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 남용과 외래어 오용(마지막 회)
○ ‘북소리(Booksori)’ 행사장에는 소리 나는 북이 없고, ‘어린 T를 벗자’엔 벗을 티셔츠가 없다 (2)
마지막 문제점이자 어쩌면 제일 중대한 문제일지도 모르겠네요. 이처럼 재미 삼아 해대는 ‘夜한 독서회’나 ‘어린T’와 같은 괴상망측한 탈법 조어는 우리 국어의 발전을 천 년 이상 후퇴시키는 일도 된다는 겁니다. 국어 발전사의 역행 또는 퇴행[退行. ①공간적으로 현재의 위치에서 뒤로 물러가거나 시간적으로 현재보다 앞선 시기의 과거로 감. ②≒퇴화(退化. 진보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감)]이라 할 만한 대사건이죠. 무슨 말이냐고요? 이러한 표기법을 그대로 두는 일은 신라 시대의 표기법, 곧 이두/향찰 시대로 돌아가는 일도 되기 때문이죠.
‘이두’란 말, 아실 겁니다. 좁은 의미로는 한자를 한국어의 문장 구성법에 따라 배열하고 토를 붙인 것을 뜻합니다. 문장을 표기할 때 우리 글자가 없어서 한자의 음(소리)과 훈(뜻)을 이용하여 적었는데요. 대체로 의미부(意味部)는 한자의 훈을 취하고 형태부(形態部)는 음을 취했지만, 그 표기 방식이 한문과는 달리 우리말 어순을 따른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신라시대에만 쓰인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아주 오랫동안 쓰였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초기 이두 표기의 일례로 <신라화엄경사경조성기>의 일부만 우선 보죠.
‘經成內 法者 楮根中 香水 散厼 生長 令只彌’은 ‘경을 이루는 법은 닥나무 뿌리에 향수를 뿌려서 생장시키며’로 읽히는데요. 어순 자체도 한문 투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국어의 어순이고, ‘經/法/楮根/香水/生長’과 같은 한자어를 제하면 나머지는 모두 우리의 고유어로 읽힙니다.
조선시대에 아주 유용하게 쓰인 이두로는 <대명률직해>가 대표적으로 꼽힙니다. 중국 법률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이두문으로 번역한 것이죠. 그중 일부번역문을 보면요. ‘萬一殘疾·老弱及妾妻子息·收養子息等乙 兩邊戈只 仔細相知疾爲良只’라 되어 있는데, 여기서 밑줄 그어진 부분들, 곧 等乙 → 들을(‘들’은 복수접미사), 戈只 → 이/이기(‘이’ 또는 ‘n’의 뜻으로 주격을 나타내는 말), 爲良只 → 하얏기(‘하였기/하여’와 같은 뜻) 등이 이두입니다.
이걸 보면 이두 표기 방식이 무엇인지 이해되시겠지요? 위에도 적었듯, 의미부(意味部)는 한자의 훈을 취하고 형태부(形態部)는 음을 취했지만 어순은 한문식이 아니라 대체로 우리말을 따른 것이 이두문의 특징입니다.
다시, ‘夜한 독서회, 유월愛, 어린T를 벗자’로 돌아가 보죠. 우리글을 표기하기 위해 그저 소리만 비슷한 한자나 영어 글자를 갖다가 끼워 넣었습니다. 그런 꼴이 이두문과 무엇이 다른가요? ‘夜한 독서회’는 ‘야하다’는 우리말을 발판 삼아서 거기에 발음이 같지만 밤을 뜻하는 듯한 한자 ‘夜’를 빌려다가 괴상한 우리말을 표기한 것이고, ‘어린T’ 또한 ‘어린 티’와 ‘티셔츠의 준말인 ‘티’를 결합시키고자 영어글자 T를 빌려 쓴 것이니 이두식 표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앞서 다룬 ‘북소리(Booksori)’는 이보다 한 수 더 뜬 이두식 표기랄 수 있습니다. ‘책’을 ‘북(book)’으로 굳이 표기하고, 거기에다가 우리말의 ‘북소리(sound of drum)’의 의미까지 얹으려 하다 보니, 그야말로 희한한 사생아 표기인 ‘Booksori’가 되었지요. 그 바람에 버젓한 우리말인 ‘북소리(sound of drum)’의 올바른 의미 전달이 방해되는 건 물론이고, 영어로 표기되었음에도 영어권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괴상한 말이 되어 버린 거지요. 비유하자면 윗도리 양복에 아래는 한복 바지를 입고 그 위에는 갓을 쓴 꼴이랄까요. 앞서 언급한 ‘보그병신체’와 이복형제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우리만 알아먹는 이두식 표기 탓에 그리된 겁니다. 외국인 손겪이(≒손님치레) 겸용으로 만든 듯한 말이 결국은 집안잔치용 꾸미개 오락물로 전락했다고밖에 볼 수 없는 일이 그래서 벌어진 것이죠. 하도 멋을 부리려 하다 보니 언어의 기본적 기능인 의사소통이라는 기능조차 날아가 버린 겁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천 년도 더 지난 과거의 이두식 표기라니요... 복고주의치고는 너무 지나친 거 아닐까요? 위에서 국어 발전사의 퇴행이라고 적은 것은 그 때문이랍니다.
게다가 이두문은 한글이 없어서 한자를 빌려다가 고유어를 표기했지만, 요즘의 괴상망측한 표기들은 버젓이 한글이 있음에도 얼토당토않은 한자나 영어 글자를 빌려 끼워 넣은 것일 뿐입니다. 똑똑한 조상님들이 창안해낸 이두식 표기는 뜻이라도 제대로 통하는데, 후손들이 만든 현대판 한자/영문 합작 이두문 표기는 뜻조차도 제대로 통하질 않습니다. 알고 보면 참으로 멍청한 후손들입니다.
이처럼 힘을 주어 험하게 이야기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요즘 일부 현상을 보면 이 이두문 표기에서 한발 더 후퇴/발전(?)하여, 아예 ‘군두목[軍都▽目] 시대’로 들어서고 있는 조짐까지 보이기 때문입니다.
‘군두목[軍都▽目]’이란 ‘본래 말이 한자어이든 우리말이든 가리지 않고, 그 표기에서 한자의 뜻은 상관하지 아니하고 음이나 새김을 취하여 물건의 이름을 적는 법. 또는 그런 식으로 적은 책*의 이름’이기도 한데요. 예를 들면 우리말 ‘괭이/등심/콩팥’을 각각 ‘廣耳/背心/豆太’로, 한자어 ‘지갑(紙匣)’을 ‘地甲’으로 적는 따위죠. 이두보다 한 발 더 ‘후퇴/발전’했다고 하는 것은 이 군두목에서는 아예 한자의 뜻은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 오로지 소리나 일부 뜻만 취해서 우리말을 적기 때문입니다. ☞[참고] 군두목[軍都▽目] : 1896년에 쓰인 편자 미상의 국어 어휘집. ‘군도목(群都目)’이라고도 한다. 1책. 필사본. 한어식(漢語式)의 물건 이름이나 또는 한자의 글자 뜻에 얽매임 없이 그 음과 새김을 따서 물건 이름을 적고 그에 대한 당시의 국어식 호칭을 한글로 병기해 놓은 어휘집이다. 물품 관리를 맡고 있던 서리/아전들의 실용서. 수록된 총어휘수는 1,130여개. 규장각 도서로 서울대 도서관 소장.
요즘 그런 ‘군두목식’ 표기가 상품명에는 물론, 온갖 광고, 심지어는 국가 기관의 행사명 표기에까지 쓰이고 있습니다. 아래의 몇 가지 예를 보지요.
...秀타일과 함께 간다; 色視美 있는 옷; 난리蘭 여름 특상; 강안비뇨기과; 神데렐라 의원; 청소년을 위한 k픽션 book 톡 콘서트(국회); 툭 터놓고 톡(talk)하실 분들을 초대합니다(국방부 국민토론회 안내문)...
외국에서 한국어를 공부한 외국인이라면 아마도 위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사람이 거의 없을 겁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도 그런 분이 계실지 모르니, 간단한 설명을 보태면요. 각각 ‘秀타일 ←스타일; 色視美 ←섹시미; 난리蘭 ←난리 난; 강안 ←강한; 神데렐라 ←신데렐라; book 톡 ←책 이야기; 톡(talk) 하실 분←이야기하실 분’으로 풀이됩니다.
이 중에서도 ‘난리蘭 여름 특상’은 ‘난초 무늬가 들어가서 인기인 여름 특별 상품’의 준말이라네요. ‘강안’은 ‘강안남자’라는 소설로 알려진 ‘강한 남자’에서 온 말이고요. ‘신데렐라’를 ‘神데렐라’로 표기한 건 어느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성형 수술로 사람들이 전혀 못 알아볼 정도로 외모를 바꾼 뒤 이름도 ‘神데렐라’로 하고 벌린 복수극이 유명해져서 거기서 따온 거랍니다. 국회와 국방부에서 신이 나서 사용한 ‘톡’이라는 표기는 영어 ‘talk’를 줄인 것인데, 올바른 외래어 표기는 ‘토크’죠.
외래어 표기 하나 제대로 챙길 줄 모르는 사람들이 국록을 받아먹고 있는 나라라서 우리는 슬퍼하지만, 그들은 즐거워합니다. ‘톡’이라는 신어 발굴의 성과(?) 앞에서요. 걸핏하면 자기들끼리 그토록 박수치기로 즐거워하던 만화 영화 속의 텔레토비들이 떠오릅니다.
이런 조어법에 무임승차해대는 이들은 한자나 영어 글자를 써서 비틀면 이른바 뭔가 ‘있어 보이는’ 그런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보그병신체’가 횡행하는 근저에는 그런 착각을 뒷심 삼고 있듯이 말입니다. 아니면, 대다수에게 무관심이 주식(主食)이 되어가고 있는 시대를 탓해야 할까요?
어떤 경우든, 이제는 집단적으로 무식(無識)을 포용하고 눈감아주는 저의식 시대의 틀을 깨고 나와 깨어 있는 얼이 살아 있는 의식 지대로 돌아와야 할 것입니다. 정신을 차려서 하루바삐 한글 제자리 찾아주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만 할 것입니다. 그것도 시급히요. 요즘의 ‘이두식’ 표기나 ‘군두목식’ 표기는 정녕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추태일 뿐이니까요.
버젓한 우리 한글이 있는데도, 우리 문자가 없어서 한자를 빌려다 썼던 그 어둡고 창피하던 시절로 알아서 제 발로 돌아가서야 되겠습니까. 한쪽에서는 우리 한글의 우수성을 자랑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널리 알리려고 기를 쓰고 있는데 말입니다. 최초의 컴퓨터 한글 서체 개발로 떠들썩했던 시절도 이미 30여 년이 되어가는 이 초현대 한글 시대에 이두식 표기라니요. 심하게 말하면 최신형 양복을 싹 빼 입고 거기에 갓을 쓰고서 멋도 모르고 으스대는 짓과 다를 바 없는 일입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처음부터 과학적으로 창제된 문자는 우리 한글밖에 없습니다. 나머지 문자들은 죄다 오랜 시간에 갉히고 긁히며 다듬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갖춰 진 것들인데다, 과학적인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모두 다 처음에는 그저 소리를 표기하기에 급급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도형문자/상형문자/표의문자 등의 꼴을 갖춰 간 것들이죠.
처음부터 꼴을 제대로 갖춘, 완성형 문자로 태어난 유일한 문자가 한글이랍니다. 그러니 꼬부랑글씨와 단음절 한자 하나 따위에 혹해서, 우리 문자가 없어서 남의 문자를 빌려다 쓰던 시대의 수법으로 돌아가, 그처럼 빼어난 우리의 한글을 하대하는 그런 창피한 짓을 앞장서서 해서야 쓰겠습니까?
[덤] ♣ ‘노다지’는 외래어가 아니다
♣‘노다지’는 영어의 ‘노타치(no touch)’에서 온 말인가? : 정설이 아님.
[설명] ‘노타치’ 설은 민간 어원에 불과하여 믿을 수 없다. ‘노다지’의 ‘노다’는 ‘노두(露頭)’일 가능성이 있는데, ‘노두(露頭)’는 ‘광맥/암석/지층/석탄층 따위가 땅거죽에 드러난 부분’을 가리키므로, ‘광물이 묻혀 있는 광맥’을 뜻하는 ‘노다지’와 의미상 관련된다. 하지만, ‘노다지’의 ‘노다’를 ‘노두(露頭)’와 관련시켜 이해한다 해도 ‘지’가 무엇인지는 잘 알 수 없다. ‘지’를 한자 ‘地’로 보기도 하고 접미사로 처리하기도 하나, 한자 ‘地’나 접미사 ‘-지’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 만약 한자 ‘地’로 본다면 ‘노두지(露頭地)’는 ‘노두(露頭)가 있는 땅’으로 해석된다. (출처: 21세기 세종계획 누리집, 한민족 언어 정보화, 국어 어휘의 역사)
노다지1? ①<광>캐내려 하는 광물이 많이 묻혀 있는 광맥. ②(비유) 손쉽게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일감.
노다지2? ‘언제나/노상’의 잘못. ¶노다지(x)/언제나(o)/노상(o) 되풀이되는 같은 핑계.
* 이 글은 근간 예정인 책자에 수록될 내용의 일부다. 출판사와의 협약에 따라 이 글의 부분 또는 전부의 복사/전재를 통한 일체의 상업적 활용을 금한다.
문장부호 개정안 해설 : 문장부호 위치와 문장부호 뒤에서의 띄어쓰기 (0) | 2015.08.02 |
---|---|
문장부호 개정안 해설(2) : 주요 개정 내용. 신설된 내용을 중심으로 (0) | 2015.07.23 |
○ ‘북소리(Booksori)’ 행사장에는 소리 나는 북이 없고, ‘어린 T를 벗자’엔 벗을 티셔츠가 없다 (0) | 2015.07.05 |
외국어 남용과 외래어 오용(6) : 객지에 나와서 고생하는 영어와 '보그병신체' (0) | 2015.07.02 |
왜 ‘너무’를 애용하면 면접에서 낙방까지 되는 걸까 (0) | 2015.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