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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穗談]이혼 못 하는 바보 천사, 잘 하는 문제 공주

[내 글] 수담(穗談)

by 지구촌사람 2012. 9. 13. 0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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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10여 년 전에 인터넷 상담 봉사를 하고 있던 시절에

  모 여성 월간지에 2회에 걸쳐 그 소회들을 담아 실은 것.

 

  그런 낡은(?) 글을 꺼내 온 것은, 여전히 그 쓸모가 조금은 있을 듯하다는 생각을

  얼마 전에 어떤 분의 사례를 들으면서, 떠올렸던 까닭이다.

 

  글이 무척 길다. 쉬엄쉬엄 읽어야 할 분들도 계실 것이고

  단번에 대충 훑기만 해도 되실 분도 계실 듯하다.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었으면 참 좋겠다.


                               이혼 못 하는 바보 천사, 잘 하는 문제 공주


  세 해 전쯤의 일이다. 주변 사람 중에 두 여인이 이혼을 심각하게 고려한 적이 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은 그  생각을 접었고, 한 사람은 결행했다. 최근 그런 사람이 또 하나 생겼다. 몇 달째 이혼이라는 화두 앞에서 낑낑거리고 있다. 아니, 여러 해 동안의 잠복기를 거친 병균들이 이제는 본격적으로 활성화되어 그녀를 괴롭히고 있다.


  나는 이혼에 대해서 그 선악이나 호불호를 따지지 않는다. 부질없는 짓이다, 정작 따져야 할 것은 그 전후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결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이혼도 할 수 있고, 하게 될 수도 있다. 결혼이 선택이듯 이혼 역시 그러한 선택의 하나일 뿐이라고 나는 애써 덤덤하게 받아들이려고 하는 편이다.

  그러므로 이혼이 주변 사람들로 인하여 호들갑스러운 사건으로 비화되거나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하늘이 무너지고 세상이 끝나는 것처럼 이혼의 파장이 악의적으로만 부풀려져서도 안 된다. 결혼을 바라보던 당사자들의 시각이 호들갑스럽지 않았다면 이혼 역시 그래야 하고, 결혼을 새로운 우주의 탄생 정도로 부풀려서 색칠하지 않았다면 이혼 역시 그러한 선에서 바라봐야 공평하지 않을까. 심정적 과장법에서 잠시만 벗어나 생각해봐도, 기혼자 서넛 중의 하나가 이혼으로 이어진다는 숫자가 알려주듯, 이혼이란 우리 주변에서 흔히 겪는 일상의 한 가지일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처럼 흔한 일이 어느 한 사람만 피해가라는 법은 없다. 그리고 그렇게 이혼이란 걸 자신들만 피해가기를 고집하는 일이 바로 그 달갑잖은 길로 향하게 하는 시발이 될 때가 더 많다. 고집이란 게 때로는 삶과의 긴장이 대치관계를 이룰 때의 또 다른 이름일 경우도 많은데, 때때로 부부간의 사랑이란 것도 그러한 긴장으로 점철되는 삶의 단락으로 전락할 경우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랑이라는 것도 동아줄 같이 질기고 투박한 삶과 합사(合絲)되면 연약하기 짝이 없는 곁가지로 밀려나거나 귀찮은 보푸라기 정도로 손쉽게 여겨질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 내막을 까뒤집어 보면 말이다. 특히, 십여 년쯤 세월의 길목을 건너뛰어 뒤돌아보면 그럴 때가 좀 많은가.

 

                                                                        *

  결혼은 생활이다. 그래서 결혼 이후에 펼쳐지는 온갖 삶의 그림들을 결혼 생활이라고 짤막하게 줄여 부른다. 결혼 이후의 섹스를 부부생활이라는 용어로 오려내어 그게 부부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는 일조차도 그래서 생긴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 생활, 곧 살아내기와 관련하여 연애와 결혼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흔하다. 아주 많다. 대체로 결혼 생활의 햇수가 두어 해 안팎인 사람들 중에 그런 이들이 흔하다. 뜻밖으로, 결혼 생활의 두께가 십수 년 넘게 쌓인 사람들 중에도 여전히 그걸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연애는 사랑이라는 녀석이 눈앞에서 둥둥 떠다니고 그게 두 사람 모두에게 보일 때의 이름이다. 풍선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어서 손을 뻗으면 이내 잡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결혼 이후에서의 사랑이란 생활 속에 침윤되거나 녹아 흐르는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눈에 보이지 않을 때가 많고, 손으로 잡아서 그 실물을 확인하기도 쉽지 않다. 극단적으로 구분하자면, 사랑과 생활은 필요와 노력으로 결합되는 독자 생존물이다.  

 

 

  혹자는 신혼 생활 기간 중에 치르게 되는 진한 사랑 연습을 예로 들어 그렇지 않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신혼 시절의 그 잦고 진한 사랑 표현조차도 실은 생활의 일부다. 생활과 유리된 신혼부부의 사랑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 둘 중 어느 한 쪽에서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생활의 행방을 찾으려 들면 다른 한 편을 향해 얼빠진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하거나, 그때는 눈에 뭐가 쓰였다면서 자신을 향해 자탄의 손가락질을 해대는 일이 생기는 까닭이기도 하다.

  신혼기간 중에 철모르는 사람이라고 상대방의 사랑을 비난하면 그 순간  긴 연애기간의 빛나는 실적들이 단숨에 뒤집혀지고 언어의 폭력에 짓밟히는 일도 그래서 흔히 일어난다. 그러한 낭패들은 모두 생활 속에서 드러난 상대방에 대한 평가에 기초하고 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결혼 생활. 그것은 두 사람이 함께 겪는 수많은 사소한 것들과의 충돌과 화해의 이름이다. 흔히들 이혼사유가 '성격차이'라는 거창하고 유려한 용어로 요약하곤 하는데, 그 안쪽을 들여다보면 실제로는 올바르게 처리되지 못한 사소한 것들의 퇴적물이거나 부패물일 때가 많다.

  그 만치 성공적인 부부관계에서 차지하는 실생활의 무게는 만만치 않다. 99%가 생활이고 그 중 연애시절에 맛보던 사랑의 원액은 1%도 안 된다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

  먹고사는 것 한 가지만 예를 들어봐도 그렇다. 연애시절 먹는 건 전혀 가리는 게 없다고, 그래서 먹을 게 없는 게 되레 문제일 거라고 성급하게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건 100% 거짓말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리고 최소한 한두 가지쯤은 기피음식이 있게 마련이다. 다만 가리는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정도가 심하지 않은 사람이 먹성 좋은 사람에 속하고, 그런 이들이 대체로는 심성도 까다롭지 않은 게 사실이다. 입 짧은 사람들은 남녀 불문하고 적지 않게 까탈이 있는 편이고 마른 체격일 때도 많다.

 

  서로 즐겨하는 음식이 다를 때, 기혼여성은 어느 정도 참고 지낸다. 가부장제의 잔재가 아직도 널리 유효한 이 나라에서는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남자가 좋아하는 음식에 젓가락이 나가는 일도 생긴다. 남편을 위해 참고 만들어야 하고, 그러다 보면 그 음식에 대한 호불호의 심사도 조금씩 변화하기 때문이다.

 

 

  남자의 경우는 그 반응양상이 광폭에 걸쳐있다. 개중에는 결혼을 하고 나면 대뜸 아내의 식성과 관계없이 자신의 음식을 고집하는 것을 사내다움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의외로 많다. 가부장적 발상의 연장에서 한 발자국도 꼼짝하지 않는 이들이다. 그건 젊은 층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내들의 개인적인 완고함은 그 뿌리가 여간 깊지 않다. 제도적 교육이나 사회적 교양으로 치유되지 않을 정도로 질기고 억세다. 단순한 세대차이 정도로는 극복되지 않는 뿌리 깊은 병폐에 가깝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 아내가 무심하거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일이 되풀이될 때, 공교롭게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삐걱거리게 되면 그건 날카로운 공격용  칼날로 변한다. 아내에 대해 공격적인 태도로 변하게 되는 굵은 뿌리의 하나로 들어앉아, 언젠가는 아내를 향한 독화살로 날아가는 일도 생긴다.

  - 무슨 여편네가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 하나 제대로 챙겨줄 줄 모르고, 만들 줄도 모르나. 도대체, 친정에서 뭘 보고 배운 거야. 하기야, 그 놈의 친정 집안이라는 게 뭘 배우고 자시고 할 게 있는 집구석이래야지......

 

 

  음식 한 가지가, 아니 음식에 대한 기호의 차이와 솜씨의 문제가, 아내의 가슴에 이미 수없이 박힌 잔 못 위로 다시 대못질을 해대는 계기로 확실하게 활용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일이 드물지 않다. 진폭과 심도의 차이가 있을 뿐 너나 할 것 없이 집집마다 한번쯤은 겪는 일이다. 그 수습의 절차와 봉합의 내용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아내의 가슴에 무늬가 선명한 옹이로 남거나, 남편의 식성에서 아내의 손맛 항목이 아예 지워지게 되거나다.

 

 

  그런 것이다. 부부생활이란 음식이 되었건 옷차림이 되었건, 두 사람 사이에 상치되는 게 많으면 많을수록 그런 것들이 언젠가는 서로를 깊숙이 후비는 창과 칼이 되어 상대방을 만신창이로 만드는 데 쓰이게 된다.

  그런 걸 두고 부부간의 성격 차이라는 말로 두루뭉술 엮어댈 때도 있지만, 그건 성격의 차이가 아니라 생활에 대한 시각 차이에다 갈무리 솜씨의 방향착오가 얹혀진 일이다. 성격이니 뭐니 하는 말로 적당하게 표현할 건 전혀 아닌 데도, 사람들은 그걸 성격차이라고 고상하게 이름 짓는 버릇에서 벗어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그 해결책도 고상하게 찾기 마련인지, 그 내용과 방향은 여전히 엉뚱할 때가 많다.)

 

 

  요컨대, 흔히 부부간의 성격 차이라고 뭉뚱그려지는 그 애매모호한 표현도 실은 부부간에서 겪는 사소한 생활들이 서로 맞부딪치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잔해들을 얼렁뚱땅 수습해서 붙여놓은 편의상의 명명법에 불과하다. (내내 경멸해오거나 타기해오던 남들의 용어로 자신들의 문제를 요약하곤 하는 것이다. 전에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밖에 없는 두 사람의 결합이라고 우기던 사람들이......)

  그리고, 그 실체는 우습게도 낱개나 조각으로서의 생활의 불일치, 손발과 머리의 불일치일 때가 더 많다.

 

  이런 생활의 불일치에 대하여, 열애 중인 사람들은 대체로 관대하다. 아니, 무심하다. 그저 그럴 듯한 외피를 갖추고 눈앞에서 던지는 말이나 하는 짓이 예뻐보이면 된다. 경제적으로 능력 있고 거기에 그럴 듯한 백그라운드까지 보태지면 그건 <캡짱>이다.

  실생활 따위가 끼어들 짬이 없다. 그런 건 나중에나 생각해볼 귀찮은 일, 골머리 아픈 <씨잘 데 없는> 일거리일 뿐이다. (연애에 빠진 사람들의 공통점은 실생활에서 살짝 맛이 간 상태라는 것이긴 하다.) 게다가 당장 급한 건 그저 함께 있고 싶고, 더듬고 싶고, 안고 싶고 또 뭐도 하고 싶다. 안 먹어도 살 것 같은 게 연애시절 아니던가.

 

 

  기혼자 커플 중에서조차 생활을 구성하는 단편적인 현실들의 불일치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 들거나, 자신들의 진짜 문제는 그런 게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꽤 많다. 특히, 가슴속에 딱히 꼬집어 이름짓지 못한 불만족을 적지 않게 쌓아두기 마련인 감성파 여인들에게 아주 흔하게 관찰된다.

  남성도 예외는 아니다. 밖에서는 고상한 취향을 강조하면서 안에서는 청결과 근면에서 낙제점을 받을 정도로 이중적인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드러나는 증세들이다.

 

  하지만, 부부생활의 알맹이들을 두고 일견 고상해 보이는 문화적인 용어라든가, 사랑이니 뭐니 하는 추상명사로만 해석하고 포장하려는 시선은 중대한 착각이다. 파탄의 중대한 빌미가 되기도 할 정도로. 자세히 들여다보라.

  상대방을 저주할 무렵쯤에 준비되기 마련인 불만의 리스트들. 그건 죄다 이러한 구체적 생활의 불일치에 대한 혹평과 악평으로 흘러넘치지 않던가. 거기에서는 문화적인 해석이나 추상명사는 아예 보이질 않는다. 그런 건 아예 발붙일 자리조차 없을 정도로, 그 리스트 속에는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서, 또는 해주지 않아서, 더 이상 못살겠다는 동사(動詞)가 판을 친다. (이혼한 부부를 따로 만났을 때 서로에 대한 호칭이 내내 “그새끼”와 “그년”으로만 불려지던  커플. 그들은 당시 현직 교수들이었다.)

 

 

  부부간 결별의 사유는 구체적 행위이지, 감동의 해석이 잘못되거나 오독(誤讀)으로 갈라서는 경우는 결단코 없다. 부부간의 사랑은 결단코 추상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동사로 연명하고 살이 붙어 자라며 숨을 쉰다.

 

                                                                     *

  그런 예를 들자면 끝도 없을 게다. 그 중에서 흔한 것 하나를 다시 한 번 건드려보자. 입고 먹는 문제 말이다. 예컨대, 함께 산 지가 얼마인데 아직도 남편의 입맛 하나 제대로 맞추지 못하느냐, 똑 부러지게 잘 하는 음식 한 가지라도 있느냐에서 시작된 남성의 불만의 목소리는, 대개 입고 나갈 와이셔츠나 바지 하나 제대로 대려놓은 적이 있느냐로 이어지고, 끝내는 네가 여자냐 하는 식의 못질로 마감된다. 주변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하도 되풀이되어 이젠 아예 통과!통과!로 건너뛰고 있는 집도 문제의 본질이 해소된 건 아니다.)

  그런 남편을 두고, 아내 편에서 안으로 삭이고 잠잠하다고 해서 문제가 봉합되지는 않는다. 남편이 사라지고 난 등뒤로 그녀의 입안에 갇혀있던 말들이 쏟아져 나오기 마련이다..

   - 사내라는 게 그리 입이 짧으니 맨날 잔소리나 하기 마련이지...... 정성껏 저녁밥을 차려놓으면 연락도 없이 찬밥을 만든 게 어디 한두 번이야. 그러니, 음식을 만들어도 신이 안 나는 거고, 그게 되풀이되다 보니 못하게도 되는 거지. 그리고, 언제 내가 좋아하는 거 함께 먹어본 적이라도 있으면 말을 안 해. 맨날 지 좋아하는 것만 시키면서......

  그런 아내는 와이셔츠를 빨기 전 자신도 모르게 외간 여자의 냄새를 흥흥거리기 마련이다. 건성으로나마 다리미질이 되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여기서 짚고 가야 할 중대한 단서의 하나는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먹고사는 것의 차이가 또 다른 간격을 만들어가는 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가장 흔한 경우로는 취미 생활에서 상대방을 배제하는 일이다. 한 사람은 밖으로 나돌고 나머지 한 사람은 집안에만 머무는 일이 잦은 부부의 경우를 보면 도대체 두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는 취미 활동이란 게 거의 없을 때가 흔하다. 태반이 넘을 정도로.

  예컨대 등산이나 낚시, 또는 운동을 좋아하는 남편이 있다고 치자. 그 옆에, 그 힘든 산 오르기를 왜 하나 싶고, 모기에 물어뜯기며 고기 한 마리 못 잡고 게다가 술냄새까지 풍풍 풍기는 낚시질을 왜 가나 싶어서 입을 비죽이는 게 습관처럼 굳어진 아내가 있다면, 두 사람 사이는 날이 갈수록 벌어질 일만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둘이서 공유하는 느낌이 줄어들수록 두 사람의 생각과 몸이 함께 하는 기회 역시 줄고, 그리 되면 결국 늘어나는 건 둘 사이의 거리감이다.

 

 

  운동도 그렇다. 축구 같이 격렬한 운동이 아니라도 배드민턴이나 볼링과 같은 가벼운 운동이라도 자꾸만 하고 싶어하는 남편 옆에, 운동이라면 종목을 불문하고 질색부터 하는 아내가 붙어 있다면, 제 아무리 여인이 남편 옆에 머물고 싶어도 그 가능성은 날이 갈수록 적어진다. 뻔한 노릇이다.

  이런 부부들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다는 게 문제다. 어림짐작이긴 해도 그 비율이 절반쯤은 되지 않을까. 그 중 절반(전체의 25%)이 끝내는 갈라서고 마는 커플로 귀착된다고 보면 통계치와도 맞아떨어진다.

 

                                                                     *

  이처럼 움직이기 싫어하는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시각도 문제다. 여간 웃기는 게 아니다. 연애 시절에 그런 여인을 대하면 여인답다든가 다소곳하다든지 하는 식으로 이쁘게 봐주면서 쉽게쉽게 대강 지나가는 데 하나같이 전염되어 있다. 게다가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좋아하고 나돌아다니기 좋아하는 남성일수록 그러한 여인을 선호하는 괴상한 풍조가 이 나라에 오래 전부터 번져 있다. 결혼 생활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두 사람 사이의 심각한 간격으로 떠오르게 되는 데도 말이다.

  그러한 차이는 두 사람이 결혼 후 함께 하거나 해야만 하는 취미 생활의 폭이 근원적으로 차단되어 있는 일이기도 하고, 대폭 줄어들 가능성이 처음부터 예견되는 중대한 상황인데도, 그걸 진지하게 고려하는 젊은이들은 아주 드물다. 그리고 그 심각성을 깨달을 즈음이면 오랜 시간과 비용이 들어간 다음이다.

 

 

  요컨대, 운동이나 등산, 먹을거리의 선택, 그리고 취미 활동 같은 데서 두 사람의 취향이 많이 일치하면 할수록 결혼 생활은 짜임새가 있다. 내실이 있다. 마주 보며 함께 하는 일이 잦아지므로, 무엇보다도 상대방의 등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일이 드물다.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이 충분히 벌어져 있는 부부들의 공통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가 짬날 때 --- 그것이 몇십 분이나 한두 시간에 불과한 것이라 하더라도 --- 두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드물고, 실제로 함께 한 시간들이 아주 적거나 거의 없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요즘 주말에 일찍 들어오는 남편이 귀찮기만 하다는 말까지도 유력하게 번지고 있는 괴상한 사태의 중심부에 똬리를 틀고 있는 사유를 뒤집어보면 서로 반대방향을 향하고 있는 생활의 공유가 그 원인이다.)

 

 

  실증적인 사례검토로 들어가 보자. 여가시간에 두 사람이 함께 할 수 있거나 해본 것들의 리스트를 한번 떠올려보자. 편협한 사례일지는 모르겠으나, 편의상 우선 내 주변에서 겪는 일들을 생각나는 대로 늘어놓아 보겠다.


  볼링과 배드민턴 시합을 포함해서 크고 작은 운동 함께 하기 (둘이서 시합하기), 읽은 책 서로 권하기, 저녁 후 동네 한 바퀴 함께 하기 (남이야 뭐라고 하든 팔짱을 끼거나 손을 꼭 잡고), 버섯 따러 다니기 (한 목소리로 신이 나서), 낚시나 등산 함께 떠나기 (사내들끼리의 술자리나 고스톱 따위 없이), 전시회나 연극 구경 손잡고 가기, 야구장 스탠드에 나란히 앉아보기, 자신은 보통이지만 아내가 아주 좋아하는 음식이 있을 때 그걸 외식 메뉴로 이따금 정하기 또는 그 반대로 해보기, 야생화 전시장 같은 곳에 함께 고개 들이밀기 (어느 일방의 일방적 제의가 아닌 형태로), 실탄 사격 함께 해보기 (둘이서 신나서, 또 가보자면서), 냇가에서 어항이나 쪽대로 함께 고기 잡아보기 (여인 혼자서 모래밭가에 떨어져 구경만 하지 않고), 나무 심고 꽃가꾸기 (같이 땀을 흘리며), 아침저녁 화분과 채소에 물주기 (등 떠밀리지 않은 채로), 애완동물 거두기 (누구랄 것도 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이 먼저), 자투리 시간에 쉽게 갈 수 있는 곳을 서너 곳 이상 아내와 남편이 동시에 떠올리기, 함께 간 시장에서 맛있는 음식점을 한 목소리로 찾아내기 (순대집이든 곱창집이든),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계좌번호로 oo원이나 △△터 같은 곳에 정기적으로 푼돈이나마 보내고 있음을 우연히 알게 되어 미소로 서로를 바라보게 되는 일, 미리 알리지 않은 채 서로 상대방의 피붙이에 속하는 사람들을 챙겨주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는 일......

  그리고, 물살이 센 어느 산골에서, 한밤중에 더욱 큰놈이 나오는 다슬기를 잡기 위해서 개천에 들어갔다가 미끄러운 돌을 밟아 휘청이는 그녀를 잡은 그가 달빛에 드러나는 그녀의 몸매에 혹해서라는 이유로라도 급류 속에서 바위를 등받이 삼아 정사라도 벌인다면 그 천렵은 두고두고 기억되지 않을까. 그렇지 않을까.

 

 

  이제는 위의 예와 같이 둘이서 함께 하고 있는 일상의 스펙트럼을 광폭으로 일반화할 차례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들의 몫이다. 삶의 대역을 여가시간으로 한정시켜 놓고 거기에다 둘이서 함께 했거나 현재 하고 있는 것들의 이름표를 매달아보는 것이다.

  그 패찰의 숫자가 적으면 적을수록 어깨가 시리게 되고 가슴속을 스치는 냉기는 머지않아 쉽게 잠재울 수 없는 휴화산의 열기로만 압착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동의하게 될 것이다.

 

                                                                 *

  내 관찰에 의하면 부부 사이에 삶의 간격이 보이기 시작하면 그 심정적인 거리감은 최소한 배수(倍數로 늘어난다. 두 사람 사이에 틈이 생기고 간격이 벌어지면 그 중 한 사람이 그 거리를 혼자서 외롭게 또는 심각한 표정으로  왕복하고 나서야 심정적 격리감을 확인하기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걸 유식하게 표현하면, '두 사람 사이의 심리적 일체감이나 밀착도는 심정적으로 인지되는 간격(이격거리, 離隔距離)의 왕복거리와 반비례한다'가 된다. 나는 그런 현상에 대해 <애정상실의 배가속(倍加速) 법칙> (Rule of Love in Diplo-deterioration)이라고 이름 짓고 싶다. 지나치게 거창한 명칭이 아닌가도 싶지만, 실제로 느끼는 개인적인 상실감은 이 정도의 과장법을 훨씬 뛰어 넘는 탓이다.

 

 

  이러한 거리감을 한쪽에서 반복해서 확인하게 되면 그 결과는 양방향의 격리감으로 확대 누적된다. 어느 일방의 심정적 격리감은 쉬 망각되기 어렵고, 그처럼 잊혀지지 않은 격리감은 새로운 계기를 맞을 때마다 상실감으로 변화되어 차곡차곡 쌓이면서 두 사람 사이의 틈을 동시에 벌여놓기 때문이다.

  그렇게 누적된 상실감은 알다시피 자신 또는 상대방의 포기로 이어진다. 꺼지지 않는 불씨를 껴안고 벙어리 냉가슴으로 지내게 되거나, 저주를 곁들인 상대방 지우기와 더불어 새로운 시작으로 돌입하게 된다. 그렇지 않은가.

  

  이혼은 그 중에서 후자의 결연한 선택과 외부로의 확실한 천명이다.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상편 끝. 하편 계속>

 


                                                               *

  그런데, 우리들은 그러한 이혼의 과정에서 이뤄지는 판단의 오류와 선택의 오류를 빈번하게 본다. 거의 일반적이라 할 만치 아주 흔하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을 선언하면서도 그 탓을 상대방에게만 전가한다는 사실이다. 즉, 파경에 이르게 된 결혼 사유의 이모저모를 떠올리면서 그 대부분을 그 사람 탓, 그 사람의 총체적 인성 탓으로 돌린다. 실생활에서 무엇이 문제였던가를 심각하게 따지려 들지 않는 대신, 그 사람 됨됨이, 곧 인성을 탓하는 일이 주가 되는 일이 흔하다.

  그 사람은 성격이 급해서, 그 사람은 이기주의여서, 그 사람은 가정교육이 잘못 되어서, 그 사람은 어린 시절을 독하게 지내서, 그 사람은 뭐가 뭐해서...... 식이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가 곧바로 당사자에게도 지극히 중요한 문제로 남게 되는 것은 상대방을 탓하는 마음 밭에서는 자신까지도 탓하면서 돌아보려는 태도가 그 싹조차 틔우지 못한다는 걸 쉽게 망각하게 되어서다. 그처럼 상대방 탓만 해대는 사람들은 또 다른 배우자의 선택에 있어서도 자신이 변하지 않는다. 변하기도 어렵지만, 변화하려는 생각도 거의 하지 않는다. 기왕의 생활에서 무엇이 문제였는지, 그리고 그 문제의 근원이 두 사람의 생활의 불일치, 그 중에서도 둘이서 마음을 맞춰 함께 영위한 생활들이 지극히 빈한했었다는 점을 간과한다. 아주 손쉽게.

  밖으로 나가는 일이 귀찮기만 해서 주로 집안에 머물기만 바랐던 여인은 또 다른 남자를 고를 때, 자신이 변하기보다는 새로 다가오는 남자는 혼자서 나돌아다니는 일이 적은 사람이기만을 바라는 식이다. 물론, 이러한 남녀의 역할 기대가 반대인 경우도 물론 흔하다.

 

 

  그런 식이다. 취미나 성향, 가족적 배경 등의 차이 때문에 둘이서 함께 하지 못한 것들이 쌓여 결국 파국에 이른 결혼이었음에도 또 다른 상대방을 고를 때, 그 점을 망각한다. 참으로 기이한 노릇이다.

  손발이 맞지 않기 때문에 배 맞추기도 어렵고 결국은 그것이 두 사람의 머리와 가슴 맞추기까지 포기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은 채, 자신이 꿈꾸어 왔던 또 다른 사랑에의 요행을 바라거나 사랑 자체를 저주하면서 악물기와 짓밟기, 또는 의도적인 망각의 단계로 돌아선다. 그 자신은 그걸 꽤 용감한 단안으로 여기면서.

 

 

  바로 이러한 점이 이혼을 결행하지 못하는 바보천사들을 양산하게 되는 사유도 된다. 새 사람과 손발이 잘 맞는지, 잘 맞출 자신이 있는지, 그런 사람을 고를 기회와 능력이 자신에게 있는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데 그 우선순위가 뒤바뀌는 것이다. 이혼을 생각하는 단계에 이르면 정작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그러한 삶의 불일치에 대한 대안인데, 그것보다는 엉뚱한 것들에 더 매달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즉, 딸린 자식들이 어떻고로 시작해서는, 다 그 놈이 그 놈이라며 어설픈 하향평준화로 자위 아닌 자위를 하면서, 한숨만 내쉬고 마는 일이 그래서 빈번해진다. 나아가, 그 사람도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이지 하면서, 애써 내세운 관대함으로 썰렁해진 자신의 안을 다독이며 주춤거리다 물러선다.

 

 

  하지만 그런 이들의 안을 냉철하게 들여다보면 그처럼 자식들 사랑과 남편에 대한 관대함만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다. 되레 자신을 돌아보며 변화하려는 노력을 생략하는 습관적인 게으름에다, 상대방의 갖춤꼴만 밝히는 눈 밝은 계산력도 한 몫 하고 있을 때가 많다. 허약한 생활력과 부실한 정신적 독립능력. 거기에 눈치보기의 허영까지 가세하는 바람에 더욱 얇아지고 불안해진 세상보기의 탓이 주라는 게 진실에 가깝다.  그것이 늘 이혼의 벽앞에서 어깨를 접고 돌아서는 이들의 현주소일 때가 더 많다.

 

  그리고, 그 안을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사랑에 대한 근본적인 착시 현상도 자리잡고 있다. 사랑을 자기구제의 수단으로 여기려는 이기심 말이다. 그런 이들의 내부에서는 내가 타인을 사랑해서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객관적 명제보다는 내가 이쁘게 사랑받아서 행복하고 싶다는 주관적 욕심이 더 강하게 작용한다. 그런 욕심에 맞춰서 상대방들을 검증하려 든다.

 

  그러다가 자신이 없거나 아니다 싶으면, 그럴 듯하지만 실제로는 극히 이기적인 명패를 내건다. 이젠 사랑 같은 건 포기하고 그저 살아내기만 해내면 되지 뭐 하면서. 신경질까지 보태서 사랑에 가위표를 그으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이들의 항용 수법에 숨겨진 것은 그러한 이기적인 시선과의 은밀한 합방(合房)이다. 그리고는, 적당한 시간이 흐르면 그때의 상황을 희생적인 결단으로 미화하게도 된다. 아쉬움을 길게 매달며.

 

  그게 되풀이되면, 늬 아버지라는 존재를 몇십 년 전부터 아예 없는 것처럼 여기고 살았다는 고백을 딸들에게 하게 된다. 출가한 뒤 처지가 비슷해져서 찾아온 중년의 여인에게 사랑 따위는 이 세상에 없어도 산다면서......

 

  어미가 쟁취하지 못한 사랑이 딸에게로 대물림되는 집안을 보면 실생활 속에서 부모들이 함께 나란히 다니는 광경을 보고 지낸 어릴 적 기억이 딸들에게 아주 적다는 공통점이 흔하게 발견된다.

 

                                                                  *

  이혼 앞에서 머뭇거리다 끝내 돌아서서 다시 주저앉고 마는 이른바 바보천사들과는 달리 이혼 소리가 나오면 용감(?)하고도 당당하게 대처하는 이들도 있다. 어느 때는 마치 그런 소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나 아닌가 싶게 잘 준비(?)되어 있는 커플들도 있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전혀 그게 아닌 데도 말이다.

   이런 커플들의 열 중 여덟아홉은 두 사람 사이에 자존심이니 뭐니 하는 게 뒤엉킨 실타래처럼 꼬여 있을 때가 많다. 나중에 그걸 싹둑 잘라서 헤쳐놓고 보면 자존심이란 건 팻말에 적힌 말일 뿐이고 그 속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못된 고집으로 꽉 차 있을 때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이 나라의 일상생활에서 엄청나게 오용되고 있어서 당장 없어져야 할 말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자존심 self-respect이라는 말이다. 기분 나쁘면 자존심 상했다는 말로 즉결되는 이 가짜 말 때문에 온 세상이 피해를 보고 있다. 여기서는 길게 적을 수 없지만, 진정한 자존심은, 자존심의 올바른 의미는, 쉽사리 자존심 상하지 않는 든든함을 갖춘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거나, 해내려는 상태를 이른다. 일상생활에서 아무나 쉽게 쓰는 자존심이라는 말과는 정반대로 쓰여져야 하는 말이다. 자긍심 self-esteem 이라는 말로 적극 대체할 필요가 그래서 더 있다.)  


  여인 중에서 이혼이라는 말앞에 평소에도 이처럼 잘 준비된 모습을 보이는 이는 이혼을 하든 안 하든, 문제 여인이다. 이른바 문제공주의 표본이다. 이혼하지 않고 살아도 앙앙불락이요, 재혼을 해도 상대방 앞에서 미리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게으르기 때문이다.

  자신이 변하지 않은 채, 상대방에게만 변화를 요구하는 그 근본이 바뀌지 않고는 그녀의 삶은 싱글이든 더블이든 내내 거기서 거기다.

 

 

  사람이란 존재는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무척 어렵다. 바로 그 점이 문제를 어렵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손쉽게 해결책을 찾아낼 수도 있게 한다.

  간단한 예로 음식솜씨가 없는 여인은 새로운 남자를 알게 되면 다른 무엇보다도 (외모나 재산, 배경보다도 말이다) 그가 음식 타박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부터 눈여겨봐야 한다. 입맛이 까다로운 남자와 얽히면 그녀는 앞으로도 또다시 바보소리를 대놓고 들으며 살게 될 게 뻔하므로. 그녀가 적극적으로 그것을 차단하기나 모면하기 전에는 그렇다. (돈 있어봐야, 잘 나가는 남편 둬봐야, 그게 내 행복은 아니더라는 소리를 뒤늦게 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그리고, 요즘 세상에 요리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항변하는 설익은 젊은이들을 위해 좋은 사례가 있다. 모 그룹 회사 회장이 털어놓은 재혼 이유다.

  그들 부부의 불합치에는 그밖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명문가 명문대 출신의 미인 본처와 결별하고 수도권의 허름한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는 수더분한 시골여인과 결합한 그는 그녀가 해주는 음식맛 때문에 끝내 그런 결단을 내렸다는 말을 해서 듣는 이들을 은근히 놀라게, 그리고 고개들을 끄덕이게 한 적도 있을 정도다.

 

 

  얘기가 나온 김에 사례를 하나 더 들자. 운동을 끔찍이 싫어하는 여인은 절대로 스포츠광과 결혼해선 안 된다. 안팎으로 정력적이고 적극적인 그를 제대로 길게 끌어안고 지낼 능력이 있는지부터 곰곰 따져봐야 한다. 그의 사내다운 용모와 씩씩함에 반하기 전에 말이다.

  그 이유는 멀리 갈 것도 없다. 결혼생활 십여 년 전후의 남편들 중에 아내만 보면 더욱 심심(?)해진다는 핑계로 밖으로 나도는 사내들이 넘쳐난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예컨대 애교, 미모, 재담, 운동을 제외한 나머지 취미의 상당한 일치 내지는 동감, 섹스관(觀)의 일치..... 따위가 미리 챙겨두어야 할 항목들일 것 같기도 하다. 잘은 모르겠지만)

 

                                                                    *

  이혼은 피해갈 수 있으면(?) 피해가야 한다. 여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여파는 결혼보다 더 크게 마련이고 (아이들이 있으면 피해당사자의 숫자만 해도 결혼보다 많다), 득보다 실이 더 많다. 하지만, 불가피한 경우도 있다. 불행을 짊어지고 느리게 뛰는 마라톤 선수로 살아가기보다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전력질주를 해서 행복을 거머쥐는 단거리 선수의 길을 택하겠다면, 그리고 그런 다부진 결단을 꼭 내려야 하는 절박한 순간을 맞이했다면, 이혼은 실제상황이 된다. 피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만다.

  하지만 거기서 머뭇거리고 다시 뒤돌아서는 이들이 많다. 아주 많다. 문제의 본질은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시작된 자신만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해결책을 찾는 과정에서는 체면이라든가 세상의 이목과 같은 타인들의 의미망에 사로잡혀 허우적거리기만 하거나 무의미한 시도를 되풀이하는 경우가 더 많아서다.


  그리고, 그런 이들에게서 자주 발견되는 것들은 바로 그러한 사건을 변화의 계기로 삼아 자신이 변하고 그 변화를 통해서 상대방을 새롭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아주 적다는 점이다. 그 대신 상대방의 불변을 인정하면서 그러한 무변화의 사실 자체를 무시하거나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려는 것으로 자신을 다독거린다.

  지극히 소극적인 방어다. 그리고 그러한 대처는 시간이 흐르고 나면 미봉책이었을 뿐임이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 그 또는 그녀의 가슴앓이가 근본적으로 치유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 여파가 울타리 바깥의 이성을 기웃거리는 일로 이어지는 일도 흔한 세상이 되어버렸고.

 

 

  이러한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또 하나의 사실은 이혼 자체를 대단히 두려워하고 겁낸다는 점이다. 이혼은 그 자체가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혼의 실상은 그걸 결행할 때보다도 그 이후에 어떻게 할 것인가가 정작 중요한 문제다.

  그리고 그 이후의 문제라는 것도 흔히들 짐작하듯 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 그리고 또 먹고사는 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따위가 아니다. 그런 건 중요도 순서에서 두 번째다. 진짜로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을 다시 만나야 될 것이냐,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고를 것이냐, 과연 그런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내게 있겠는가, 내 자신이 상대방을 위한 존재로 변할 수 있는가를 따져보는 일이다. 그게 선결되고 나면 아이들이나 먹고 사는 문제는 저절로, 또는 나름대로 해결되기 마련이다. 그리들 된다.

 

 

  하지만 이혼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조차도 그러한 점을 생각하고 대비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서 두 가지를 든다면 하나는 어느 정도의 결혼생활로 연륜의 때가 낀 사람들은 변하기가 여간해서는 어렵기 때문이어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들러붙은 아집의 때가 얼마나 두꺼운지 돌아보기 어렵고, 살갗이 벗겨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때를 벗겨내려는 사람들은 참으로 드물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자신에게 선명한 미래의 청사진, 곧 꿈이 없는 탓도 있다. 미래의 사람을 고르는 데 진짜 기준이 되어야하는 건 꿈이고, 그것은 결코 물질적 기준으로서의 생활이나 현상, 조건은 아닌데도 실제로는 그런 것에 더 많이 관심하려는 삶의 관성에 목줄들을 매단다. 그리고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벗기 어려운 아집의 껍데기와 안팎의 관계를 이룰 때가 흔하다.    

 

  쉬운 말로 재혼 역시 또 다른 결혼이다. 하지만 결혼할 때 자신의 꿈을 상대방에게 투시하기를 게을리하는 사람은 재혼 때도 마찬가지의 시행착오를 되풀이한다. 그 자신을 돌아보며 둘이서 부부 공동재산으로 공유할 만한 꿈의 부재가 그 동안 실제의 나날 속에서 수많은 불일치의 톱날을 이뤄왔음을 깨닫게 된다면, 미래의 선택에서 무엇이 가장 으뜸이 되어야 할 지 자명한 것 아닌가?

 

                                                               *

  이혼을 꿈꾸다가도 늘 돌아서기만 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대체로 바보천사다. 내가 물러서야지, 한번만 더 참아야지 하면서 자신이 손해를 감수하는 듯하기 때문에 천사인가 하면, 그럴 줄만 알았지 정작 자신을 제대로 돌아보며 변하지 못하기 때문에 바보다.

  그런 이들이 천사이기를 완전히 포기하면 상당한 문제아가 된다. 삶의 방향이 나침반에서 벗어나는 일이 종종 생긴다. 일상의 일탈은 애교로 봐줄 수도 있지만, 매몰찬 겨눔이 물욕(物慾)으로 단순화되면 썩은 내가 진동하게 되기도 해서다.

 

 

  조금은 다른 얘기일수도 있지만, 내가 늘 궁금해 하는 게 하나 있다. 즉, 판검사들은 늘 법을 잘 지키나 하는 것이고, 세무사들은 자신들의 세금을 꼬박꼬박 잘 내나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들 아니면 내가 재수가 없는지, 내 눈에 띄는 사람들 중에는 그런 이들이 드물다. 그런 것과 여인의 물욕이 무슨 관계냐고?

  의아해 할 분들을 위해 조금만 더 이야기를 하겠다.

 

   모 광역시에 소재한 검찰지청에서 부장검사까지 지낸 이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나서, 사무실의 경리회계업무를 아는 세무사 사무실에 의뢰했다. 한 해가 지나, 세무신고를 앞두고 그 회계장부의 세무조정이라는 걸 하게 되었고, 그 수수료를 세무사가 청구를 했다. 80만 원쯤이라고 했던가. 

  그 말을 들은 변호사가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딧냐고 핏대를 세우자 세무사는 관련법까지 찾아서 보여주었다. 그때서야 고개를 숙인 변호사 왈, 그럼 그거 한 이삼십만 원으로 깎아줄 수 없을까 했다던가.

 

 

  그 변호사의 세금신고액수가 엄청 엉터리라는 건 나도 알고 세무사 사무실 사람들도 안다. (국세청 사람들만 잘 모르는 체 해주고 있다. 아직은) 그런데, 그 변호사 마누라는 에쿠스를 타고 다닌다. 남편은 개업 연수를 고려하여 그보다 한 급 아래인 듯한 다이너스티를 골랐다던가 어쨌다던가.

  그리고, 더 재미있는(?) 건 세무사 아내 명의의 통장이다. 거기에는 한번 거래액이 5억 원 가까운 액수가 찍힌다. 물론 그녀의 직업은 명실상부한 전업주부이고, 집에서 세무사와 얼굴을 맞대는 시간은 하루 한 시간도 안 된다는 말을 해온 지가 십여 년쯤 된다.

 

  변호사 아내와 세무사 아내는 이래저래 아는 사이인데, 남편들과의 그런 저런 사정들은 피차 마찬가지다. 그리고, 두 여인은 한때 국회 청문회장에까지 등장했던 여인이 하는 가게에서 사온 옷을 두 벌씩이나 가지고 있지만, 그걸 입고 나가서 부부 둘이서만 오붓하게 저녁 식사를 해본 적은 내가 알기로는 아직 한 번도 없다.

  잘 나가고 번듯해 보이지만, 그 뒷모습에서는 달갑지 않은 썩은 내가 외롭게 진동하는 여인들이다. 부부간에 빈틈이 넓혀지면서 여인들의 소외감이 소유욕으로 잘못 승화된 경우들인데, 우리 주변엔 그런 이들이 참으로 많다. 하긴 남편이 어찌 해도 좋고 이따금 집에 안 들어와도 좋으니 그저 돈이나 팡팡 벌어다 달라는 말이 한 집 건너 두 집에서 대놓고 나오는 세상이다. 그 돈의 일부가 남편의 빈자리 땜방용으로 쓰이지 않는다는 담보도 한참 후순위로 밀려가는 세상이고.

 

  결혼 후에 남자들은 아내가 과거의 모습 그대로 변치 않기를 바라는 반면, 여인들은 남편들이 제발 전과는 다른 모습이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란다는 말이 이 부부들에게 여지없이 적용되는 듯만 싶다.


                                                               *

  이제 지루하고 시답잖은 이 잡문을 마무리해야 한다. 그 전에 요약 삼아 몇 줄만 더 보태자.

  우선, 정작 우리의 삶을 관통하도록 적극적으로 유인하고 문을 활짝 열어두어야 하는 건 눈앞에서 부유하는 타인들의 사랑 앞에서가 아니라는 걸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의 붓으로 그린 사랑 앞에 넋을 잃거나, 흉내내기로 해보는 사랑연습을 사랑으로 착각하지 말자는 말이다. 그런 사랑들은 생활 속에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실생활 앞에서 단 한 방에 케이오되고 만다.

 

 

  어설픈 흉내내기나 땜질로 심정적 보상만 추구하다가 부부간의 생활에서 간격이 생기면 그것은 곧 두 사람 사이의 실물 거리가 벌어지는 일이 된다. 거리가 벌어지면, 마음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두 배의 거리로 멀어진다. 그 시작은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일들이 부족하거나 없는 데서 비롯된다. 부부가 함께 공유하는 시간의 절대적 부족은 부부간의 사이를 절대적으로 벌려놓는다. 심리적이든 육체적이든.

  그리고, 그 출발선을 내려다보면 그곳에는 이런 비문이 적혀 있을 때가 많다. 우리 부부에게는 지금 이 순간 함께 하고 있는 꿈이 없습니다. 꿈에 관한 대화조차 나눠본 적이 까마득하기만 합니다...... 라고.

 

 

  부부간에 손발이 맞아야 도둑질도 해먹는다는 말이 있다. 도둑질이라는 나쁜 짓에까지도 부부간에는 손발을 맞추라는 뜻도 된다. 그처럼 두 사람이 생활의 전반에서 손발을 맞추게 되면 배맞추기 정도야 여반장 아니겠는가.

  생활에서 손발 맞추기. 그리하여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기. 그것은 두 사람의 틈새생활이 최대한 포개지면 된다. 집안에서건 바깥에서건. 그러려면 좋아하는 것이 비슷해야 할 것은 물론이고 식성이나 체력, 그리고 생각하는 것도 비슷해야 한다. 그런 부부들에게는 둘이서 함께 엮어나가고 있는 훗날의 확실한 꿈이 없을 수 없다.

 

 

  결혼에서 조건 따지기. 은근히 유력한 현상이다. 하지만, 그게 미남미녀나 선남선녀를 고르는 일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은연중에 가산점을 주게 되는 학벌이나 재력도 두 사람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확실하게 담보하지는 않는다. 두 사람 사이, 또는 집안간에 차이가 나면 되레 거기에 발목이 잡힐 때가 더 많다.

  초혼이든 재혼이든 결혼상대자에게서 꼭 따져보고 짚어봐야 할 것은 그 또는 그녀와의 생활에서 내가 얼마나 틈새를 보이지 않고 상대방과 겹쳐지고 포개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잠자리와 생각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뭐든 말이다. 그러다 보면 두 사람의 꿈이, 행복한 생활의 실질적 내용물이, 얼마나 일치하는지 저절로 귀납되게 마련이다.

 

 

  결혼생활은 두 사람의 정신공간이 집안이라는 현실적 공간에서 동거하는 불완전한 형태다. 동거생활이다. 육신의 활동으로 채워가는 그 공간이 완벽해지거나 행복한 빛깔로 바뀌는 것은 두 사람의 꿈이 낱개의 생활 속에서 늘, 그리고 자주, 합치될 때다. 반면에, 결혼의 와해는 그 낱개의 생활들이 두 사람 사이에서 서로 부딪치면서 하나씩 빠져나갈 때 발생되는 이완현상이다. 댐을 받치고 있던 돌들이 하나씩 빠져나가면 대형붕괴로 이어지듯, 결혼 역시 낱개의 생활들이 쓸려나가면 쉽게 붕괴되고 마는 허약한 구조물이다. 본래부터.

  결혼은, 아니 결혼생활은, 그러므로 두 사람의 실생활이 어떻게든 함께 수평적으로 많이 자주 엮어질 때 행복해진다. 함께 한 곳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해진다는 단순 법칙에 가장 유효하게 지배되는 게 결혼생활이다. 그걸 알고 도전하면 어느 누구든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목적물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러한 사실을 체득하기까지 값비싼 수업료를 자청해서 내고 있는 이들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자존심이니 뭐니 하는 말로 자신의 값어치를 쓸데없이 부풀려온 사람들일수록 그런 시행착오를 죽을 때까지 되풀이하곤 한다. 신은 그래서 공평하다.

  카톨릭 신학자 티토 콜리안더가 그랬던가. 어떤 것도 원하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은 무엇이나 할 수 있게 된다고. 결혼생활에서 제일 먼저 버려야 할 것은 물질적인 풍족과 정신적인 충만의 동시만족을 꿈꾸는 그 사치일 듯하다. 미물에 불과한 곤충들까지도 성장하기 위해 목숨 걸고 껍질 벗기(變態)에 임하는데, 인간이라는 우리들이 그에 훨씬 미치지도 못한 채 처절한 자신 버리기의 각오조차 다지지 못하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사랑은 추상명사 몇 개로 축약되어서도 안 되고 요약되어질 것도 아니다. 동사(動詞)로 가득 채워져야만 어렵사리 알곡으로 드러나는 군집(cluster) 형용사다. [May 2001]

                                                                      - 최 종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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