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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 개띠의 진실

[내 글] 수담(穗談)

by 지구촌사람 2012. 7. 22.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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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리, 창가의 사람


 

                           

 

                                          58년 개띠의 진실


  58년 개띠. 이 사회에서 '우선' 주목받는 사람들이다. 무슨 얘기 끝에 나이 얘기가 나오고 58년 개띠라고 밝혀지면 대뜸, “으응, 58년 개띠야??”로 응수한다. 마치, 58년생 개띠이니까 응당 그럴 수밖에 없다는 듯이. 앞에서 '우선'을 강조한 이유다.

  내가 살아오면서 그 나이그룹에 특별히 주목한 일은 없다. 연유도 모르고 특정 생년에 그리 집착할 일도 없거니와, 막말로 내 대학생 시절에도 여전히 초등학생에 머물고 있던 '꼬맹이'들에게 관심할 특별한 까닭도 없어서다.


  그런 이들이 내게도 관심사로 떠오르게 된 것은 7-8년 전이다. 심리치료에 관심이 있던 내가 필수 실습과정으로 사이버 상담에 잠시 연루(?)되었을 때다. 무료 봉사를 하면서 몇몇 사람들의 이런저런 사연을 접하게 되었는데, 묘하게도 그 중의 상당수가 바로 그 <58년 개띠> 여인들이었다.

  당시에는 개띠니 뭐니 하는 그런 생각도 없었는데, 나중에 돌아보니 그랬다. 내 잡문 어딘가에 그녀들의 이야기 일부분을 적었던 것은 그런 정황들을 훗날 잊지 않기 위함이었다고나 할까.


  여인 A. 문재(文才)가 뛰어난 여인이었다. 밤하늘을 뒤덮고 있던 별들을 묘사한 부분을 지금도 기억하는데, 그것 하나만 두고 보자면 이 나라 어느 작가도 그녀만큼 그렇게  표현해낸 이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 빼어난 문장이었다. 마치, 한수산의 신춘문예 당선소설을 처음 대한 이들이 맛봤던 놀라운 새김질 같은 게 문장마다에 녹아 있었다.  

  그런 그녀가 당시 앓고 있던 건 사랑병이라고 토설했다. 것도, 그 시절 기준으로는 선구자(?)라 할 정도로 피시통신에서 알게 된 연하의 남자와 육신이 얽혀든, 복잡한 사랑 앞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당시 그녀는 교외 모텔에서 몇 번 몸을 섞은 남자가 떠나간 뒤 격정적으로 안팎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나는 그걸 치정의 생채기일 뿐이라고 하대하면서 대놓고 공박했다. 왜곡된 사랑에 매단 욕정이 너무 짙은데다 냄새가 강해서였다. 지나치게 강력한 냄새는 향기가 되기 어렵다. 

  모 대학 교직원으로 몸담고 있던 그녀는, 그 뒤 혼자서 야간스키를 타고 오다가 차량사고로 골절상을 입은 뒤에야 어렵사리 정신까지 추슬러 집으로 돌아갔다. 시댁 사람들에게는 물론 아이들에게조차도 어미의 나이를 알려준 적이 없었다는 연상의 아내 자리로.


  여인 B. 모 지방대학 체육 교수가 남편이라는 그녀는 주말부부가 안겨주는 한가로움을 장난질하다가, 어느 덧 꽤나 절실한 허전함으로 헤매고 있었다.   

  그녀의 첫사랑인 듯한 어느 신문사 논설위원실 사내에게 몽블랑 만년필을 선물하면서 그것으로 신문지면에는 빛나는 글귀를, 자신에게는 의미 있게 반짝이는 문구가 되돌아오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녀가 받은 것은 그 만년필로 덧댄 것이 분명한 그 사내의 재혼 청첩이었다. 당신이 꼭 와주기를 바란다는...


  그녀의 사연을 내게 털어놓았을 때가 바로 그 무렵이었다. 내게 그녀의 외출은 잃어버린 문학소녀의 회복 정도로 보였다. 현재의 상실을 과거의 추억으로 땜질하려는 어설픈 안간 힘에 고집까지 덧칠해져 있었다. 물방울무늬의 원피스를 알아주는 사내를 찾고 싶다면서.

  그 뒤 여인은 아껴들었던 음악이 담긴 레코드판을 여인들에게 선물로 주는 버릇을 낙으로 삼고 있는 퇴직 외교관과 찻잔을 마주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런 소식의 끝자락에 대고, '땡땡이 가라'라는 유행어로 널리 회자되었던 그 원피스 차림을 하고 있더냐고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 식으로 내게 생채기 보따리들을 풀고 간 이들은 꽤나 된다. 그 중 어떤 이는 훗날 간접적으로 소식을 알게 된 이도 있다. 이 나라에서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문제가 커져서 나라 밖 익명의 세계에다 사십 몇 해의 모든 것을 파묻고, 전혀 다른 계층에 편입되기를 자원한 사람이다. 몸 바쳐 일하느라, 과거를 돌아볼 짬도 없다던가.

  그런가 하면, 남편의 여자문제로 몇 해 헤매다가 일체의 세상사에 오불관언(吾不關焉)하고 자신의 갈 길은 학문뿐이라고 새삼 초지(初志)를 가다듬은 이가 있는가 하면, 남편의 사망으로 알게 된 또 다른 여인의 존재를 기억에서 떼어놓으려 지방으로 터전을 옮긴 여인도 있다. 이 나라에서 히브리어를 꿰는 흔치 않은 여인이라는 것만 지금도 생각난다.


                                 *

  그런 사연들을 대할 때만 해도, 나는 그들이 58년 개띠인지 뭔지에 그다지 관심하지 않았다. 사십대는 인생의 진미를 나름대로 판정하거나 읽어내면서 내면적으로 가장 중요한 삶의 무늬를 짜내는 시기. 개인사에서 엮어내는 가장 치열한 격동기이기도 하다. 

  그 시기에 접어든 여인들이 겪게 되는 그렇고 그런 일상사 정도로만 여겼다. 하기야, 58년 개띠니 뭐니 하는 소리를 더 자주 듣게 된 건 그때가 아니라 그 이후의 일이기도 하다.

 

  58년생. 많은 이들은 그들이 이 사회의 격변기에 희생타를 맞기도 하고 이런저런 사례들의 최초 시행 대상이 되기도 했다면서, 뺑뺑이로 더 많이 알려진 중학교 무시험 진학제도 시행 같은 것을 예로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사실과 다르다. 기회에 그런 것들을 대충 짚어보자. 주요 사건들과 그들의 나이를 만 연령이 아닌 우리 나이로 부기하면 이해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1961년 (4살)  5.16혁명 발발

  1962년 (5살)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개시

  1963년 (6살)  삼양라면 판매 개시 (10원)

  1964년 (7살)  월남참전 개시 (이동외과병원/비둘기부대 파병)

                       (초등학교 입학 시작)

  1965년 (8살)  수출 1억불 달성, 혼분식 장려.  

  1968년 (11살) 대학입학 예비고사 시행. 국민교육헌장 반포

  1969년 (12살) 중학교 무시험진학 시행 (추첨)

  1970년 (13살) 경부고속도로 개통. 라면 20원으로 오름.

  1973년 (16살) 월남참전군 철수

  1977년 (20살) 수출 100억불 달성.

                       (대학진학)


  내 개인사에 있어서 충격이었던 게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최초이자 최대의 충격은 5.16군사혁명이다.

  선생님이나 공무원들이 재건복이라고 부르던 코르덴 복장을 죄다 입고 나타난 외형적인 변화보다도 더 무서웠던 게 있었는데, 그건 바로 혁명공약. 그 짧지 않은 혁명공약을 외우지 않으면 청소 당번이 되는 건 물론, 아주아주 큰 일 날 일처럼 보였다. 나중에 보니 모든 행사 때마다 <혁명공약 낭독>은 식순에서도 빠지지 않았다.

  

  두 번째 충격은 79년의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다. 때마침 나는 잠깐 귀국해 있을 때인데, 그날따라 새벽에 눈을 뜬 나는 티비를 일찍 켰다. 흑백 티비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유고! 라는 자막과 함께 낯선 음악만 지루하게 반복되고 있었다.

  그 뒤로 DDD로 요약되기도 한 전두환 정권의 서슬 퍼런 국정 농단 소식은 나라밖에서 희화적으로 전달되는 외국 매스컴에 신세져야 했다. 


  이 두 가지 일대사건이 발생했을 당시로 돌아가 보자. 58년 개띠는 우리 나이로 각각 4살, 22살이었다. 혁명공약은 알 턱이 없고, 전두환 시절이 무르익을 무렵엔 대학 밖에 머물고 있을 나이.

  어찌 보자면 58년 개띠와 정치적 격변은 그다지 관계가 적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정치적 변화들보다도 내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게 있다. 바로 쌀밥을 먹게 된 일이다. 내 기억으로는 이 나라에서 쌀밥 혜택이 일반화된 것은 70년 무렵이 아닌가 싶다. 65년도만 해도 쌀이 모자라서, 혼분식 장려 포스터나 표어가 방방곡곡에 붙여져 있었으니까.

  내가 방학이 되어 시골로 내려가면 그래도 서울자식이라고 해서 우리 엄니는 내게 쌀이 많이 들어간 밥을 주시곤 했는데, 식구들 끼리 눈치 안 보고 쌀밥을 맘놓고 퍼먹게 된 건 아무래도 내가 대학생이 되고 난 이후의 일인 듯하다. 위에  1970년 무렵이라고 적은 까닭이다.


  1970년. 사실 이 해는 우리나라에서 여간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고, 서울에서는 하루 세 끼니 쌀밥 먹는 일이 일상화되었다. 이 쌀밥 얘기를 하면 웃는 이들이 있겠지만, 당시에는  그처럼 절실한 일도 없었다. 100그램에 10원으로 팔리던 라면이 120그램에 20원으로, 7년 만에 가격 인상이 이뤄진 것도 이때다. 그리고, 남대문 시장에서 오랜 동안 5원씩에 팔리던 그 <꿀꿀이죽>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종로5가의 한일은행 옆 골목에 잠시 머물게 된 시기도 바로 이 무렵부터의 일이다. 나중에 남영동에서 부대찌개라는 이름으로 성업하게 된 내용물에 비해서는 형편없었고.         

  그런데, 이 58년 개띠는 이 쌀밥과도 그다지 관계가 없다. 70년이면 그들은 당시 우리 나이로 13살인데, 초등학교 입학하면서부터 조금씩 섞이기 시작한 쌀의 양이 어느 날인가 허연 쌀밥으로 완전히 바뀐 정도로만 다가오기 때문이다. 보리쌀로 살짝 가린 아버지 밥그릇을 건너보면서 입맛 다시던 어린 시절이 그들에겐 없거나, 있어도 아주 적다.


  그러한 터에, 그 무렵 월남전에 참전한 이들이 훗날 목숨값이라 불리게 된 전투수당이라는 걸 받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사병 기준 한 달에 100불도 안 되게 지급되던 돈으로 시골에 논도 사고 밭도 샀다는 얘기를 하면 실감이 안 날 게다.

  뒤에 상세한 내역이 요약된 표를 붙이겠지만, 당시 이들이 송금해온 돈은 정말이지 피와 같은 돈이었다. 수출 1억불을 달성하던 날 (65년11월 30일), 크게 잔치를 열고 “무역의 날”로 자축하던 시절에 몇 백만 불이라는 돈은 이 나라 경제에 긴급 수혈처럼 요긴하고 소중한 목숨값이었다. 그 시절 58년 개띠의 상당수는 막 초등학교에 입학을 마친 코흘리개들이었고.


  외우지 못하면 청소 당번을 면하지 못할 일이 1968년에 또 생겼는데, 그건 짤막짤막한 혁명공약과도 달랐다. 한없이 늘어지는 긴 문장의 시작은 이랬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나중에 비문법적 문장의 대표적 사례로 수 없이 두들겨 맞기도 한 이 국민교육헌장은 학기말 고사가 막 끝날 무렵인 12월5일에 반포되었다. 그 해는 예비고사라는 게 처음 치러지느라 어수선하던 해이기도 했는데, 이때는 우리의 58년 개띠들도 고생깨나 했지 싶다. 초등학생들이 제대로 뜻도 모르고 무조건 그걸 외워야만 집에 갈 수 있었으니까. 


  아무튼, 대충 이렇게 살펴봐도 58년 개띠는 이 나라의 대사회변혁이나 정치적 격동 사건과 대체로 무관하다. 무난하게 지내온 편이다.

  심지어는 그들이 뺑뺑이 무시험 진학의 첫 케이스라고 와전되거나 강변되기도 하지만, 그 또한 위에 제시한 것처럼 실제상황과는 거리가 있다. 우리 나이 여섯 살에 입학해야 하는 특수조기 입학생이 아니고서는 나이 열두 살이 되던 69년에 중학교 진학은 불가능한 까닭이다. 정상적으로 호적처리가 되었다면, 당시 대체로 학교입학을 늦추곤 하던 경향으로 보아 두어 해 뒤에나 뺑뺑이 입학생이 되어야 정상(?)이다. 더구나, 호적정리가 늦어 실제 나이보다 더 늦게 입학하던 사례들이 많던 시절이니 더더욱 그러하다.

 

                                                    *

  이처럼 지나온 시대를 거슬러 살펴보는 것으로는 58년 개띠가 특별히 구분되어 주목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마땅한 공통 관심사들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58년 개띠라는 특정 생년자들에 관한 얘기는 요즘도 끊이지 않는다. 벌써 우리 나이 마흔여덟이라는 적지 않은 연륜에다, 중년을 넘어 장년으로 편입되기 시작하는 묵직한 이들에게 말이다. 내가 며칠 전 간단히 전해들은 이야기도 그 중 하나다.


  요약하자면, 7-8년 전부터 흔들린 부부관계가 남편의 경제적 무능력에다 폭언, 음주 등의 아름답지 못한 것들까지 곁들여 결국은 이혼하게 되었다는데, 여인은 현직 보험 설계사였다.

  그녀가 나이가 우연히도 58년 개띠였고, 띠 얘기는 빠지지 않고 또 나왔다. 그때 내가 굳이 떠올려 거머잡은 생각. 이제는 그 '빌어먹을' 58년 개띠 소리를 여인들에게서 걷어내도 좋을 때가 아닌가. 그래야 하지 않나 싶었다. 


  쌀밥을 먹게 된 70년대. 그녀들은 대체로 중학교 진학을 앞두거나 중학생이었다. 철이 들면서 보리밥 시대와 아듀를 고한 행운아들이다. 그리고 결혼이 시작되거나 연애가 한창일 나이 스물다섯 근방의 시기에는 '돌대가리 군바리' 정권이 통금해제와 두발자유화(1982)에 이어 교복자율화로(1983) 당근정책을 시행하던 시대다.

  통금이란 것이 그 얼마나 우리들에게 무거운 족쇄였는지를 실감한 그들이 바로 그 젊음의 정점에서 맛본 그 때의 해방감이란 여느 사람들보다 <기쁨 두 배>였지 않았을까.


  내가 그들을 처음 개별적으로 맞았던 건 7-8년전이다. 위에 적은 것처럼 사이버 상담 봉사를 하면서다. 이제야 더 깊은 의미로 다가오지만, 그들은 그때 사십대로 들어서고 있었다. 실하게 자라났다면 토실토실한  알곡을 거둘 시기로 진입하는 인생의 황금기이기도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쭉정이로 마감되는 게 새삼스러워져서 조바심치게 되는 시기.     

  그 가늠의 폭과 깊이, 방향에 따라서 그들은 그렇게 40대 진입의 홍역을 적잖게 앓고 있었던 듯하고, 나는 아무 생각없이 그들을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보편적으로 스산한 삶에서 보이기 마련인 흥미거리 잔가지 몇 개 정도로만.  


  이제 이 잡문을 여기서 서둘러 마쳐야 한다. 아침 출근에 바빠해야 하므로. 한 마디만 보태자. 어설픈 결어 삼아서.

 

  어디에선가, 58년개띠 볼링동호회라는 플래카드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요즘은 한 풀 꺾인 듯한 볼링. 게다가 나이 오십을 바라보는 이들의 운동모임이었다. 나는 거기서 58년 개띠라는 이 사회의 괴상한 시각 하나가 저절로 교정되고 있는 걸 보았다. 근거 없는 낭설들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사건 하나 앞에서 봄눈 녹듯이 스러지는 것처럼...


  인생은 가끔 특정시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우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 그야말로 아무런 근거도 없이 유행해온 58년 개띠라는 말로 같은 시대를 관통해온 특정 생년자들을 까닭 없이 구분하거나 구획해서는 안 된다. 나처럼 어설프게 동참해서 섣불리 거들어서도 안 된다. 그처럼 생각 없는 덩달이도 없다. 그리고, 이유도 없이 씌운 괄호라면 얼른 벗겨줘야 한다.

  심심풀이로, 혹은 확인을 거치지도 않은 수런거림으로, 특정 생년에 속하는 모든 이들을 가정법적인 인생 모둠살이로 몰아넣어서는 안 된다. 이제야 그런 생각을 절절하게 한다. 반성을 곁들여서......

 

  인생은 각개 전투다. 그리고 수런거림으로 악령의 본색을 가리기 마련인 시대의 몰이꾼들도 이제는 필요치 않을 것 같다. 나이 마흔여덟은 그런 몰이꾼들에게서 충분히 벗어나고도 남을 나이이므로. 이제는. [Oct 2005]

                                                                                         - 시골마을  

[참고자료] 월남전 전투수당 (목숨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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