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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길의 황소 한 마리 반

[내 글] 수담(穗談)

by 지구촌사람 2012. 12. 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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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여백]                        출근길의 황소 한 마리 반


                                                                                  최  종  희


  마을버스가 움직인다. 누렁이 황소의 알밴 앞다리가 힘차게 첫 발을 내딛는다. 내가 버스에 올라 통로 중간쯤에 자리를 잡고 선 다음이다.

 

  버스가 주유소 옆 정류장 근처에 이르렀을 때, 버스 뒷자리에서 이상한 소리가 연거푸 들린다. 우리에 갇힌 네 발 짐승이 끙끙거리는 소리.

  - 에이, 에익! 끄응

  제 목구멍 안의 거미줄에 걸린 사내의 꺽꺽거리는 목소리에서, 물가를 지나친 들짐승을 언뜻 읽는다. 본능에 충실했어야 할, 때늦은 휴식.


  소리 나는 곳으로 돌아간 시선에 그 이상한 소음의 진원지가 잡힌다. 버스의 맨 뒷좌석 두 자리를 혼자서 차지하고 있는 사나이가 체머리를 흔들고 있다. 눈자위는 게슴츠레하고, 부스스한 머리는 까치가 제 집인 양 여기고 한 번쯤은 헛걸음으로 맴돌았을 듯도 하다.

 

  간밤의 술자리에서 드잡이라도 했는지, 앞가슴까지 절개된 남방에는 풀어진 실밥이 떨어져 나간 단추 하나를 그리워하며 하늘거리고 있다. 바람 없는 날에도 꽃무게로 흔들리는 들판의 토끼풀 꽃자루처럼.

 

  엊저녁 술이 아침까지도 사내의 멱살을 잡고 뒤흔들어대고 있다. 남들의 출근 시각이 사내에게는 아직도 퇴근 시간이다.


  신호가 바뀌자 버스가 제 갈 길을 찾아 좌회전한다. 사내를 겨누고 있던 내 시선도 사분면(四分面)의 원호(圓弧)를 그리며 돈다. 그 원호의 한 점에 상가 건물 벽에 숨어 있던 간판 하나가 걸린다.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사랑교회.> 교회에 이르러서야 달싹임을 멈춘 내 입술은, 단숨에 읽어낸 교회 간판 글씨들로 이미 조금은 숨이 차다.


  큰길로 나온 마을버스가 정류장을 출발하자마자, 뒷자리에서 날아오른 소리가 좁은 버스 안을 다시 휘젓는다.

   - 야! 여기가 어디야?

  그의 썩은 소리 화살에 꿰어, 도망갈 곳이 없는 옆자리의 남학생 하나가 얼른 대답한다.

  - 네, 개봉3동인데요.

  사내가 투덜거린다.

  - 이런 제미럴. 아직도 개봉3동이야. 개봉동에서 밤새 걸어왔는데 아직도 개봉3동이란 말야. 어이 기사. 차 세워! 당장 세우란 말이얏!


  - 안녕히 가세요오.

  발차한 지 1분도 안 되어 다시 차를 세우고 문을 열어주는 기사. 그는 늘 해온 인사를 사내에게도 빼놓지 않는다.

  - 알았어, 알았다구. 잘 간다구.

  사내는 그 와중에도 손사래를 치며 답례하기를 잊지 않는다.


  술 취한 사내 하나를 정류장도 아닌 곳에서 아가미 사이로 뱉어낸 버스는 다시 회유(回遊)의 무리에 낀다. 큰길로 나온 작은 몸체의 마을버스는 이제 황소이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버스기사의 뒷머리에서 오래 머물다 되돌아선 내 시선의 가장자리에는 철 이른 송홧가루가 폴폴 날린다.


  구멍 숭숭 뚫린 소음에서 놓여난 긴장은 갑자기 무료해진다. 심심해진 눈길은 차창 밖으로 스치는 세로 간판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참교육 실천센타>

  문득 충분히 부패한 술냄새로 온몸을 소독하고 있을 조금 전의 사나이가 어디로 갔을지 궁금해진다. 사랑교회 쪽일까 아님 참교육 센터 쪽일까. 그 중간에, 내리고 싶으면 누구라도 내릴 수 있는 정류장이 분명 있기는 있었는데.


  회사 정문이 바라보는 곳에까지, 마을버스의 안팎에 매달렸던 상념을 이끌고 와봐도 도무지 그가 향했을 만한 곳에 확신이 꽂히지 않는다.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평소에 오르던 계단도 까마득히 잊은 채.

  출근길에 어쩌다 독채 전세일 수 있는 쇠로 된 우리. 위로 떠오르는 쇠통 안에서 나는 갑자기 사내를 닮고 싶어진다.

  - 야 엘리베이터 너. 서! 당장 서란 말이얏!

  또 다시 밤새 걸어서 여전히 개봉동에서 맴돌고 있을 어느 사내의 동창생 하나가 출근길 엘리베이터 안에서 혼자서 외친다. 입술만 달싹이면서.

 

  걸을 때마다 씰룩이는 근육이 아름다운 것은, 본때 있게 긴장하여 보는 이까지도 어우르는 것은, 탱탱한 황소의 앞다리뿐이다. 여전히.

  차안에는 잃어버린 황소를 찾아 헤맸음직한 사내가, 차밖에는 반 쪽의 황소라도 되고 싶어해오던 내가, 서로 흩뿌린 썩은 냄새들. 그 냄새들은 희미하게 여전히 부유하고, 어제의 하루는 오늘 또 시작되고 있다.

 

  낼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소똥 냄새였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참 좋겠다. 

 [04/05/2000]


[追記] 출근하다 보면, 별별 일이 많다. 주변 사람들 혹은 스쳐가는 풍정들까지도

           마음속 창가에 낙서들을 해대곤 한다. 그리고, 그 낙서들을 돌아보는 날이면,

           그들 속의 내 모습을 새삼스럽게 발견하게 되곤 한다. 출근길에서 돌아나온

           골목길 모습들이 어제의 일처럼  다가오는 일도 그래서 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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