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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팬티를 보이는 건 뿌리가 얕아서다 : 은사시나무

[내 글] 수담(穗談)

by 지구촌사람 2011. 9. 17. 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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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쉽게 팬티를 보이는 건 뿌리가 얕아서다 : 은사시나무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이 나라에 '오겡키데스까'를 흩뿌리며 유명세를 탄 일본 영화, 러브레터. 현실, 환상, 상상이 구분되어 있지 않아서 한두 번 보아서는 줄거리조차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영화였지만, 사람들은 그저 ‘오겡끼데스까’ 하나만 주워들고서 좋은 영화라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손녀가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가 심었던 나무를 아래에서부터 위로 빠르게 훑어 올라가는 것으로(영화 용어로는 '틸팅 tilting'이라고 한다) 꾸려진다. 수피(樹皮)가 하얀 나무. 처음에는 나도 그 나무가 우리나라와 일본에 많이 나고 자라는 자작나무일 것으로 여겼다. 그러다가 손녀의 나이를 떠올려보니 은사시나무였다. 자작나무도 생장이 빠른 편이긴 하지만, 은사시만큼 속성수는 아닌데다가 날씨(고온과 건조)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은사시는 ‘사시나무 떨 듯한다’라는 말에 나오는 사시나무 가족에 속한다. 쉽게 말하면 포플러 계통이고, 제대로 이야기하자면 긴잎사시나무, 수원사시나무, 은사시나무, 일본사시나무, 털사시나무, 은백양 등이다. 은수원사시나무, 사시나무, 미루나무, 양버들나무라고도 한다.

 

이 은사시나무는 자연 잡종이다. 우리나라의 수원사시나무와 미국 은백양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잡종. 이들 두 나무를 인공적으로 교잡하여 만들어낸 수종의 정식 이름은 은수원사시나무 또는 현사시나무이지만 (흔히 ‘현사시’라고 줄여들 부른다), 자연 잡종인 은사시나무와 구별하기 어렵다.

 

                                                        *

은사시나무의 특징 중 하나는 잎의 앞 뒤 색깔이 다르다는 것. 잎 뒷면이 은색이다. ‘은(銀)사시’라는 이름을 얻게 된 연유다. 바람이 조금이라도 불면 잎이 발랑 뒤집어지면서 떨어댄다. 멋있게도 보이지만, 더 많이는 호들갑에 가깝다. 수런수런, 재깔재깔, 히히호호, 흐응흐응...... 소란스럽고 수선스럽다. 온통 가벼움으로 넘친다.

 

게다가 그처럼 가볍게 희끗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뒷구멍으로 사건을 쳐대는 이

시대의 은근짜 여인을 보는 듯도 하다. 고의적으로 허벅지 속살을 슬쩍슬쩍 드러내거나

실수로 내보이듯 하면서, 사내들의 눈길을 끌어대는 그런 싸구려 여인의 모습 말이다.

그것도 그런 사내들에게서 돈푼이나 뜯어내거나 옷 몇 가지라도 얻어 입으려는 그런

더러운 계산속을 깔고서 -그것도 문단 활동이니 뭐니 하는 설치기일 뿐인 짓거리에서

눈길을 끌기 위한 웃기는 욕심에서 -그런 몸 팔기까지도 서슴치 않고 해대는 여인일수록

그런 짓에 아예 이골이 나있다. 그것도 그 앞에 '여류~' 어쩌고를 무슨 벼슬처럼 붙여대길

좋아하는 그런 이들이 말이다.

 

사려 깊어서 진중한 지긋함과는 아예 거리가 멀다. ‘사시나무 떨 듯한다’는 말도 그런

가벼움착목한 말이다. 그럴 때의 은사시나무는 낯내기*에 더 많이 관심하는 이들을

닮았다. 하기야, 은사시가 그처럼 경망스럽게 떨어대는 건 다른 것들보다 잎자루가 한참

길기 때문이다. 사진 찍을 때면 기를 쓰고 목을 빼서라도 제 얼굴을 내세우려는 사람들의

목덜미처럼 길다. 

[* 낯내기(명) 사람들 앞에 자기 이름을 날리고 내세우려는 일.]

 

은사시나무의 가장 큰 특징은 뿌리가 지극히 약하다는 점이다. 얕게 묻히고 잔뿌리가 많다. 버팀대 역할을 해주는 지주뿌리가 없고 그만그만한 뿌리들만 번져있다. 쉽게 빨리 자라는 속성수들의 특징답게, 성질 한번 되게 급하다. 녀석은 3년이면 지름이 10센티 이상이 될 정도로 빨리 자란다. 높이가 20m 정도가 될 때까지, 그저 위로 벋어 오르기에만 관심할 뿐 든든한 뿌리 가꾸기에는 신경 안 쓴다.

 

그러니, 이 녀석들은 조금만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하면, ‘픽픽’ 이다. 1995년인가. 서울에도 태풍이 몰고 온 비바람이 스쳐 갔을 때, 집 근처의 개웅산과 매봉산엘 가보니, 도처에 쓰러져 있는 것들이 바로 녀석들이었다. 그 많은 것들이 쓰레기 고사목이 될 판. 나중에 보니 관할구청의 공원/녹지관리과 직원들이 머리를 써서 그것으로 산 속의 머뭄터 이곳저곳에 걸침대를 만들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천만다행이라고 한 건, 녀석들의 쓸모 때문이다. 녀석들은 기껏해야 성냥개비나 포장용재 따위로나 쓰인다. 그 만큼 재질이 약하다. 성급하게 자라고 낯내기에 더 많이 관심하는 대충대충 인생들이 조금 어려운 일만 있어도 잘못된 샛길부터 찾아서 빠져드는 것과도 흡사하다. 요즘 부쩍 유행처럼 번지는 자살들 역시 잘못 찾은 손쉬운 샛길인 것이, 죽을 용기가 있다면 뭔들 못할까.

     

 

 

 

추석 연휴의 시작이었던 지난 주말. 파주의 삼릉 근처 야산을 훑었다. 장모님 병간에 쓰일 운지버섯과 영지버섯만 조금 땄을 뿐 거의 빈손으로 내려올 때다. 눈앞으로 다가온 아름드리나무들의 수피가 좀 괴상했다. 아랫도리는 시커멓고 1.5미터 정도 이후로는 하얗고. 다가가 보니, 은사시나무. 녀석들이 나이가 들다 보니, 습기를 좋아하는 아랫도리 근처에 이끼들이 들러붙게 된 것. 바로 위 사진 속의 모습들이다.

 

녀석들을 대하자 안위가 떠올랐다. 이번 비바람에 무사했을까? 기우는 곧 현실로 다가왔다. 길가로 내려와 걷는데, 개천을 끼고 맞은편 둔덕에 쓰러진 녀석의 모습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안쓰러웠다. 내 아름을 넘길 정도의 거목으로 수고(樹高) 20미터를 족히 채우고도 남을 녀석인데도, 어찌나 무력하게 바닥에 기대고 누웠는지. 마치, 씨름장에서 거인이 어린애의 발목걸이 한 방에 나가떨어진 거나 진 배 없었다.

 

 

녀석의 모습을 폰카에 담는데, 뿌리 부분은 잘 보이지 않았다. 되레 그것이 내게는 나았다. 그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넉장거리로 힘없이 발라당 뒤집혀 있는 것도 그랬지만, 그 시원찮은 뿌리들까지 훤히 보게 된다면... 아니, 가리고 덮어서 깊이 잘 키워도 모자랄 뿌리를 그처럼 섣불리 내보이며 발라당 한 꼴을 확인해보는 건 좀. (구경거리가 따로 있지. 그 뿌리들이야말로 팬티 속에 잘 감춰둬야 할 것들과 같잖은가. )

 

돌아오는 길. 생각을 되짚어 보니 내 생각이 좀 모자랐다. 아, 힘없이 발라당 하는데, 팬티 가리고 뭐 하고 할 여력이나 있겠는가. 문제는 그 자신에게 있었다. 성급하게 덩치를 키우고 낯내기에만 부지런했던 시기에 뿌리 키우기도 했어야 했던 걸 안한 죄. 그것이 바로 팬티 안까지 쉽게 내보이게 한 것이었다.

 

문득, 낱말 하나가 떠올랐다. 황장목(黃腸木)! 임금의 관을 만드는 데 쓰던, 질이 좋은 소나무. 척박한 땅을 어떻게든 이겨내고 버티느라 뿌리가 가장 잘 발달된 우리의 소나무. 그 바람에 옮겨심기라도 하려면 반드시 중간 이식을 해서 뿌리내림을 다독거려줘야 하는 소나무.

 

뿌리가 든든한 소나무는 죽어서도 임금의 관에 쓰일 정도로 대우를 받는다. 단번에 쓰러져 팬티까지 보일 정도로 허약한 뿌리를 가꿔낸 은사시는 불 한 번 켜고 몇 초도 안 되어 버려져 잊히는 성냥개비로나 쓰이는데...

 

옛 어른들의 뿌리 칭송은 그래서 더욱 옳다. 뿌리 깊은 나무는, 지나고 나면 하찮은 것일 뿐인 시류(時流) 따위에 편승하여 흔들리는 일이 없는 까닭에 꽃도 예쁘고 (무엇보다도 제대로 된) 열매가 많다.     [Sep.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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