응변으로 난관을 돌파해야 할 때도 많습니다. 그럴 때 풍부한 언어 능력(제대로 끌어안은 자신의 언어들이 발휘하는 힘)은 대체 수단이나 해결 방법의 발견/발굴에 적지 않게 도움이 됩니다.
‘응급실/응급처치/임기응변’에서부터 ‘실제 상황, 급변 상황, 주변 상황’, ‘긴급대처/긴급구난’ 등과 같은 낱말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극한상황(한계상황)’에서 유효한 수단을 이끌어내는 단초가 되기도 하거든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 발굴에서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것은 상황 파악 →(필요) 사물 인지 →행동 들인데 그 모든 단계에서 주춧돌이 되는 것은 생각하기(생각해내기)이고, 그 생각하기와 생각해내기의 도구가 바로 언어이기 때문이죠. 등산 추락 사고를 가정해 보죠. ‘먹을거리, 지탱하기, 로프, 보온, 구조 신호...’등과 같은 것들은 그 언어를 떠올렸을 때야 비로소 구체화되고 실체화되는 것들입니다. 행동은 이러한 생각해내기의 과정을 거쳐서 우선순위도 정해지고 하는 식이고요.
위에서 간단히 언급한 ‘단순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의 생각들이 단순한 수준에 머무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요컨대, 언어 능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대체 능력(문제 해결력)이 대체로 풍부하거나 빼어납니다. 그럴 때 흔히들 머리가 좋다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사고능력이 빼어난 것이지요. 그 능력은 그 사람의 언어가 뿌린 씨앗에서 싹이 터 자란 것들입니다.
세 번째로 ‘너무’를 너무 애용하는 이들이 쉽게 낙방하는 이유. 그것은 사고의 유연성 내지는 창의적 사고력에서 뒤지기 때문입니다. 그 원인이 되는 출발점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그의 언어 능력이 제한적이고 일방적이기 때문이지요. 심하게 말하면 사고방식 자체가 기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너무’를 사용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다양한 표현들을, 때로는 더 멋지게 해낼 수 있을 때조차도 무조건 ‘너무’만 사랑해 대니, 다른 생각들을 해내려는 노력은 저절로 생략될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끈기 있는 사고와, 다양한 접근 방식 떠올리기에서도 한참 뒤지게 됩니다.
사고의 유연성이란 것도 별 것 아닙니다. 어떤 말 대신에 다른 말을 떠올리는 데서 출발합니다. 창의력이란 것도 대동소이하고요. 타인들이 흔히 쓰는 말, 주변에 널려 있는 그런 흔한 말 대신 다른 말을 찾아내는 일과 같습니다.
손쉬운 예를 하나 들어 보죠. ‘경사(傾斜)/기울기’ 등과 같은 말 앞에서 ‘비탈지다’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경사(傾斜)’란 걸 ‘위에서 아래로, 혹은 아래에서 위로 보이는 기울어진 상태’로만 단순화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같은 ‘경사’라 하더라도 각도까지 생각해서 그 경사각이 큰 것 중 우리에게 친근한 말에 착점한 사람입니다. ‘비탈지다’란 ‘(산이나 언덕 등과 같은 큰 것이) 몹시 가파르게 기울어져 있다’라는 뜻이니, 단순 경사에서 한 발 더 나아간 거죠. 그래서 그런 사람은 ‘기울어진 사회’라고 표현해야 할 때 ‘비탈진 사회’라는 창의적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 사고의 유연성과 창의력조차도 그것을 이끌거나 이뤄내는 주요한 수단과 열매가 언어라는 것, 이제 동감하시겠지요?
지금까지의 얘기를 아우르기로 하죠.
다른 적절한 말들, 멋진 말들이 있음에도 그런 것들을 돌아보지 않고 유행어 수준으로 떠도는 ‘너무’ 따위에 손쉽게 오염되는 일은 풍요로운 언어생활을 포기하고, 가난한 언어생활로 퇴화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제 발로 고급한 언어에서 저급한 미분화 언어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기도 하고요.
이것은 상황 대처 능력 내지는 문제 해결 능력에서도 뒤지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유연한 사고력과 창의력 계발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되고요. 언어 구사력이 종합 판단력의 기초이자 잣대로 작용하게 되는 주된 이유들이기도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유행어 수준의 언어들에 쉽게 오염되는 이들은 ‘남들 따라 하기’의 대열에 쉽게 무임승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진지한 겨눔에 어울리는 잘 짠 계획, 자신만의 다부진 노력이나 가다듬기 등에서 차이가 납니다. 독서량이 빈한한 것도 공통 결함 사항이 되고요.
이러한 것들은 어떻게 해도 면접에서 감춰지거나 가려지지 않습니다. 일대일 면접에서 집단 면접으로 바뀌고, 그것도 모자라 1박 2일의 합숙 토론이나 팀별 해결력 관찰 면접 등으로 면접이 심화되는 것도 바로 일회적 판단에서 놓쳤을지도 모르는 종합적인 능력을 보고자 함이죠. 거기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 그것은 바로 응시자들의 언어입니다.
공장 생산 제품이나 공사장에서나 쓰여야 할 그 괴상한 말이던 ‘스펙’ 시대가 이제 완전히 끝났습니다. 그 자리에 새로 들어선 게 직무능력(NCS) 평가인데, 그 평가의 삼대 축은 지식.기술.태도지요. 그중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응시자들이 사용하는 언어이기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곧 그가 사용하는 언어를 대상으로 해서 이뤄지게 되는 것이랍니다.
이제 어째서 ‘너무’ 따위와 같은 단순한 말 한마디의 사용 습관이 중대사의 하나인 면접에서 낙방으로까지 이끌게 되는지, 이해되시죠? 누차 말하지만, 언어가 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를 너무 하대했나요? 무조건 버리거나 기피하라는 건 아닙니다. 본래의 쓰임대로 부정적/비관적인 느낌을 담고 싶을 때나 ‘너무나’로 바꾸어 말이 되는 경우에는 얼마든지 사용해도 됩니다. 다만 좀 더 적절한 다른 말이 있을 때는 그 말들을 찾아보려는 노력을 건너뛰어서는 안 된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아무 때나 덩달아 ‘너무’를 생각 없이 남발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참, 위의 예문 (1)에 가끔 보이는 '넘/넘넘'은 일견 '너무/너무너무'의 준말이니까 써도 될 것 같지만, 아직은 표준어로 인정받지 못한 말들입니다. 구어체로서 비표준어입니다. 글쓰기 등에 사용하면 감점 대상이 되니, 주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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