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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穗談]동요를 흥얼거리는 중년 치과 의사

[내 글] 수담(穗談)

by 지구촌사람 2011. 12. 9.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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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요를 흥얼거리는 중년 치과 의사

 

   그끄저께 점심 식사 때다. 김밥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뚝 소리가 났다. 입안에서 큼지막한 이물질 하나가 씹혔다. 꺼내 보니, 내 어금니 보철. 정확히 말하자면, 제2대구치(大臼齒)* 임플란트의 크라운(보철) 부분. 허걱!

  [주: 어금니는 방석니라고도 하는데, 사랑니까지 한쪽에 3개. 의학용어로는 대구치(大臼齒)라고 하는데, 큰 절구라는 뜻. 어금니 모양과 기능을 보고 붙인 듯하다. 사랑니는 그러므로 제3대구치가 된다. 영어로는 '지혜의 이 (wisdom tooth)'라고 하는데, 사랑니가 돋아야만 비로소 철이 든다는 생각에서 나온 재미있는 이름이다.]

 

  점심을 먹다말고 이천 시내로 뛰어갔다. 마침, 하루에 몇 편밖에 없는 버스 시간표도 나를 도와줬다. 시내의 부부 치과 의사 둘이서 문제의 내 파편(?)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하는 말. ‘이건 보철 부분 단순 이탈이 아닌데다, 우리가 다뤄보지 않은 거라서 시술하셨던 곳으로 가셔야겠네요.’

  허거걱! 그럼 당진으로 가야한단 말인가. 이제는 정말 먼먼 나라가 된 그곳으로??

 

                                                        *

  내 이(齒)들은 겁 없는 주인을 잘못 만나, 사연도 많고 고생도 많은 불쌍한 녀석들이다. 문제의 첫 단추부터가 그랬다.

  69년도인가. 고교 3년을 굳이 다 다닐 필요가 있는가 싶은 건방진 생각으로 고2 늦봄에 대책 없이 학교를 때려치우고 빈둥거리다가 그해 여름 검정고시에 덜컥 붙고 나서야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정말 겁도 없었던 것이, 그해 입시를 넉 달인가를 앞두고 느닷없이(그리고 무례하게도) 전과목 입시로 바뀐 공산당 대학(교표에 들어 있는 그 학교의 약자 표기가 ‘ㄱ ㅅ ㄷ’ 라서 일부 재학생들은 그렇게도 불렀다. 한자 의미로만 보자면 참으로 멋진 말인데, 하면서)을 공격 목표로 삼았던 터였다.

 

  그러고 나서, 보따리를 싸들고 내려간 곳이 우리 엄니가 살림살이 대부분을 뒷바라지해 온 덕분에, 무시 출입과 이용이 가능했던 집근처의 조그만 암자. 거기서 머물고 있을 때, 내 앞니가 첫 시련을 겪었다.

  예비군 훈련이 문제였다. 당시 경계훈련이었는지 뭐였는지는 모르지만 경계 지역을 바꾸어 타동네에 배치된 시내 출신들이 그곳 암자에 와서는 하라는 경계는 안하고 술타령을 했던 것. 게다가, 70대 고령인 스님 내외분만 있는 게 눈에 보이는데도, 안주가 모자라니 내놓으란 둥의 인간말짜 행패들까지 부렸고, 그 꼴을 본 혈기 방장한(?) 내가 가만있을 턱이 없었다.

 

  행패를 그만 두라는 훈계(?)가 술 취한 개들에게 먹힐 턱이 없었고, 1:3의 싸움판이 되었다. 당시 방에서 나와 마루에 서 있던 나의 지형적 이점에다 그들에게서 빼앗은 목총(당시는 예비군 훈련 때 실전 총기가 아닌 목총을 지급했다. 총이 없어서...) 하나를 들고 대적했고, 그들을 제압했다. 하지만, 그 전투(!) 중에 적군(?)의 목총에 스친 내 앞니 하나가 버듬하게 돌출하는 사고가 발생했지만, 당시는 그걸 몰랐다. 그저 부어오른 입술 근처가 얼얼했을 뿐.

  한참 뒤에야 거울을 들고 문제의 치아 지역을 직시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코앞의 예비고사야 문제가 아니었지만, 본고사 역시 겨우 석 달 앞이었다. 지금도 약간 흑황색으로 변색된 채 조금 뒤틀려 있는 대문니 하나가 바로 그 주인 잘못 만나 고생하고 있는 주인공이다.

 

  두 번째의 수난은 군대 시절에 겪었다. 역시 남의 일에 끼어들기가 문제였다. 같이 ROTC를 하던 동기 하나가 내가 가끔 들르는 부대에서 근무 중이었는데, 휴일이던 그날도 그냥 지나치기가 뭐해서 들러봤다.

  연병장에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가보니, 수송관(상사)과 주번사관인 내 동기가 엉켜 있었다. 싸움판. 술이 잔뜩 취한 수송관이 각목을 들고 장교에게 벌이는 하극상이었고, 나는 내 지프차 급유를 위해 가끔 들르곤 해서 낯이 익었던 상사가 날 알아보겠거니 싶어서 뛰어 들었다. 내 동기를 향해 엉터리 겨눔으로 춤추고 있던 각목의 춤사위 속으로.

  그날 이후, 수송관은 나를 몇 번이나 자신이 잘 안다는 인근의 사단치과로 이끌었다. 내내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 뒤로 그 동안 내내 멀쩡하던 내 입안에는 치과 보철 하나가 떡 하니 자리 잡고 있게 되었다.

 

                                                          *

  세 번째 사건은 여인 때문에 일어났다. 2001년이었던가. 어금니가 시큰거린다 싶어서 인근 병원의 치과를 찾았다. 진료대에 얌전하게 누워 있던 나에게 자신을 치과 과장이라 소개한 여인은 내 이를 보더니, 아 이거 뽑아야겠군요, 하더니만 즉시 결행했다. 입이 여의사의 손으로 벌려진 채여서 뭐라고 말도 할 수 없는 나의 의견 따위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이.

  발치용 기구를 들고 조금 해보더니 안 되겠다 싶었던지 내 허벅지 위치에 여인의 무릎이 올라갔고, 여인이 잠시 힘을 쓰자, 내 안쪽 어금니(제2대구치)가 뽑혀 나왔다. 그때다. 내 허벅지를 누르고 있던 여인의 무릎 관절뼈가 내 근육 일부를 씹는다고 할 정도로 강하게 압착하는 바람에 내 입에서는 ‘억’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엄살 부리지 말라는 여의사의 농담 겸 위안을 흘려들으며, 나도 모르게 진료복 아래로 보이는 여인의 허벅지 쪽을 돌아보았다. 낯익은(?) 허벅지. 내 허리통만 해서 뇌리에 확실한 그림으로 남아있던 그 허벅지였다.

 

  1980년이었던가. 내가 밖에서 머물 때인데, 그때서야 조금 철이 들려는지 사랑니가 솟기 시작했다. 아팠다. 처음에는 시큰거리는 정도였는데 갈수록 통증이 심했다. 할 수 없이 병원을 찾았다. 외국인 진료는 어떻게 해도 맘에 안 들어서 웬만한 것들은 참아두었다가 귀국 후에 손보곤 하던 시절이었다.

  나를 손본 여인은 영국의사였는데, 그녀가 진료실에 입장하는 순간 문이 꽉 찼다. 다리통 하나가 내 허리통만 했다. 그런 허벅지가 내 허벅지를 완벽하게 압착한 상태로 내 사랑니가 뽑혀 나갔다. 뿌리가 옆으로 누워서 그걸 자르고 나서야 겨우 뽑을 수 있었다는 그녀의 씩씩한 전과(戰果) 자랑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녀의 허벅지에 눌려있던 내 불쌍한 허벅지가 하도 아파하는 바람에.

 

  그리고, 20여 년이 지난 뒤, 그 무지막지하게 실했던 허벅지와 꽤나 닮은 한국의 치과 여의사에게 또 다시 내 허벅지가 수난을 겪었다. 어금니가 그렇게 억울하게 뽑혀나갔지만, 나는 어금니 대신 내 허벅지를 위로했다.

  (억울하다고 적은 것은, 나중에 알고 보니 뽑지 않아도 될 어금니였다. 집사람은 내 것보다도 더 상태가 나빴는데, 그걸 친절한 노의사가 뽑지 말고 살려보자고 했고, 지금까지도 멀쩡한 편.)

 

                                                     *

  그처럼 억울하게 수난을 당한 내 치아들이 가만 있었을 리 만무. 십여 년 전 스케일링을 하러 치과에 들렀을 때 이 치료를 권유받았지만, 1주일에 한 번꼴로 와서 1년 정도는 다녀야 한다나. 도저히 그처럼 시간을 낼 수 없는 처지여서 그 말을 흘려들었다.

  그러다가, 큰 맘 먹고 치료를 시작했다. 1주일~10여 일 간격으로 1년 반을 드나들면서. 죄 없이 뽑혀나간 것들에겐 임플란트를, 이틀 전체가 비틀리는 바람에 이런저런 고생을 해오느라 작은 충치까지도 생긴 것들에게는 보철을 했고, 잇몸 23개인가를 치료했다. 거기에 무슨 무슨 치료가 보태졌지만 까먹었다. 돈도 꽤 들었다. 10여 년 전엔 삼백만 원 정도의 견적이었던 것 같은데, 그 다섯 배가량 들었지 싶다.

 

  문제가 거기서 끝난 게 아니다. 두 번째의 임플란트가 말썽을 부렸다. 씹을 때 맞닿는 부분에 이물감이 느껴질 정도로 정착(定着) 과정이(임플란트 시술 후 잇몸에 제대로 자리 잡는 것. 높이와 간격 등이 기존 치아와 문제없이 공존할 수 있게 되는 과정) 순조롭지 않았다.

  시술 병원을 찾았지만, 문이 닫힌 상태. 몇 주일을 수소문한 끝에 그 치과가 의료사고를 내고 야반도주한 상태라는 걸 알았다. 그곳도 여의사가 원장이었는데(지금까지와는 달리 키도 늘씬한), 남편은 그와 정반대로 꼭 두꺼비 같이 생겼고, 대하는 태도나 어투는 용모답게 딱 인상파였다. 그런 그녀의 남편이 고용의사를 채용하여 시내의 다른 곳에 치과를 낼 정도로 돈 욕심을 낸 게 발단이었다.

 

  이걸 어쩌나. 임플란트는 우리가 섣불리 아는 것과 달리 그 종류만 수십 가지가 넘고 사용 부품도 제각각인지라, 시술 병원이 아니고는 애프터서비스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더구나, 자칫하면 덤터기를 쓰게 될 그런 뒤처리를 선뜻 맡아해 줄 치과도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러다가 찾은 곳이 당진버스터미널 앞의 <경희치과>. 치과의사 몇 사람이 합동개원한 곳인데, 그곳에서 구세주를 만났다. 최세훈 박사. 40대 초반의 젊은 의사. (의사는 기본적으로 전문의 취득까지만 해도 11년이 걸린다. 그리고, 그 이후 한두 군데의 대형 병원에서 최소한의 임상 경력을 쌓고, 이런저런 특수 과정 등을 이수하고 나면 고교 졸업 후 빨라야 15년이고 군복무까지 더해지면 17~8년이 걸린다. 하여, 의사로서 40대 초반이면 아주 젊은 축에 든다.)

 

  그가 그런 골칫거리를 선뜻 맡아서 해결해 주었다. 다행히도 임플란트 두 개 중 하나는 자신들이 사용하는 재료를 사용했고, 시술방법도 같은 것이어서 도와줄 수 있겠다면서.

  그렇게 해서 새로 임플란트를 하지 않고도 기존 시술품에 구멍을 내어 나사 조이기만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그것이 작년 2월의 일이다. 당진에서 파주의 처갓집 근처로 이사 오기 두어 달 전.

 

  이번 사고는 대형 사고였다. 시멘트 처리만 해서 다시 붙여주기만 해도 되는 보철 부분의 단순 이탈이 아니라, 보철 부분을 받혀주는 기둥(그걸 임플란트에서는 fixture라고 부른다)이 중간에서 부러진 것이다. 10톤 이상의 무게도 견딘다는 티타늄인데... (게다가, 내가 바위를 씹어 먹은 것도 아닌데)

  암튼, 그런데도 최 박사는 구세주였다. 기둥 모자(캡) 부분 아래의 중간에서 부러진 그 까다로운 녀석을 해체기구를 사용해서 뽑아내고는 새로 박아줬다. 그뿐이 아니다.

 

  내가 하루품을 들여 당진까지 내려온 것과, 주소지는 파주지만 이천에 임시 거처하고 있다는 것들을 새겨들은 그는 친구와 아는 이들이 파주와 일산에도 있으니 어느 곳을 추천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앞으로 보철 완료까지 최소한 3번은 더 와야 하는데 당진까지 이렇게 오갈 수는 없지 않겠느냐며.

  내가 일산을 택하자, 집에 가 있으면 동료 의사에게서 연락이 갈 거라고 했다. 그리고... 새로 해 넣은 기둥(fixture) 값은 물론 처치비 하나 받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치과에서 내려와 점심을 먹고 있을 때, 그가 연락/의뢰한 친한 친구의 치과에서 전화가 왔고, 주말의 토요일 진료를 예약했다.

 

  그는 작년 봄에, 내가 문제의 발단이 되었던 당진의 그 ‘문제 치과’ 이야기를 꺼냈을 때, “의사들이 그러면 안 되는데...“ 소리만 했다. 그리곤 남들이 기피하는 타의원 시술 임플란트를 손봐줬다. 그리고, 이번 또다시 나를 감동시켰다. 이번엔 동요까지 곁들여서...

  부러진 부분이 까다로워서, 해체한 뒤 그걸 들고 나가서 검토하느라 제법 시간이 흐른 뒤 진료실에 다시 들어온 최 박사는 기구를 찾으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가만히 들어보니 <아기염소>였다. ~아기 염소 여럿이 풀을 뜯고 놀아요, 해처럼 밝은 얼굴로~~ 부분이었다.

 

  당진을 떠나오면서, 그 치과 건물을 한참 올려다보았다. 40대 중년 의사가 동요를 부르는 치과. 최박사의 콧노래가 건물 주위를 감싸고 너울거리고 있었다. 그의 나이로 보아 학교에서 그 노래를 배웠을 리는 없으니, 집에서 아이들과 노래하면서 곡조만 익혔을 것 같았다. 그것도 여러 번 해서 저절로 몸에 배여,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릴 정도로...

  아이들과 함께 노래 부르는 아빠. 의사로서가 아니라 그런 아빠로 아이들에게 평생 기억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내 가슴이 따뜻하게 또 한 번 덥혀져 왔다.

 

  멀어져 가는 건물에 대고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 최 박사님, 고마워요. 멋져요. 정말 정말 멋진 남자.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주위를 따뜻하게 덥혀주는 남자... 참, 나도 동요 무지 좋아해요. 요즘 아이들의 명곡으로 꼽히는 그런 것들로요. 내 애창곡1번 세트 품목이 동요들이어서, 저는 가사까지도 죄다 꿰고 있긴 하지만요. [9 Dec. 2011]

 

[사족] 동요는 맑고 밝다. 그리고 보통 빠르기가 주. 우리 삶에서 지향해야 하는 것들과 딱이다.

          나는 요즘 노래들은 아예 꽝이다. 전혀 모른다. 가수도 곡명도 곡조도... (심지어 가수들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는 건 기본(?)이고, 그룹인지 뭔지도 모른다.) 

 

          노래들이 쥐어짜는 듯한 게 기피 사유 1번이고, 가사도 하나 맘에 들지 않는다. 그 경망함  

          과  부박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우려되는 건 전염력이다. (그걸 자주 듣는 이들은 그걸

          지극히 정상적인 것 - 정상적인 삶의 일부-으로 여기고,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노래

          가 주는 영향은 교사들이 목 터지게 가르치는 것보다 더 효과가 깊고 넓고 높다. 어른들도

          거기서 예외가 아니다.) 

 

          게다가, 아 좋고 좋은 노래들이 지천인데, 굳이 신경 쓰이는 노래들에 낼 시간도 없다.

          나처럼 뒤늦게라도, 어른들이 '빛나는 동요들'에 눈길을 보내게 되길 염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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