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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穗談]재미있는 묘비들 - 생몰년(生歿年) 잡기(雜記)

[내 글] 수담(穗談)

by 지구촌사람 2012. 5. 10.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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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몰년(生歿年) 잡기(雜記)

 


  1. 1925 - 199x. 그를 아는 사람들은 이삼십 대 호시절도 내리닫이 방탕으로 죄다 날려버릴까 싶어 노심초사했다고 했다. 요행히도 전쟁 막판에 발을 디민 군수품 빼돌리기에서 재미 좀 보고, 외항선 불빛을 피해 요리조리 빠져  나오던 전마선 덕분에 한 밑천 잡은 그가 서울 거리에 나타나서는, 해방 후 어수선하던 시절에 어디서 노다지를  캤다고 떠들었다든가 어쨌다든가.

  여하간, 세월이 흘렀고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묘비*에는 적어 넣을 말이 넘칠 정도였다. 그 중에서도 고르고 골라서 새겨 넣은 것들은 경제보국의 투철한 이념으로 불철주야 노력한 사업가, 민족의 앞날을 내다보고 교육사업에 헌신한 학교법인 설립자, 그리고 그 바쁜 와중에도 정계에 이름을 빛낸 이었다지 아마.


  그런데, 그가 세운 학교의 양지 바른 언덕에 그의 소원대로 묘비가 세워지지 못한 것은 그 학교 이사장으로 지명된 둘째가 두 눈 버젓이 뜨고 살아있는 본처 소생이 아닌데다가, 맏아들을 비롯한 적자(嫡子)와 딸네들이 기를 쓰고 반대한 때문이었다든가 뭐라든가.

  그리고, 그가 국회의원 공천에서 몇 번을 두고 탈락하는 바람에 유신 국회의원 한 번으로 끝나고 만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해방 이후 그의 행적을 빠짐없이 기록한 글이, 그것도 필적이 다른 두 여인이 절절하게 적어 내려간 호소문이, 공천 때마다 모든 기관에 팩스로 전송되는 바람에 그리 되었다던가 어쨌다던가.


  2. 1948 - 1991  애개? 겨우 나이 사십을 조금 넘겼을 뿐이네. 아까워라...... 그럼 그가 그토록 왕성하게 자신을 볶아치고 닦달해서 남겨놓고 간 그 작품들은 모두 삼십대 시절의 족적인 셈이네. 찬란한지고, 그대의 이름은 삼십대로다!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그는 늘 삼십대다. 영원히 삼십대의 모습으로만 남아 있을 것이므로......  그러므로 삼십대여! 그대는 삼십대라는 사실만으로도 프레미엄이 붙는 탐나는 시절의 이름이로다. )


  그렇다면...... 그보다 조금 더 살아 오십을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도 삼십대가 있었을 텐데, 그땐 내가 뭘 했지? 내내 정신없이 쏘다니긴 했는데 그땐 내가 뭘 하면서 지냈을고?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걸 보니 나는 혹시 삼십대를 거른 채 이십대에서 사십대로 건너뛴 게 아니었을까. (부끄러움으로만 치자면, 그랬으면 좋겠다. 그리고, 제 정신 빼놓고 '정신없이' 쏘다녔으니 기억이 떠오를 턱도 없긴 없다.)


   3. ? - 1953. 육이오 사변의 와중에 죽은 이다. 전사일까, 실종일까, 아니면 병사였을까?  (전쟁 통에 죽은 것도 서러울 텐데, 그걸 따지고 있는 객쩍은 참견. 후대의 참람한 오만) 근데, 몇 살에 죽었는지 본인은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조차도  모르고 죽었을까. (언젠가 찾아올 죽음을 앞에 두고도 삶의 길이를 따지는 건 살아있는 자들의 쓸 데 없는, 어쩔 수 없는 버릇......  살아 있어 더욱 누추해지는 계량화의 습관이어! )


  4. 1947 -     .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지방 분교의 학과장 자리와 후배가 차지하고 있는 본교의 그 자리를 두고 벌써 한 시간 넘게, 후배와 자신의 출신 대학원 성적이며 학위 수여 년도, 임용 과정 등을 떠들고 있는 옆자리 식탁의 사내. 한사코 대학원 이름만 들먹이기에 잠시 귀 기울이고 들어보니 S대 이름 위에 도돌이표가 찍혀 나온다.

  음식점에서 맛있게 음식을 먹으려면 옆자리 손님 복도 있어야 한다. 아깝긴 하지만 내 음식으로라도 저 사람 입을 막아볼까......  시간이 꽤 지나 그제서야 학교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싶었더니, 이제는 자신과 아내가 시기와 종목, 투자금액을 각각 따로 하여 매입했다가 한 날 한 시에 함께 들어먹었다는 주식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 앞에서 한 시간 반 넘게 내내 고개만 주억거리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과장 아래의 무슨무슨 교수들이지 싶다. 희끗희끗한 머리칼은 새치인가, 흰머리인가. 교수도 직업이 되면 이따금 비루해 보일 때가 많다. 과장과 대각선으로 앉아 있는 연하의 동료 여인에게 그들은 쉽게 말도 붙이지 않는다. 아하, 과장님만 아끼는 여인인가 보다.

  오물만 잔뜩 뒤집어 쓴 채 넘어서는 나이 오십 이후에 그나마 덜 추레해지는 길은, 사람들 앞에서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적게 하는 것이라는 걸, 그를 보고 배운다. 정치판의 누구누구, 언론계의 모모와 동갑내기라며 47년생임을 소리 높여 되뇌는 그를 보며 씁쓰레하게 그런 잔챙이나마 챙긴다. 죽은 자보다도 산 자를 돌아보는 일이 때로는 더욱 안쓰러운 일임을 그를 보고 불현듯 깨닫는다.


  5. 1963 -  지니야. 사랑스러운 토끼야. 여러 해 전 어느 날인가. 네가 그때까지도 대강 묶어맨 생머리를 말꼬리처럼 흔들고 다니며, 다른 건 염두에도 없이 낑낑거리면서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책보따리에만 신경을 쓰곤 하던 시절, 너를 시집보내려는 생각에서, 세월이란 건 시간의 냇물이 모인 강물의 이름이라고 하자. 나는 내내 시냇가에서만 놀래, 하는 말로 즉답해 오던 너. 그때의 표정이 하도 자연스러워서 네게서만은 그 세월의 강물이 우회할 줄만 알았다.

  그러던 너도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도매금으로 휩쓸려 팔려나가야 할 386세대의 끝동으로 밀려나 있구나. 어느 날, 386 위에 475가 있다고 하자, 386이 업그레이드되면 486이 되어야 하는데, 하면서 대번에 휘둥그렇게 눈을 뜨던 너. 그때까지도 너는 여전히 사십대와는 까마득한 동네에서만 머물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제 아무리 루스 타임을 더 봐주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시간이 되었음을 알려야 할 축구심판의 휘슬 앞으로 너도 끌려나왔구나. 푸하하하.

  하지만, 겁낼 건 없다. 하기야, 내 말이 아니라도, 지금껏 네 요량으로 바지런하게 준비해 온 것들만으로도 너는 여전히 세월을 우회하고도 남을 테니까. 그리고, 너의 생몰기(生歿記)는 이미 네 손으로 뜬 네 손바닥의 석고상처럼 확실하게 챙겨두었으리라 믿는다. 내가 두 손을 들 정도로, 허술한 구석이 한 군데도 없는 너임을 간파했던 내 눈매 덕분에 이미 오래 전에 나는 네게 안도하고 있었느니라.


  6. 1980 - ?  내 아들아. 그리고 올해 성인식을 치른 내 아들의 동갑내기 동무들아. 무조건 오래 살기를 바라지 마라. 그리고, 행여나 네 부모들을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턱없이 오랜 삶을 간구하지 마라.

  대신, 너와 너의 부모들이 진실로 필요로 하는 시간까지만 하늘이 허락해주기를 기도하렴. 그리고, 더 많이는, 진실로 필요한 시간들은 이미 주어져 있다는 걸 잊지 않는 일인 듯하구나. 우리 같이 그걸 꼭 기억해두자꾸나. [28/08/2000]

                                                                      

*묘비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재미있는 묘비명 몇 가지만 훑어본다.

 

 

 

사진 왼쪽 : 존 F*. 케네디의 동생으로 나이 43세에 비명횡사한 로버트 케네디의 묘비.

우측 사진 : 빈센트 반 고흐의 묘비석.

둘다 생몰년만 간단히 기재되어 있다. 그들의 삶을 기억하는 것은 후대인들의 몫.   

 

* 동생의 중간이름 F.는 묘석에 적힌 대로 Francis이지만, 형의 F.는 Fitzerald이다.

 

 

 

 사진 왼쪽 :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 1925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고, 

                 My Fair Lady*로 오스카상(시나리오)을 수상하기도 했던 거물로 94세에 졸.

 

                 그럼에도, 그의 묘비명은 명문으로 회자되고 있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지난 주던가, 골든벨 마지막 50번 문제로 출제되기도 했다. 조금 덜 의역하자면

                 " 넘 오래 얼쩡거리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   

 

                * 영문학 전공자들에게 문제를 내고 싶다. 저 제목 My Fair Lady를 번역해 보라고.

                   답은 "나의 금발 마누하님!"이다. 힌트를 주자면, my lady는 마눌님

                   정도의 경칭이고, fair는 금발을 뜻한다. 

 

사진 오른쪽 : 정확한 인물 이름은 꽃에 가려져 있다. 다카스기 도시 뭐(?).

                     애연가였는지, Mild Seven 대신 Mild Heaven이라 고쳐서 표기한

                     담배갑 모양의 묘석이 인상적이다. 하늘나라에 가서도 실컷 담배를 피라는 배려??

 

 

 

 가장 웃기는 비문 중의 하나. 캐나다 몬트리올의 Royal Mount Cemetry에

실제로 세워져 있는 비석인데, 내용은 아주 그럴(?) 듯하다. 

 

그런데, 첫 글자를 세로로 읽어보면 Fuck You!가 된다.

참으로 짓궂으면서도 재미있는 亡者의  친구들이다. 

(비석 두 개가 아니라 하나. 왼쪽 사진으로는 비문의 전문 해득이 어려워

제대로 보이는 비문 사진을 오른쪽에 덧댔다.)

 

쉬운 단어로 표기된 비문은 아래와 같이 아름답고 재미있다.

머물고 있는 데가 그다지 좋지 않거든 지구로 돌아오라고 권할 정도로... ㅎㅎㅎ 

(단어들이 쉬우니까, 재미로들 번역해보시도록... 쓱 넘기지들 마시고)

 

Jhon

Free your body and soul

Unfold your powerful wings

Climb up the highest mountain

Kick your feet up in the air

You may now live forever

Or return to the earth

Unless you feel good where you are.

            Missed by your fri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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