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 남용과 외래어 오용(5)
○ 객지에 나와서 고생하는 영어, 질식사 앞둔 우리말 : ‘시크하다’면서 ‘시크’의 철자를 모르고, ‘썸남썸녀’는 something의 진짜 의미를 모른다(2)
질문자가 제시한 뒷부분의 표현들을 보기로 하지요. 여기에도 문제적 표현들이 수두룩합니다.
- 최명길, '올 화이트 룩이 엘레강스하네' [기사 제목]
이 기사 제목에도 외국어 부스러기 남용이 심하지만, 문제점은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첫째 ‘올 화이트 룩’에 쓰인 ‘올’이라는 표현은 불필요한 덧대기입니다. ‘화이트룩(white look. 상의와 하의를 모두 흰색으로 입는 옷차림)’만으로도 충분하지요. ‘올 화이트 룩’은 마치 ‘역전앞(驛前-)’과 같은 겹말입니다. 머리까지 흰색으로 물들이고 흰 구두까지 신어서 전신을 흰색으로 도배(?)하다시피 한 게 아니라, 위아래 옷을 흰색 계통으로 통일한 것이라면 ‘화이트룩’만으로 충분하거든요. ‘화이트 룩’으로 친절하게 띄어 적은 것으로 보아, 외래어 표기법을 잘 모르고 있는 듯도 하군요. 누차 말하지만 외래어로 표기하려면 한 낱말이므로 ‘화이트룩’으로 붙여 적어야 합니다.
‘엘레강스하네’는 지금까지 다뤘던 말들, 곧 ‘내추럴한/시크한/매치된다/미스테리하게’와 마찬가지의 괴상한 혼혈 사생아 낱말입니다. 고인이 된 유명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혀를 굴리며 이 말을 발음하곤 해서 그분의 전매특허처럼 굳어진, 프랑스어에서 온 말입니다. 그런데, 이 기사를 쓴 기자가 만약 이 말의 형용사인 elegant를 알고 있었다면 ‘엘레간트하네’라고 하였을까 아님 ‘엘리건트하네’라고 하였을까 문득 궁금해집니다. 위의 표현을 우리말로 직역(?)하자면, ‘최명길, 위아래 흰색 차림의 우아함’ 정도인데, 조금 멋을 부리자면 ‘최명길, 순백색의 통일미, 우아함의 극치’쯤으로도 할 수 있을 듯합니다.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우리나라의 패션 관련 기사는 이런 엉터리 외국어 남용 문제가 심각합니다. 심하게 말해서 무식해서 용감한 건지, 용감하다 보니 무식해진 건지 모를 정도로요. 오죽하면 두세 해 전부터 ‘보그병신체(-病身體)’라는 말까지 유행하고 있을까요. 패션계에서 흘러넘치고 있는 잘못된 행태, 곧 ‘엘레강스하네’처럼 외국어를 소리 나는 대로 한글로 적는 괴상한 외국어 애용 버릇을 ‘병신들이 만든 병신 같은 문체’라는 뜻으로 직격탄을 날린 건데요. 자세한 것은 아래에 붙인 [덤] ‘보그병신체’를 작명한 이의 이유 있는 분노를 보셔요.
- 카리스마 있는 섹시미
질문한 학생처럼, 필자 또한 정확히 어떤 뜻으로 이런 표현을 했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특히 ‘카리스마 있는’이라는 표현 앞에서 머뭇거리게 됩니다. ‘카리스마’란 ‘①예언/기적을 나타낼 수 있는 초능력이나 절대적인 권위. ②대중을 심복시켜 따르게 하는 능력/자질’을 뜻하는 말이니, 카리스마와 관련되는 섹시미라면 성적 매력으로 초능력/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거나, 대중들을 따르게 하는 자질 중의 하나를 지녀야 할 텐데, 그런 뜻이라면 큰일 납니다. 대상이 되고 있는 여인이 졸지에 초능력자 내지는 대중의 리더 역할까지 떠맡아야 할 터이니까요. 그것도 섹스와 관련해서 말입니다.
짐작건대 이 ‘카리스마 있는 섹시미’란 ‘감탄을 자아내는 독보적인 성적 매력을 풍기는 아름다움’ 내지는 ‘독보적(혹은 독특한) 감탄을 자아내는 섹시미(성적인 매력을 느끼게 하는 아름다움)’ 정도의 뜻인 듯합니다. 그런데, 이걸 쓴 이(기자?)는 우리말을 이용한 맛깔스러운 자신만의 표현에 신경 쓰기보다는 유행어에 무임승차하여 그저 대충 그럴 듯한 표현을 갖다 붙이는 즉석 기성품 조립 방식을 주로 택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정작 ‘카리스마’의 본래 의미를 풀이하라고 한다면 어찌 답할까요. 그 또한 무척 궁금해지는 부분입니다.
‘카리스마’는 독일의 사회학자 베버가 지배의 세 가지 유형으로 합리적 지배, 전통적 지배와 함께 카리스마적 지배를 든 이후로 일반화하였다는 점에서, 위에서 단순하게 국어학적으로 압축한 의미 외에도 그것들을 함께 익힐 때 그 의미가 더욱 또렷해지는 좀 복잡한 말이랍니다. 쉽게 말하자면 좀 체계적으로 꽤나 유식(?)해야만 자신 있게 쓸 수 있는 말에 듭니다. 떠도는 기성품 유행어를 단순 채집해서 손쉽게 써 먹는 이에게는 거리가 먼 얘기죠.
언어는 그 사람입니다. 유행어에 의탁하여 인스턴트 식 어법을 애용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품격이나 내용물도 즉석 대용품 정도로 낮아지지요. 조금 더 거창하게 비유하자면요. 농업의 발전 과정을 크게 분류할 때 ①원시적 채집 단계(야생의 것을 단순 채취하는 단계. 떠돌이/유목민 시대), ②경작 단계(씨를 뿌려 가꾸어 수확. 정착민 시대), ③개발/부가가치 창출 단계(신품종 개발. 2~3차 가공으로 부가가치 창출. 고도산업사회 시대)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요. 유행어들을 채집하여 대충 써먹는 그런 이들은 1단계 채집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머리를 쓰고 노력해서 남들보다 더 높은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고도의 후기 산업사회 시대에서, 그런 이들은 낡은 원시시대에 머무르고 있다는 거죠.
언어에 대한 태도 하나. 아무 것 아닌 듯해도 그처럼 큰 차이를 만듭니다. 언어의 힘은 무섭습니다. 언어는 사람(혹은 사람의 가치)을 만들기도 하고 끌어내리기도 하거든요.
패션 관련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나만 더 보태겠습니다. 몇 해 전서부터 갑자기 튀어나와서 헤집고 있는 말 중에 ‘에지있게’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다 보니 요즘에는 ‘에지있네’라도 말도 심심찮게 들리더군요.
이 말은 모 방송국 드라마에서 탤런트 김혜수가 ‘에지있게’라는 대사를 쓰면서 유행되었다고 하는데, ‘뭔가 남들과 다르고 뚜렷하게 두드러진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는 듯합니다. ‘에지있는 디자인/삶’ 등으로까지 쓰이고 있더군요. 이 말은 예전에 ‘독특한/특별한’의 의미로 쓰이던 ‘유니크(unique)’ 대신 발굴한(?) 말인 듯한데, 헛웃음부터 먼저 나옵니다. 이것 또한 미안하게도 대표적인 콩글리시라 해야 할 말이거든요.
어째서 대표적인 콩글리시냐 하면요. 외국인에게 영어로 ‘나 에지있는 사람이야’라고 하고 싶어서 온갖 표현을 구사해 보세요. ‘I’m a man with edge./I have an edge./I’m living with edge./I’m edged person’ 등등으로요. 아마 외국인 열 명 중 아홉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해 하다가 ‘너 뭘 갖고 있는데? 무슨 에지를 말하는 거야? 혹시 칼 같은 거 갖고 있냐? 뭘 또 작심한 게 있냐?’ 등으로 되물을 겁니다.
영어로 edge는 기본적인 의미가 ‘(가운데에서 가장 먼) 끝/가장자리/모서리/언저리’라는 뜻입니다. 비행기 날개에서 최초로 공기와 맞부딪는 최전방 부분을 ‘leading edge’라고 하는 것이나, ‘the edge of the cliff/town/table’라고 하면 ‘벼랑/시내/탁자의 끝’을 뜻하게 되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칼날은 칼 등에서 가장 멀기 때문에 knife-edge라 하고, 칼날이 날카로우면 ‘sharp edge’가 되는 거지요. 벼랑 끝과 같이 끝으로 몰리게 되는 상황도 있기 때문에 그래서 비유적으로는 the edge가 ‘위기’가 되기도 합니다. 벼랑 끝에 서게 되면 이를 악물고 통렬하고 강력하게 대응하게 되기 때문에 그럴 경우에 무슨 무슨(혹은 어떠어떠한) 통렬함이 있다고 할 때도 ‘have a hard edge to ~’ 등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edge는 근본적으로 ‘가장자리’ 내지는 ‘언저리’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가까운 장래에 벌어지는 인류 멸망을 그린 영화 ‘Edge of Tomorrow(2014)’는 내일의 가장자리이므로 ‘내일의 문턱(혹은 과장하자면 종말)’ 정도가 되고, 레이디 가가가 작사하고 부른 노래(그녀의 할머니가 결혼 생활 60년을 함께한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는 광경을 대하고 작사함) ‘The Edge Of Glory’는 ‘영광의 종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이는 것이지요.
어떻게 해도, ‘남들과 달리 튀어 보이고, 뭔가 달라서 그럴 듯해 보이는 독창적인 태도’를 뜻하는 콩글리시 ‘에지’와는 전혀 무관한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유행시킨 장본인이 누구인지 참 궁금해집니다.) 결론은 뻔합니다. 영어 낱말 하나라도 제대로 익히고 싶은 사람들은 이런 엉터리 콩글리시, 절대로 가까이 하지 마세요! 그럴 시간에 사전 펴들고 edge의 용법 하나라도 제대로 익히는 게 살아가는 데에 피가 되고 살이 되니까요.
이와 같이 비유적 의미로 쓰인 재미있는 경우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얼마 전 삼성의 신형 스마트폰 갤럭시 S6와 S6에지(Edge)의 시판을 앞두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나라의 모 영문 일간지 하나가, 이런 재미있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S6, Edge to determine Samsung fate! [The Korea Times. 2015.4.2.]
(‘S6 (시리즈), 삼성의 운명을 결정할 결정판!’)
이것은 삼성 제품명에 들어 있는 Edge를 이용하여, 본래 edge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재미있게 활용한 경우입니다. 삼성에서 S6에 Edge를 사용한 것은 그런 거창한 의미로 붙인 건 아니고 그냥 ‘귀퉁이’라는 뜻으로 쓴 것일 뿐입니다. S6 Edge는, 갤럭시 노트4 Edge의 오른쪽 스크린 귀퉁이를 휘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디스플레이 패널의 귀퉁이(에지)가 약간 구부러져 있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해서 붙인 것일 뿐이거든요. Edge 표기가 없는 건 그렇지 않고요. 삼성의 Edge는 ‘에지 있게’ 사네 어쩌네 따위와는 전혀 무관한 표기라는 것, 이제 아셨죠?
이제 마지막 질문 묶음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 시크릿 팬미팅에서 팬들에게 “솔로도 달달하세요”. 팬 하나는 “시크릿 팬미팅에 온다는 자체가 계탄거에요. 제가 올 수 있었다니, 정말 시크릿하네요"라며 울먹였다.
‘시크릿 팬미팅’이라는 걸 찾아보니 유명 연예인이 소수의 팬을 선별하여 소규모로 갖는 것을 뜻하는 유행어이더군요. 비밀회담 같은 것을 ‘secret meeting’이라 하고 유명 연예인/선수 등이 팬과 만나는 걸 ‘팬미팅(fan meeting)’이라고 하니까, 어쩌면 제한적 소수와의 비공개 팬미팅을 ‘시크릿 팬미팅(secret fan meeting)’이라 한 듯합니다. 어법상으로 이 말을 쓰지 못할 바는 아닙니다. 아직 외래어 대접은 받지 못하고 있기에 기사 따위와 같은 공식적인 글에서는 쓸 수 없지만요.
그런데, 그곳에 참가하게 된 사람의 소감에 쓰인 ‘정말 시크릿하네요’가 참 엉뚱합니다. 그 말 앞에서 고개를 한참 갸우뚱하게 됩니다. 어떻게 해도 ‘시크릿하다’라는 괴상한 혼혈 사생아 낱말은 ‘비밀스럽다/은밀하다’ 외의 다른 뜻을 유추해내기 어려운 말이거든요. ‘secret’이 형용사로서 명사 앞에 쓰일 때는 ‘비밀의/남몰래 하는/남이 모르는’을 뜻하지만, 위의 경우와 같이 보어로 쓰일 때는 그 두 뜻 외에 다른 건 없습니다. 이 말을 쓴 이가 ‘계탄거’라는 말 다음에 이 말을 쓴 것으로 보아, 어쩌면 ‘시크릿’ 자체를 ‘은밀하게 엄청 횡재한 것’쯤으로 대충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중학교 수준의 영어 단어 하나를 제 손으로 공부하지 않으면 이런 엉뚱한 확대 해석 내지는 망상에도 빠지기 쉬우니까요.
여기서도 잠시 살피고 가야 할 것 하나가 있습니다. ‘계탄거에요’라는 짧은 말이 그것인데, 이것은 ‘계 탄 거예요’의 잘못입니다. 띄어쓰기와 표기가 엉망입니다. ‘계(契)’를 ‘게’라 적지 않은 것만이라도 다행이랄 정도로, 요즘 젊은이들의 무지막지한 띄어쓰기 무관심 내지는 무식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계타다’라는 동사는 없으니 ‘계 타다’로 띄어 적어야 하고, ‘거에요(x)/거예요(o)’인 것은 ‘거’가 ‘것’의 구어체일 뿐이므로 ‘것이에요 ->것예요’를 떠올려 보면 됩니다. 좀 까다로운 것이긴 하지만, 의심스러우면 꼭 확인해 두는 버릇은 참으로 유익한 습관이죠.
이런 말을 사용한 이가 유명인(예컨대 미스코리아 따위)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죠. 그녀는 그녀 수준의 언어 능력자와 결합해야 그런 대로 살아내지, 지적 능력이나 지적 활동 영역에서 한참 차이가 나는 이와는 (요행히 엮이게 된다 하더라도) 백년해로의 꿈은 이루지 못합니다. 부부 사이에도 언어 수준의 차이가 심하면 몇 해 가지 못하고 결별의 길을 걷기 십상이거든요. 언어 수준의 차이는 사고방식의 차이로 이어지기 때문에요.
그것이 걸핏하면 애용(?)되는 이혼 사유 용어인 ‘성격차이’라는 말의 주요 구성 성분이자 행로이기도 합니다. 신혼 이후의 부부생활이란 언어로 표현되는 의식(意識)의 공유와 공명(共鳴)이 실생활 못지않게 큰 몫을 차지하기 때문이고, 그 비율은 결혼생활의 햇수와 비례하기 마련이거든요. 두 사람의 언어 수준 차이는 곧 사고방식의 차이로 이어지는 까닭에 그 차이가 큰 사람들의 결혼생활이 아주 오래는 못 간다고 추정한 이유입니다.
위의 문례로 되돌아 가보죠. 팬들에게 한 말로 ‘솔로도 달달하세요’라는 표현이 보이는데, 그 표현 앞에서 다시 ‘디지털? 돼지털!’의 심정이 됩니다. 기를 쓰고 추측해보자면, ‘오늘 여기 홀로 온 분, 혹은 이성 친구나 애인이 없는 분도 여기서는 외로움 타지 말고 좋은(달콤한) 시간 보내세요’의 의미가 아닐까 싶긴 합니다만.
어찌 생각하면 이런 깊은(?) 뜻을 간단한 말 몇 마디인 ‘솔로도 달달하세요’에 담아내는 것이 신통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책에서 여러 번 다룬 사투리인 ‘달달하다’*가 얼마나 깊이 번지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도 하는군요. ☞[참고] 앞서 다뤘듯이 ‘달달하다’가 ‘달콤하다’와 비슷하거나 ‘약간 달다, 알맞게 달다, 감칠맛이 있게 조금 달다’ 등의 뜻으로 흔히 쓰이지만, 이 ‘달달하다’는 방언(강원/충북/경상도/함북). 현재 표준어로는 형용사가 아닌 동사로만 쓰이는데, ‘①춥거나 무서워서 몸이 떨리다. 또는 몸을 떨다. ②작은 바퀴가 단단한 바닥을 구르며 흔들리는 소리가 잇따라 나다. 또는 그런 소리를 잇따라 내다.’를 뜻하는 말이다. ☞○왜 사투리 ‘달달하다’가 표준어를 누르고 인기를 누릴까 항목 참조.
다음 문례를 보죠.
- 팬도 못 본 대기실 비하인드도 나갑니다. 디스패치의 촉을 피할 수는 없지요.
여기서 보이는 ‘비하인드’는 짐작하기에 외래어인 ‘비하인드스토리(behind story. 뒷이야기)’를 뜻하는 듯합니다. 긴 말이다 싶으니 자르고 보는 바람에, 또 다시 국적 불명의 사생아가 되었습니다만... 말이 길다고 잘라 버릇하면 성격도 급해집니다. 말을 빨리하는 사람은 그 성격이 점점 급해지듯이요. ☜[참고] 실은 이 ‘behind story’란 말도 억지로 줄여진 말이긴 하다. 자세히 보면, behind가 형용사적으로 쓰이고 있는데, behind는 전치사가 주된 기능이며 아직도 형용사는 아닌 말이어서 말 꼴이 좀 비정상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본래 이 말은 제대로 된 말, ‘behind-the-scenes story’에서 온 것으로, ‘비화(秘話)/흑막(黑幕)’ 등을 뜻한다.
아무튼, 외래어가 길다고 잘라서 쓰기 시작하면 외국어 실력까지도 엉터리가 되기 십상이어요. 대표적으로 일본에서 엉터리로 조립한 ‘코스프레’(costume play ‘코스튬 플레이’를 줄인 영어 ‘Cosplay’를 일본어 식으로 발음하면서 끝의 ‘이’를 빼고 또 줄인 것)와 같은 말을 애용하다 보면 정작 ‘cos-play’나 ‘costume play’라고 해야 할 경우에 그런 말을 사용할 수가 없게 되거든요. 생각도 안 나지만, 챙겨서 익히지 않은 한은 모를 때가 더 많으니까요. 제대로 된 말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어야 말이죠. ‘아이돌’을 입에 달고 지내는 아이들이 정작 그 낱말 뜻조차 올바르게 알지 못하고 있는 것과 대동소이입니다.
‘디스패치의 촉을 피할 수는 없지요.’에서 ‘디스패치(dispatch)’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기본수준을 넘기는 영어 실력자라 해도 됩니다. 본래 군대에서 쓰던 말이거든요. 장교나 고급 관리들 사이에서 긴급하게 주고받던 공문[보고]/급보 등을 뜻합니다. 거기서 지금은 ‘급파/파견/긴급 발송’ 등의 의미로 넓혀져 쓰이는데, 명사 외에 동사로도 쓰이죠. 아마도 위의 글을 작성한 기자는 팬미팅에 긴급 투입된 기자를 특파원쯤으로 여기도록 만들고자 이 말을 쓴 것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하기야, 요즘 연예인들의 시시껄렁한 뒷얘기/뒷소문('스캔들'의 순화어)들을 전문적으로 캐고 다니는 잡지 이름에도 이 말이 붙어 있는 걸 보면, 어쩌면 뭔가를 캐내기 위한 임무를 받은 기자를 그런 식으로 미화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하지만, 어떻게 해도 '디스패치'의 본뜻은 '급히 보내는 것(사람)'이란 것쯤은 알고 써야겠죠.
참, 신문사/방송사에서 내보내는 진짜 ‘특파원’을 영어로 뭐라고 하는지 위의 기자가 알고 있을까 하는 짓궂은 의문이 듭니다. 답부터 말하자면, 일정 지역에 파견하는 주재원 성격의 특파원은 ‘correspondent’라 하고, 특별한 목적(취재)을 위해 파견한 진짜 ‘특파원(特派員. 특별한 임무를 위하여 파견된 사람)’은 ‘special correspondent’라 합니다. 종군기자는 ‘war correspondent’가 되지요.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특파원과 유사한 의미로 ‘디스패치’를 갖다 붙인 기자가 진짜 ‘특파원’이라는 뜻의 영어를 알고 있을 것 같지 않아서입니다.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반 도막 영어 부스러기를 애용하는 사람의 영어 실력은 바닥 수준일 때가 대부분입니다. 재삼재사 강조합니다. 외국어, 특히 영어 하나라도 제대로 하고 싶은 분들은 우리말 공부를 제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게 진정으로 외국어를 제대로 고급스럽게 익힐 수 있는 첫걸음이 된다는 걸 꼭 명심하셔요. 나중에 외국어를 아주 잘하시게 되면 이 말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면서 무릎을 치시게 될 겁니다.
‘디스패치의 촉’에 쓰인 ‘촉’도 요즘 한창 유행 중인 말입니다. 하다못해 예능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아나운서 출신의 진행자까지도 생각 없이 갖다 붙일 정도로 많이 쓰더군요. 앞서 질문의 답 글에서 간단히 인용(引用)했듯이, 대기업 면접장에서 무의식중에 이 말을 갖다 붙이는 사람조차 있을 정도이니까요.
여기에 쓰인 ‘촉(觸)’은 ‘촉각/감촉’ 등에 쓰이는 ‘촉’에서 나온 말입니다. 만지거나 닿아서 느낀다는 뜻이죠. 하지만, 실제로 쓰이는 걸 보면 ‘시각/후각/청각/촉각/미각’과 같은 온갖 감각을 뛰어 넘는 육감(六感≒第六感. 오관 이외의 감각. 사물의 본질을 직감적으로 포착하는 심리 작용)을 뜻하는 경우도 있고, ‘걔는 너무 촉이 없어’라 할 때는 눈치코치가 없다는 뜻으로도 쓰이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 ‘촉’은 한자어로 쓰일 때 ‘접촉/감촉, 촉각/촉수’ 등에서 보듯, 수식하거나 구체화하는 말이 없이 홀로 쓰이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유통되고 있는 용례들(예 : ‘촉이 왔다/촉을 느낀다/촉이 있다’ 등)은 어법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완전 좋아’에서처럼 요즘 청소년들의 일상어가 되어버린 명사 ‘완전(필요한 것이 모두 갖추어져 모자람이나 흠이 없음)’이 갑자기 어법에도 없는 부사적 용법으로 쓰이는 것만치나 어법에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명사 꼴 그대로 부사로 쓰이는 것들도 있으므로 세월이 흐르면 이 ‘완전’도 부사로 인정받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때문에 이 ‘촉’은 현재 일부 집단(일부 청소년이나 예능인 집단 따위)에서 사용하는 비문법적인 말일 뿐이므로 은어로 밀립니다. 표준어가 아니므로 공식적인 자리나 문서에는 쓰일 수 없고, 문어체가 쓰여야 할 곳에서도 사용하지 못합니다. 사람값이 떨어지거든요. 그 사람이 구사하는 언어가 곧 그 사람인 까닭에요... 그러니, 언어 구사 수준으로 그 사람의 내면적인 능력까지도 점검하는 면접장에서 이런 ‘촉’과 같은 말을 사용하는 사람은 정말 ‘촉’이 없어도 한참 없는 사람이 됩니다.
어떻게든 영어 냄새를 피우는 것이 왠지 더 멋져 보이고 근사할 것 같아서 매달리다 보니 청소년들의 기본 언어가 되어 버린 듯한 요즘 말 중에 ‘썸’도 있습니다. ‘썸탄다’, ‘애인은 아니고 그저 썸타는 정도’라는 말에서부터 아예 ‘썸남썸녀들의 만남’ 등으로까지 쓰입니다. 이 ‘썸타다’는 대체로 ‘이성에게 관심이 간다[끌린다]/관심을 끈다/사귀고 싶은 마음이 든다’ 정도의 뜻인 듯합니다. ‘썸남썸녀’는 ‘관심이 갈[끌릴] 정도로 잘 생긴 남녀들’이라는 뜻쯤 되려나요.
이 ‘썸’은 something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온 말을 ‘썸딩/썸띵/썸싱’ 등으로 표기하려면 귀찮은데다 어느 것이 옳은 표기인지 자신도 없고, 줄이면 시간 절약도 되는데다 자르면 뭔가 더 은밀한 뜻이 될 듯싶어서 ‘썸’으로 잘라버린 것 같습니다.
영어에서 something은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지만, 사람이나 물건[일]을 보고 something이라고 하면 ‘중요한[대단한] 것[일][사람]’의 의미도 됩니다. 중학교에서 배우는 말뜻이죠. 우리말로는 ‘물건(제법 어떠한 구실을 하는 존재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에 가까운 뜻입니다. 그래서 생각이나 제안 같은 것에 대해 something이라고 하면 좋다거나 진지하게 생각할 만한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기본적으로 호감을 바탕에 깔고 있지요.
이를테면, ‘The doors here are really something, all made of good wood like mahogany’는 ‘여기 이 문들은 아주 좋은데, 정말 ‘물건’이야. 전부 마호가니 같은 좋은 목재로 만들었군.’이 되고, ‘Could there be something in what she said?’는 ‘그녀가 말한 것 중에 뭔가 좀 괜찮은 것(진지하게 생각할 만한 것)이 있을까?’가 되는 식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득 되풀이해 온 의문이 듭니다. 과연 이 ‘썸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아이들 중에 something에 있는 이러한 기본적인 의미를 제대로 꿰고 있는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하는... 위의 예문으로 사용된 영어 정도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학생들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의문 앞에서, 갑자기 기운이 빠지는군요.
생각을 생략한 채 습관적으로 유행에 편승하여 ‘썸남썸녀’까지 써대고 있는 아이들이나 성인들 중에, 이 something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단 10%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정말 간절합니다. 간절해집니다. 생각 없는 언어의 편승/선택은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삶으로 직결되기 때문이죠. 폴 발레리는 말했습니다.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살아가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요.
마지막으로, 한글학회에서 우리말 대사전인 <큰사전>[1929년에 시작하여 1957년에 완간. 전 6권]을 처음으로 만들어내면서 머리글에서 개탄했던 내용을 아래에 보이고 싶어집니다. 그 당시 상황보다도 지금이 더 나빠진 것이나 아닐는지요?
“조선말은 조선 사람에게 너무 가깝고 너무 천한 것이기 때문에, 도리어, 조선 사람에게서 가장 멀어지고 설어지게 되었다. 우리들이 항상 힘써서 배우고 닦고 한 것은 다만 남의 말, 남의 글이요, 제 말과 제 글은 아주 무시하고 천대해왔다.”
[덤] ♣ ‘보그병신체’라고 작명한 이의 이유 있는 분노
...‘머스큘러하고 텐션이 있는 보디라인을 살려주는 퍼펙트한 써클 쉐입, 버닝하는 열정을 보여주면서 잔근육 같은 디테일이 살아 숨쉬는 템테이셔널, 클리어한 뷰를 보여주면서도 단단하고 탄력 있게 벌크업’...
분명 한글이긴 한데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 없는 이 문구는 올해(2015년) 초 서울 지하철 9호선 일부 객차 안에 등장한 기아의 프라이드 광고카피랍니다. 광고카피란 소비자에게 물건을 팔고자 내세우는 글인데, 대체 무슨 뜻인지 해독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보는 이를 하도 황당하게 만들어서인지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엔 이 광고를 조롱하는 내용이 적지 않게 오르내렸답니다.
문제의 근원은 이 광고에 쓰인 ‘보그병신체’ 때문이었습니다. 2~3년 전에 만들어진 이 신조어는 세계적인 패션잡지 ‘보그(Vogue)’에다 비속어 ‘병신’을 결합한 말로, 한글 대신 영어 단어를 소리 나는 대로 쓰고 조사나 어미만 갖다 붙인 문체를 뜻합니다. ‘보그’를 비롯해 라이선스 패션잡지 한국어판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글쓰기를 워낙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고 해서 누군가 붙인 이름이랍니다. ‘병신 같은 것들이 만들어낸 병신 같은 표현 투’라는 뜻을 담은, 직설적인 비하 작명이죠.
그런데도 이런 ‘보그병신체’가 차량 광고에까지 등장한 겁니다. 비웃음 따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일부 사람들은 영어라면 소위 ‘있어 보인다’는 고집을 부리며 어설픈 영어를 열심히 가져다 쓰는 거죠. 그렇지만 결과는 어땠을까요? 좀 더 많이 팔기 위해서 돈 들여 광고까지 했지만, 도리어 광고카피의 대상이 되었던 차까지도 손가락질을 받았지요. 애꿎은 차가 ‘병신체’의 주인공 대신 희생물이 되었고, 제조회사까지도 욕을 먹었습니다.
이 지하철 광고카피의 문제를 다룬, 모 신문의 의식 있는 기자(중앙SUNDAY, 안혜리)는 아래의 말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우리도 같이 한번 생각해 보죠. 광고카피에 쓰이는 언어 하나도 우리의 삶과 의식에 크게 영향을 끼치는 데에서는 예외가 아니니까요.
...좋은 광고카피는 트렌드를 발 빠르게 포착할 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사회적 변화까지 이끌어낸다. 10여 년 전 앞만 보고 달리던 한국인들에게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며 가슴을 울리던 현대카드의 광고카피처럼 말이다...
* 이 글은 오는 7월 발간 예정인 졸저 <한국어 실력이 능력이다 - 업무 능력(NCS) 시대에서의 우리말의 힘>에 수록될 내용의 일부다. 출판사와의 협약에 따라, 이 글의 부분 또는 전부의 복사/전재 및 일체의 상업적 활용을 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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