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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穗談]형님이라 부르던, 나의 주사부(酒師傅) 돌아가다

[내 글] 수담(穗談)

by 지구촌사람 2012. 6. 12.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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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穗談]   형님이라 부르던, 나의 주사부(酒師傅) 돌아가다

 

  1987년 후반기. 8년여의 바깥살이를 마치고 내가 국내에서 직장생활을 다시 시작한 해다. 2년 동안 기숙사에서 대학원 생활을 한답시고 아주 잘 논 다음에.

  그때의 직장이 외투기업(외국자본 합작 투자 기업의 약어)이었는데, 모 협회에서 강남 대로변의 한 블록을 통째로 ‘찜’해서 건물을 여러 채 한꺼번에 짓고 있었고, 그 중 높이 111미터의 33층짜리가 내 밥벌이 터전이었다.

 

  직장 생활은 아주 순탄했다. 한 가지만 빼고는. 술 문화에의 적응이 그것이었다. 특히 당시는 건물을 짓고 있을 때여서 일도 많았고, 그 핑계로 퇴근 무렵엔 직원들과 포장마차에서 간단히 한잔 하는 게 그날의 목 때 벗기기 일과였는데, ‘그놈의 쐬주’가 내겐 거의 ‘웬수’였다.

  학창 시절에도 주로 막걸리만 마신데다, 군 생활도 희한하게 ‘쐬주’와는 거리가 먼 곳에서 근무했고, 바깥살이 동안에는 그런 센 술과 접하지 않은 터라 나는 ‘쐬주’와는 전혀 친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의 무성한 먹거리 촌 이룸과는 달리, 당시에는 그곳 한 블록 전체에 걸쳐 음식점 하나 없이 겨우 포장마차 몇 개뿐이었으니, ‘그누무 쐬주’를 마시지 않고는 직원들과의 대화는 물론, 동료 간부들과의 소통조차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내 처지를 딱하게 여긴 연상의 동료 부장 하나가 내게 와서 이랬다. “알다시피 한국 사회에서 ‘쐬주 한잔’ 못해서는 직장생활 부드럽게 하기 어려운 법. 그러니, 내가 그대를 위해 술 사부(師傅)가 되어줌세.” 그는 나보다 5살이나 위였다.

 

  그리하여, 퇴근 후면 그와 어울렸다. 가보니, 이미 3인방의 주당(酒黨)이 결성되어 있었다. 더구나 그들 모두 내가 좋아하는 한국인 부서장들이었다. (그 중 하나는 나중에 배반을 때려서(?), 우리 셋이서 제명 처분을 하긴 했지만도...)

  그렇게 해서 한 해 정도를 열심스런 주당 생도(生徒)로서 노력했다. 하지만, 는 것은 늦어진 퇴근 시간과 외박뿐이었고 (그때는 음주 운전 단속이 좀 느슨한 때이긴 했으나, 회사 건물 내부에 내가 맘대로 해도 좋은 휴식 공간이 있어서, 자고 먹는 데에 애로사항이 없었다. 더구나 당시 내 집은 회사에서 30여 킬로 떨어진 A시에 있었다.) ‘그누무 쐬주’는 당최 나와 통정(通情)하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두 가지 소득은 있었다. 하나는 무조건 좋은 술안주와 함께 해야 한다는 사부님의 교지가 현물로 실천되는 바람에 곳곳의 맛집 탐방이 이어졌다는 것.

  한국관의 쇠고기 육회. 경복아파트 근처의 특급 홍어찜 집인 ‘삼학도’, 개고기가 금지된 상황에서도 버젓이 -그것도 검찰청사 바로 밑에서 - 영업을 하고 있던 이 나라 최고 수준이라던 ‘향목’ (웃기는 것이 그곳의 주고객은 판검사들이었다), 모 호텔 1층의 등심구이, 우동이 끝내주던 ‘기소야’, 강남으로 옮겨온 무교동낙지집 ‘유정’... 등등 수많은 곳들을 사부가 이끌고 다니는 바람에, 그렇잖아도 은근히 맛있는 것들을 밝혀온 내가 그 뒤로도 맛집 순례를 평생 과업(?)으로까지 삼게 되었다.

 

  두 번째 소득은 내 궁금증 해소였다. 나의 주사부(酒師傅)가 어째서 그렇게 매일 ‘쐬주’와 가까이 하게 되었는지, 그 연유를 알게 된 것이다. 소설로도 두어 권은 족히 될 그의 삶의 뒤안길. 짧게 요약해도 몇 문단은 되고도 남을 만했다.

  출발은 고교생 시절에 시작된 사촌과의 사랑이었다. 집안에서들 난리일 것은 당연지사. S대 불문과에 입학했지만 항상 취해 있는 그는 수업일수가 모자라 진급할 수가 없었고, 다음 해에 Y대 경영학과에 입학하여 졸업했다. 어떻게 졸업을 했는지 본인도 비몽사몽이라고 했다. 그가 졸업하기 전, 세상의 시선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이승과 하직한 그의 여인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졸업 후 그는 외투합작기업의 하나인 H정유에 입사해서 그럭저럭 회사를 다녔는데, 거기서도 사건이 터졌다. 자신이 추천한 친척 트럭기사가 그만 실수로 불을 낸 것.

  정유공장의 불. 그건 크기를 불문하고 대형 사고였다. 회사에서 손해배상을 그에게도 때려서 모든 급여가 그 배상금 납입용으로 압류되자, 그의 처지를 불쌍하게 여긴 회사에서는 가공인물을 만들어 그에게 급여를 지급했다. 내가 근무하던 곳은 바로 그 H정유가 투자한 자회사 격이었는데, 그가 그곳으로 오게 된 것은, 그가 자원한 바였다. 자신의 이름으로 급여를 받고 싶어서.

 

  그 사이, 집안의 은근한 압력으로, 집안끼리 알고 지내던 모 가문의 여인 하나와 결혼을 했고, 여러 해 뒤 아무 것도 모르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아들이 그런 내밀한 냄새를 어떻게 맡았는지, 나중에 커서 좀 문제아가 되긴 했다. 딸애도 사춘기가 길어서, 중학생 시절 어느 날 방에다 불을 내기도 했다.)

 

  그의 생활은 겉으로 보면 참으로 단아한 편이었다. 매일 한 병 이상의 소주를 하고, 40대 이후로는 거의 두세 병 수준으로 늘어났음에도 그가 술주정을 하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다만, 집이 회사와 아주 가까운 서초동인 탓에 때로는 음주 운전을 고집하기도 해서 국회의원 나리와 차끼리 인사를 한 적도 있고, 고위 경찰 간부와도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적이 있지만, 몇 번의 그런 사고를 끝으로 음주운전도 졸업했다.

  문제는 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는 일찍부터 이 나라의 간(肝) 박사 대부 격인 서울의대 김정룡 박사를 주치의로 두고서 꾸준히 몸 관리를 한 터라, 10여 년 전 초기 대장암으로 판정되었을 때도 쉽게 완치했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다. 그가 정년퇴임하자 그의 착한 심성을 이용하여 투자를 유혹하고 금전적 손실을 크게 입힌 녀석이 둘씩이나 된 게 빌미가 되긴 했지만, 거기에 조기 치료의 안도감까지 더해져 음주량이 아주 쉽게 늘었다.

  그럴 무렵 그와 만나면, “쐬주는 왕대포가 제 격인 것 같아. 그렇지 않아, 최박사?” 하면서 맥주잔으로 마셨다. 박사는 무슨 박사. 소주 한 병이 맥주잔으로 딱 두 잔 나온다는 걸 그때서야 첨 알았는데. 그런 그에게 내가 탓하는 말, “형님. 지난 번 그 치료 생각해서 어떻게 좀 해보소. 이게 뭐야, 술이 더 늘었잖아. ” 소리는 그의 귓바퀴 근처만 매만질 뿐이었다.

 

  그가 다시 대장암과 십이지장암으로 병원 치료를 시작했다는 소식은 작년에 내가 부악문원에 머물 때 들려왔다. 전화기를 타고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에는 진이 빠져 있었다.

  그리고 두어 달 뒤,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는 전화기에 떠오르는 번호를 보고 받아야 할 사람의 전화만 간신히 받을 정도였다. 결혼 후 내내 모시고 있던 장모가 10여 년 전 치매에 걸리자, 몇 해 전 그녀를 옮겨 모셨던 요양원에 그도 함께 머물고 있을 때였다.

 

  엊저녁 18시. 그가 운명한 시각이다. ‘쐬주학당’의 만년 유급생인 나에게 알게 모르게 만만찮은 그림자를 드리웠던 인생길의 형님. 얼굴을 대하든, 목소리를 대하든 항상 나의 무사고(?)를 축하하고 격려하던 그. 회사를 달리하는 바람에 근무지가 달라진 뒤에도 10여 년 이상 도리어 아랫것인 내게 거꾸로 추석선물을 꼬박꼬박 챙겨서 보내주던 따뜻한 사람. 영혼이 참으로 맑고 고왔던 그.  어른치고는 한없이 맑았고 사내치고는 지나치게 고왔다. 인간이 한 줄의 영혼으로 기억될 때 그 기억은 참았던 슬픔과 눈물을 향해 날카롭게 찔러온다.  

  그와 함께 했던 지난 세월들이 한꺼번에 두려빠지는 느낌이다. 하늘나라에서의 명복을 비는 일로는 성에 차지도 않는다. 남은 빈자리, 뻥 뚫린 그 공간들이 점점 커지지 싶다. 뒤늦게 그가 왕창 그립다.

 

  참, 저승에서는 그가 그토록 평생 이런저런 내용으로 가슴앓이를 했던 그녀를 만나 항상 두 손 꼭 잡고 다녔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말을 내일 영정 사진에 대고 속삭이고 오려고 벼르는 중이다. 형수 몰래.

  형님! 거기서 뽀뽀를 할 수 있거들랑 이제는 거리낄 것 없이, 실컷 하소. 눈치 볼 일 없는 그곳 아닌교? [11 June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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