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오줌싸개 참기에 얽힌 참담한 기억들

[내 글] 수담(穗談)

by 지구촌사람 2011. 5. 29. 06:09

본문

728x90
반응형
SMALL

 

 

 

산이슬, 이사 가던 날


 

                    오줌싸개 참기에 얽힌 참담한 기억들


  요즘 우리 귀염둥이 진이가 반항을 한다. 것도 아주 요상한 방법으로. 다른 게 아니라, 옷에다 쉬야를 해댄다. 제 어미가 다시 일을 시작한 뒤로 유아원에 보내게 되었는데, 가기 싫다며 적지 않게 앙탈하는 걸 떼어 내어 보내게 되면서부터다.

  장모님이 인근으로 이사 오셨지만 아이와 씨름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뻔한 터. 해서, 싫다는 녀석을 오후 중간쯤까지만 유아원에 보내고 그 뒤 시간만 보살펴 주십사 했는데, 녀석은 거기서 아주 다급하게 되었을 때야 선생님께 얘기하는 바람에 예비로 넣어 보내는 옷까지도 적셔대는 일이 잦다. 그 바람에 어느 때는 속옷도 없이 남의 아이 여벌 반바지만 걸치고 올 때도 있다.


  녀석이 집에서는 그런 법이 없다. ‘쉬통’으로 부르는 진이 변기가 거실 한 편에 놓여있는 덕분이기도 하지만 마지막 순간이 되어 다급해 하도록 미루는 일이 드물기도 해서다. 그런데, 유아원에 가면 그런저런 사정이 바뀌는 탓인지, 아니면 쉬를 가지고 제 나름대로 반항하는 것인지, 우리가 참으로 난감해 하는 상황을 자주 만들어 가지고 돌아온다.

  그럴 때면 내 생각이 난다. 어디 가면 사정 모르는 사람들 입에서 진이가 나를 빼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을 정도로 닮은꼴이어서 기쁘기도 하지만, 옷에다 쉬하는 것까지 닮았는가 싶어서 속으로 중얼거린다. 저 놈이 진짜로 나를 닮았나. 그럴 때면 내가 어디 가서 실수해놓고 나중에 슬쩍 데려온 건 아닌가 하는 주변 사람들의 농담이 진짜인 것만 같아진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그래도 나는 많이 기쁘다. 그리고 무척 걱정도 된다. 나의 얼룩진(?) 과거들 때문이다.


                                              *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야뇨증이 있었다. 잠자리에다 속수무책으로 지도를 그리는 거 말이다. 잠이 깨고, 제 누운 자리가 축축해진 것을 알게 되고 나면 얼마나 민망한 일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1-2학년 때까지는 그 사건 횟수가 잦아서 키를 뒤집어쓰고 소금을 받으러 간 일도 있다. 그 일은 지금까지의 내 삶에서 아는 이들에게서 겪었던 가장 면구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뒤로 조금 뜸해지기는 했지만, 남의 집에 가서 자거나 그 다음 날 중요한 일이 있어서 좀 긴장을 하게 되면, 그때마다 영락없이 <싸나이> 체면을 확 구겨버리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그거 한 가지만 빼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그럴 듯한 평판에다 허우대도 멀쩡한 놈이었는데 말이다. 내 생각이었을 뿐이긴 하지만.


  초등학교 5학년이 지나고 나서부터는 그게 소식도 없이 사라졌다. 아마 거웃이 하나 둘씩 돋아날 때였을 거다. 아무래도 진짜로 <사나이 비스무리하게> 커가니까 그때부터는 하느님이 좀 봐주셨는지도 모르겠다.

  암튼, 그런 것도 부전자전인지 둘째 녀석이 초등학교 시절 나와 비슷한 증상을 보였다. 그때 잔뜩 주눅 들어있던 아들을 불러다가 귓속말을 해줬다.

  - 야, 아들! 걱정마라. 이 아빠는 자그마치 5학년 때까지 그랬지만, 지금은 <암시렁토> 않다. 걱정 마라, 그거 다 세월이 지나면 해결되는 거여.

  그때가 아마 녀석이 초등학교 3학년쯤이었을 게다. 그런데, 내 엉터리 도닥임이 효과를 본 것일까. 그 뒤로는 거짓말처럼 멀쩡해졌다.


                                                   *

  그런데, 속수무책으로 민망해지곤 하는 내 <쉬>의 문제가 그 뒤로 아주 말끔히 사라진 건 아니다. 밤에 슬며시 요에 지도를 그리는 야뇨증 대신에 멀쩡한 대낮에 오줌을 참지 못하는 형태로 변형되었다. 즉, 오래 오줌을 못 참는 편이고, 급해지면 더욱 참지를 못하게 된 거다.

 

  때는 바야흐로 1970년 1월의 중턱 아래쪽. 대학 입시 날만 되면 잊지 않고 꼬박꼬박 극성을 부리는 날씨는 그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꽤 추웠다. 해서 잔뜩 옷을 껴입고, 거기다가 속으로 추위 타지 말라고 건네준 커피 한 잔까지 마다하지 않고 마신 뒤, 호기롭게 집을 나섰다.

 

  커피까지 마신 게 은근히 걱정이 되긴 했지만, 다행히도 시험 전후의 휴식시간이 20분씩이나 되었다. 바지런히 화장실을 챙긴 덕분에 무사히 오전 시험을 치렀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험을 잘 봐서가 아니라, 화장실 문제로 발 동동 구른 일 없이 무사히 넘어간 게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남들이 들으면 웃기는 일이었지만 내게는 그 이상 더 중요하고도 심각한 문제는 없었다.


  오후 시험. 밥을 싸오면 식는다고 미리 보아두었던 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먹이는 정성을 보인 큰누나가 (나하고는 십 몇 년 차이가 나는데다 시골에서 늘 공사다망하신(?) 우리 엄니를 대신하여 서울 생활의 대모 역할을 매섭게 해내고 있던 분이었다.) 별 생각 없이 보온병에 넣어온 커피를 권했다. 나는 그걸 받아 마시고 학교로 오기 전에 화장실에 들렀다. 그리고 교실에 들어오기 전 다시 한 번 더 학교 화장실에 들러 불시의 사건에 대비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람. 시험지를 나눠주기 시작하는데 아랫배에 이상한 신호가 오기 시작하는 거 아닌가. 잽싸게 손을 들고 애타게 외쳤다.

  - 선생님. 지금 화장실에? 다녀오면 안 될까요? 저는 아직 시험지를 안 받았는데요.

  선생님의 대답은 단호한 부정이었고, 내 오금이 저려오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다. 시험문제와의 씨름이 문제가 아니었다. 걷잡을 수 없이 밀려오는 방광의 팽창압을 압박 저지하는 일이 내게는 더 급했다. 허벅지를 꼬집던 손은 꼬추까지도 꼬집었지만 별무소용이었다.


  나중에는 강의실 마루바닥을 발로 구르며 낑낑거렸다. 그 소리 때문에 내가 쉬통(방광)과의 사투를 치르고 있다는 걸 주위 수험생들도 다 알게 되었고, 옆에 와서 지켜보던 감독관은 수건을 꺼내어 내 이마의 땀방울을 닦아주며 조력했다. 조금만 참으라며. 하지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시험지를 팽개치다시피 하고는 교실문을 닫을 생각도 못한 채 일층에 있는 화장실로 내달렸다.

  쿵쾅거리는 소리가 온 교실에 다 들렸다. (그때는 학교 건물들이 지금처럼 관악산 한 곳에 몰려 있지 않고 단과대학별로 이곳저곳 흩어져 있을 때였고, 강의실 바닥은 목재마루판인 곳도 흔했다.)


  화장실에서 시원하게 소원풀이를 하고나자, 속절없이 그리고 대책 없이 눈물이 나왔다. 닦을 생각도 못하고 건물 밖으로 나오자 큰누나가 퍼런 얼굴로 다가와서 다급하게 물었다.

  - 얘, 어떻게 된 거냐. 쫓겨난 거냐?

  시험을 보다말고 나왔으니 부정행위로 쫓겨난 줄로만 여길 만도 했다. 게다가 채 닦지도 못한 눈물 방울까지 매달고 있었으니.


  내 눈물. 그건 억울해서였다. 문제를 다 풀지도 못하고 나왔으니 그거야 당연한 소리겠지만, 내게는 특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과목은 내가 제일 자신 있었던 영어시험이었고, 나는 겨우 문제의 삼분지 이 정도만 간신히 쓰고 나왔던 것이다. 게다가...... 나는 그 시험에 목숨을 걸고 있었다. 정말이었다.

  고교 2학년이 되자, 나는 학교 3년을 다 채울 필요가 없다는 호기를 앞세워 친구들에게 큰소리를 치며 학교를 중퇴했고, 다행히 그 해 검정고시를 통과하긴 했다. 그런데, 가려고 맘먹고 있던 <대핵교>가 입시 과목을 전과목으로 바꾸겠다고 9월이 가까워서야 덜컥 발표하는 게 아닌가.?


  이걸 우짤꼬. 예년처럼 다섯 과목만 준비하던 나는 어영부영 설렁설렁 했다. 10월 중반이 되어서야 다급해진 나는 까짓거 죽기 살기로 한번 해보자면서 고향의 절간으로 보따리를 싸들고 내려갔다. 그리고 보따리를 풀고 앉아 다짐하기를, 내 이노무 학교 떨어지면 이 절간의 똥간에 고개를 박고 죽으리라고 내 자신에게 겁을 줬다.

  (산골 절간의 해우소. 그건 대개 후미진 쪽에 있게 마련인데, 내 머물던 곳의 그것은 하필 절벽처럼 생긴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화장실 널빤지 사이로 보이는 바닥과의 높이는 까마득하기만 했다. 죽어도 왜 하필 그런 험악한 곳에다 고개를 박고 죽겠다고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되게 웃긴다. 그리고, 얼마나 무모한 호기였던지 지금도 그걸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런 처지였다. 그러니, 나는 앞이 까마득했다. 아, 이거 겨우 나이 스물을 넘기자마자 죽어야 할 것인가.

  그런데, 이게 워쩐 일이랴. 발표 당일 오후가 되어 어슬렁어슬렁 학교에 도착하여, 선배들이 교문에서 건네주는 대학신문을 받아들고 보니, 아! 내 이름 석 자가 있는 거 아닌가. 하늘이 도운 거였다. 마치, 내 쉬통을 관장하는 삼신할미와 몹시도 친한 양반이 하늘에 있는 것만 같아서 나는 싱긋 웃었다. (그 당시 내 수험 좌석은 뒤에서 두 번째였고, 내 뒤에는 진명여고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앉아 있었다. 쉬를 못 참아 별별 짓을 해대는 내 모습을 수험중에 간간이 쳐다보았던지, 나중에 동기생으로 입학해서 그 얘기를 과 친구들에게 공개하는 바람에 나는 또 한 번 얼굴을 붉혀야 했다. 0양기(良基)라는 여학생이었는데 흔하지 않은 한자인데다 한글 발음이 여간 우스운 게 아니었던 그녀는 나이 사십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했다. 천도명복을 빈다.)


                                                  *

  내 통제를 벗어나는 방광압의 팽창 사고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중요한 자리 때마다 내 꼴을 아주 손쉽게 뭉그러뜨리곤 했다. 때는 그때로부터 몇 해를 격한 1977년 1월. 나는 서대문에 있던 고정 국가고시장인 국제대학 건물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행정고시 2차 시험장.

  (내가 한때 행정고시 준비를 했다는 사실은 지금도 가까운 몇몇 사람들만 안다. 그 만큼 얼결에 시작했던 일이고, 쉽게 마무리 지은 일이기도 하다. 군대에서 비교적 편한 자리에 있던 나는 어느 뇨자로부터 교수 같은 거 하지 말고 --- 그때는 내가 꿈꾸고 있던 교수 자리나, 그녀의 아부지였던 초등학교 교장이나 살림살이 어려운 건 엇비슷할 때였다 --- 고시공부를 해보는 게 어떠냐는 꼬임에 넘어갔던 거다. 뇨자한테 무조건 잘 보이고 싶을 때였다. 그렇게 해서 느닷없이 전공과는 생판 관련도 없는 민법총칙이니 행정법이니 하는 걸 군대에서 집어 들었다. 여름철에 제대를 하고 나서 가을에 치른 일차 시험도 요행 내 편이었다.)

  그렇게 해서 기본서를 겨우 한두 번씩 읽고 나서 시험문제나 알아보자고 겁 없이 달려든 게 그 2차시험이었다.


  그런데 시험이라는 게 어디 그렇게 가벼운 건들이기의 대상인가. 명색이 그래도 행정고시라면서 <고시>자가 붙은 국가고시인데...... 국가고시라면 운전면허 시험 같은 데서조차도 긴장한다지 않는가. 게다가 그 만년 고정 고사장이었던 국제대학은 난방이 부실하기로 유명했다. 시험장이 추우니 외투를 두툼하게 입고 오라고 수험생 유의사항에 적혀 있을 정도로.


  무슨 과목 시간이었던지 생각도 안 난다. 아무튼 경험 삼아 치르기로 작심했음에도 시험지를 받자 제법 그럴 듯하게 써야 한다는 쓸데 없는 오기가 나서, 무척 낑낑거리며 썼다.

  그러던 중간이었다. 예의 그 쉬통 압력이 급격하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화장실 출입은 당연 금기. 그리고, 그런 시험은 쉬통 해결 문제가 발생하는 게 나 같은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건 아니었던지, 그 해결책을 질문하자 감독관은 교실 뒤쪽에 깡통이 있으니 거기에다 해결하란다. 아쿠야. 시험장 안에는 드문드문 여학생들도 있었는데.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부끄러움에 둔감해지던 나이였을까. 아니면 방법이야 어쨌든 그걸 해결할 수 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나는 흑설탕 깡통만 한 통을 들고 서서는 쩔쩔쩔 소리를 냈다. 아주 여유 있게 그리고 흠흠 소리까지 곁들이면서.

  그렇지만 아무도 뒤를 돌아보거나 그런 내 모습을 힐끔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암. 머리통들이 커져서였을 게다. 암암.  (이 고시장에서의 소변 해결 방법에는 남녀의 구별이 없다. 과목당 두어 시간이 걸리는 시험인데도 그런 구시대적인 방법을 고수해왔다. 그러다가 여러 해 뒤, 어느 여성 한 분이 남자들이 대부분인 교실 안 뒤쪽에서 치마를 내리고 해결해야 하는 그런 수모를 겪고 나서 헌법소원을 냈다던가. 지금쯤은 개선되었을 것으로 본다.)


                                                *

  깨끗한(?) 얘기가 아니니 하나만 더 하고 얼른 마무리해야겠다. 십여 년 전 중국에서 벌였던 사건이다.

  중국의 서쪽 끝에 신강성이 있다. 얼마 전 큰 지진이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기도 했던 곳으로, 우리가 흔히 위구르족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집중해서 산다. 우르무치가 성도(省都)다. 같은 중국인이면서 죽기 전까지 그곳엘 가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일 정도로, 아주 먼 서쪽 땅.


  성도에서 서남쪽으로 한참 떨어진 파초(巴楚)라는 곳에 업무상 볼일로 여러 번 드나들었다. 맨 처음 갈 때는 일정이 빠듯해서 20여 명이 탑승하는 미니 제트기를 타고 갔는데 그 다음부터는 오고 갈 때 모두 열차를 이용했다. 그 비행기에서 벌어진 사건의 기억 때문이다.

  우르무치에서 파초까지 비행시간은 약 한 시간. 거리로는 서울-대구나 부산쯤 된다. 그 비행기에 오르던 날, 우리 일행 서너 사람은 뒤에 합류할 아주 높은 사람 팀보다 먼저 가서 준비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마음도 조급했고, 시간도 촉박했다. 그게 탈이었다.


  그날 우리는 대련을 출발하여 북경에서 회의를 마친 뒤 우르무치로 직행했고, 그 날 저녁 스케줄은 신강성(省) 측에서 미리 준비한 대로 따라야 했다. 공항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중국 관리들과 인사를 하기가 무섭게 다음 비행기로 향했다. 화장실에 들를 짬도 없었다.

  그리고, 제트기여서 시간이 얼마 안 걸린다고 하는 바람에 우리가 옮겨 탈 것이 그렇게 작은 비행기일 거라는 건 생각조차 못했다. 소형 비행기는 대체로 관광객용 프로펠러기이기 때문이다. 라스베가스에서 줄지어 떠오르는 그랜드 캐년 관광용 경비행기 같은 것처럼 말이다.


  비행기를 타고 한 이십 분쯤 되었을까. 예의 그 쉬통 부풀어 오르기가 시작되는 게 느껴졌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기내식을 먹고 나서 커피까지 챙겨먹은 게 탈이었다. 아니, 북경 -우르무치 비행기 안에서 미리 화장실을 다녀와 두지 못한 게 후회막급이었다.

  동체 길이가 20여 미터쯤은 되어 보이는 비행기 뒤쪽을 살펴보았다. 화장실 표지가 없다. 대신 여닫이 문 하나가 보였다. 저게 화장실일 수 있을까, 없을까. 요놈의 비행기가 70년대 초반에 화장실까지 챙겨서 달고 다니던 고속버스 그레이하운드라면 좀 좋아.


  그래도 혹시 몰라서, 스튜어디스 대신 떼를 지어 탑승한 견습조종사인 듯한 젊은 사내들에게 화장실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아주 밝은 목소리로 “메이요”(없어요) 소리를 합창해왔다. 다급해지기 시작해서 시커매지고 있는 내 속사정은 모르고.

  그저 빨리 날기만 빌 수밖에. 방광의 압박감은 점점 더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제발 삼십 분만 버티자고 이를 악물었다. 나중에는 내 오줌보에 대고 빌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참을 수만 있다면...... 그런데도 아니었다. 등뼈까지 아파왔다. 아, 이 방광 녀석은 제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는가.


  객실과 칸막이조차 없이 비행기를 몰고 있는 젊은 조종사들에게 도착시간이 얼마나 남았느냐고 묻기를 여러 번. 녀석들은 그제야 내 다급함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가 참다못해 미리 보아 두었던 비행기 뒤쪽의 그 미닫이문을 향해서 돌진하자 한 녀석이 뒷덜미를 낚아챘다. 거기는 승객용 화물칸이라면서. 짐칸이면 내 오줌도 싸가지고 갈 수 있지 않느냐는 내 농담은 이미 농담이 아니었다. 얼굴색이 아마 시뻘갰을 것이다. 바지 안쪽에서 이미 질금거리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날 비행기는 예정보다 십여 분 일찍 착륙했다. 화물칸 구석에라도 실례를 할 수밖에 없다는 나와의 실랑이가 기내 승객 모두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난 다음이었다. 나는 내 짐을 일행들에게 부탁하고 공항건물을 향해 백 미터 달리기 선수처럼 뛰었다. 그리고 마감 표지로 진저리를 오래오래 쳤다. 이미 바지 앞자락의 상당 부분에 찝찌름한 물기가 묻은 다음이었다. 그나마 중국 고관들이 즐겨 입는 검정색을 입고 간 터여서 표시는 조금 덜 났다.

  그날 밤 벌어진 환영 만찬장에서 나는 진감색 바지에 검은 윗도리를 걸치는 괴상한 컴비 차림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이상한 내 차림새 이면에 숨겨진 사투 사연을 새삼 되짚어 내거나 알려고 하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내 동행들까지도.


 하기야, 오줌 참기처럼 상상하기 힘든 치열한 개인적인 전투가 또 있을까. 신경줄 마디마디가 총동원되는 그런 긴장...... 오발탄만 같아서 더욱 난감해지는, 안에서의 임의방류. 오줌 질금거리기처럼 개인적으로 처참해지는 균열은 없다. 하지만, 대개는 자신의 일이 아니면 모두 4컷짜리 만화로만 스쳐가고 만다. 모든 다급한 내면적인 폭발을 돌아보면 대체로 그렇듯이.

 

 

 요즘 옷에다 오줌 싸는 일로 나를 슬슬 긴장시키는 우리 진이. 나는 그게 그저 귀여운 앙탈의 흔적으로만 넘어 갔으면 싶다. 한두 달 정도로 그칠 짧은 시간대의 장식으로 말이다.

  제발 이 아비처럼 되지 말라고. 머리 다 커서까지도 오줌통 부여잡고 별별 짓 다 하게 되는 다급함에는 절대로 쫓기지 않는 그런 여유가 우리 진이의 삶에 일찍 둥지를 틀게 되기를 지금서부터 바라고 싶다. 강도 높은 개인적인 긴장에의 반복적인 노출은 어떤 것이든, 폭발위험이 내장되어 있기 마련이므로. [May 2003]

                                                                                       -   시골마을


[추기] 다행히도 우리 진이공주님의 방뇨증세는 두 달도 못 가서 조용해졌다. 유아원

           다니는 일에 본격적으로 신명을 내시면서다.

           참, 저 신강성 우루무치에 머무는 동안에, 회사원의 별이라는 중역 진급 소식

           을 받았다. 아무래도 오줌싸개 고생담 덕분이 아니었을까. ㅎㅎㅎ

 

        


      비행기 안에서의 오줌 소동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이 야간 침대열차를 이용했다.

      (뱡기는 무서버!!)

 

      맞은편 아가씨들은 침실(?) 동료.

      상해에서 보름간 열차 여행 중.

      그 옆의 사내는 신강성 외사처 수행원

 

 

[사족] 옮겨오면서 보니, 요즘 이 우루무치가 엄청 시끄럽다.

       이 신쟝성 우루무치에는 알다시피 위구르족들이 소수민족으로(10% 정도)

       살아가고 있는 곳. 그곳의 자원에 탐이 난 중앙정부가 한족들을 대거

       이주시키면서 경제권을 그들이 독점하게 된 게 발단이다. [July 2009]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