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종 희
인터넷 세상이 되면서 정보 주고받기의 형식에서 가장 큰 변화가 생긴 것을 두 가지 들라면 바로 이 쪽지(문자)와 메일의 왕성한 유통과 일반화 현상이 아닐까 한다.
그 중의 하나인 메일. 그것이 업무에 이용되면서부터, 이 이메일기능은 알게 모르게 엄청난 일을 해내고 있다. 사진 자료조차 스캔 처리로 첨부되는 순간 천연색 자료가 그대로 전송되고, 엄청난 양의 문서들도 첨부 버튼 하나로 즉시 배달된다. 팩스로 한 장 한 장 복사해서, 그것도 흑백으로만 보낼 수 있었던 시절에 비하면 그 속도나 양, 종류 면에서 입이 딱 벌어진다. 펀치 구멍들과 씨름하던 텔렉스 시대를 거쳐, 손발의 수고가 필수적이던 팩스 시대를 몸으로 때워온 사람들이라면, 이따금 그러한 변천을 돌아보며 교신 체계의 대폭적인 변화에 새삼 놀라곤 한다.
그처럼 편리해진 메일. 그건 대체로 정리된 정보를 담는다. 어떤 형태로든 일차 갈무리를 거치기 때문이다. 상세한 설명을 부가하면 장문이 될 때도 있다. 자초지종을 늘어놓느라 그리 되기도 하고, 까닭과 결론까지 제시하다보면 저절로 그리 되기도 한다. 그렇게 길어질수록, 쓰고 나서 한 번 더 보게 된다. 그럴 때가 대부분이다. 긴 메일일수록 한 번 더 다듬어진 것일 때가 많다. 대체로.
물론 개인 간의 편지처럼, 많은 내용을 담고 있긴 해도, 시간에 쫓겨 얼른 대충 적느라 어느 정도의 어법적인 오류나 띄어쓰기 따위를 무시하고 보내도 좋을 그런 경우들도 적지 않다. 업무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접촉 빈도가 잦아서 친밀한 사이일수록 더욱 그렇다.
쪽지(문자)라는 것도 있다. 상대방과의 교신 목적으로만 보자면 메일과 비슷하지만, 가만히 보면 그 쓰임새에서 전혀 다른 역할을 해낸다.
가장 큰 차이라면, 메일은 위에서 적은 것처럼, 틀과 내용면에서 다소 공식적이다.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떤 틀 비슷한 것이 있고, 내용면에서도 최소한 앞뒤 연결이 되는, 말 되는 소리를 적게 된다. 심지어 개인 간에 허물없이 주고받는 사이라 해도 최소한 캐주얼 차림으로 할 말들을 한다. 그 반면, 가깝거나 가까워졌다고 여기는 사람들 간에 주고받는 쪽지(문자)는 다르다. 잠옷 차림에 가깝다. 음담패설 수준의 쪽지는 아예 팬티 바람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그래서일까. 쪽지(문자)를 주고받으면 그것에다 채팅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수다 떨듯 일상사들을 편하게 주고받는다는 의미다. 편해지는 사이일수록, 잘 아는 이들일수록 수다에 가깝게 된다는 특징도 있다.
채팅을 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는 덜 공식적인 대화, 덜 논리적인 어법들이 쓰인다. 편하게 대화하려는 목적이 바닥에 카펫처럼 깔려 있고, 채팅을 지배하는 건 그러한 대화를 통한 개인적/정서적 안온함의 추구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쪽지(문자)는 정서적 위안을 위한 일대일의 접촉 수단으로서 아주 유효하다. 쪽지로 업무적인 내용을 전파하거나 통보하는 일은 그러므로, 거의 있을 수가 없다.
정신없이 수다를 떨다가, 깜박 잊었던 게 뒤늦게 생각나서, 아 참 소리를 앞세우면서 서둘러 업무 관련 얘기를 끼워 넣는 경우가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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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통한 개인과의 교류에서 주로 주고받는 수단이 쪽지(문자)인가 메일인가에 따라서 사람들이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딱 잘라서 구분하기에는 무리일지 모르지만, 부류별 성향이 다른 것만은 분명하다.
예컨대, 쪽지(문자)를 선호하는 쪽지파의 경우는 감성지향적인 성향을 더 많이 보이는가 하면, 길지 않은 메시지일 경우에도 메일에 의지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그와 반대로 이성지향적인 성향이 조금 더 강한 식이다.
쪽지(문자)는 현재적이다. 인터넷 공간을 통해서 일대일로 접촉 중인 상태일 때가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쪽지/문자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어설프게 엮어진 망(網)에 불과한 인터넷 세상에서의 접촉 상황을 실체적 현실로 여기며, 거기에서 정서적 교감을 얻으려 든다. 따라서, 현재적 상황에 더 많이 관심하게 되어, 감성 지향 성향을 보인다. 때로는 그것이 즉흥성으로 이어지거나 부풀어 오르기도 한다.
감성 지향은 심정적 보상이 따라야만 비로소 흡족해 한다. 물론 상대방을 통하거나 해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토라지거나 삐친다. 쉽게 삐치고 오래 가기도 해서, 사람들은 그걸 고집 센 것으로 여기기 쉽다. 하지만, 어느 순간이든 심정적 대상(代償)을 확보하게 되면 눈 녹듯이 이내 풀리기 때문에 진짜 고집은 아니다. 진짜 고집은 의지와 결단이 용융된 강건한 결행인 까닭이다. 하여, 감성주의자들의 고집은 이따금 객관적으로 비하되기도 하고, 심지어 웃음거리로 저락하게 될 때도 흔하다.
그러다 보니, 쪽지파(문자파)들은 지속력이 다소 떨어지게 되어, 일관성 부족으로 이어질 때도 흔하다. 다음 쪽지/문자를 할 때면, 이전의 쪽지 내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거나, 아예 기억해내기를 포기하는 게 몸에 배어 있을 때가 많다.
하기야, 쪽지로 오간 것들은 잡담/수다용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삼태기 하나에 죄 담아서 한 번에 내던져져도 좋을 것들이 대부분이니, 굳이 기억할 거리도 안 되긴 하지만...
이러한 지속력 부족이나 일관성 저하는 쪽지파들의 일상생활이나 의식과도 무관하지 않다. 주로 일상적 주변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느라 체력 낭비도 심할 뿐 아니라, 기본적으로 체력이 제대로 뒷받침되지 못하는 경우도 흔하다. 콩나물 체력이라는 요즘 아이들의 성향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우리라.
이 쪽지파는 현재 상황의 순간 판단과 해결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그 바닥에 정서적 감응에 민감하도록 알게 모르게 훈련된 감성 회로가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럴 때면 주변을 무척 의식한다. 자신도 모르게 배어 있는 습관이다.
그러다 보니, 사안에 따라서는 자신의 감성과 무관하게, 혹은 자신의 기분과 다른 경우 정면 돌파 대신 우회 전법을 택하기도 한다. 즉, 드러내지 않고 감추거나, 골머리 아프다는 핑계로 꼬리를 빼되, 그것조차도 드러나지 않게 하려고 애쓴다. 내숭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아주 자연스럽게.
이 내숭은 다시 삶의 공개도(公開度)와 즉결된다. 쪽지파들은 반(半)공개형일 때가 많다. 즉, 완전히 가린 채 잘 보여주지 않으려는 비공개형이 아니고 반쯤만 보여준다.
비공개형과 반(半)공개형의 차이는 친숙해진 이후에 크게 드러난다. 비공개형의 특징은 친숙해지면 봇물 쏟아지듯 자신의 안을 다 쏟아내는 경향이 있다. 반면, 반공개형은 친숙해진 뒤에도 습관적으로 자신의 일부를 가리는 성향을 끝내 완전히 덜어내지 못한다. 이것은 자신에게조차도 100% 자신감을 심어주지 못하는 확신 부족에 더하여, 타인에 대해 일반적으로 지니고 있는 낮은 신뢰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신감도 없지만, 타인들을 100% 신뢰하지 못한다.
이러한 자신감 부족은 어떠한 결정을 내릴 때 즉흥적인 경향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지연되거나 일관성 부족으로 나타난다. 즉, 기분이 좋을 때는 즉흥적 결정에 자신을 쉽게 맡기지만, 감정의 득실과 관련된 사항에서는 결정이 지지부진하고, 진지한 수고를 필요로 하는 일들에서는 일관성 부족, 인내력 결핍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황 파악과 전후 과정의 이해에서 주로 의지하는 것은 객관적인 판단보다 주관적인 인식 중심이다. 따라서, 과정과 결론 모두가 비논리적인 경우가 상당히 흔하다. 세심히 살펴보고, 전후좌우를 맞추어야 하는 공식적인 상황에서는 당황하게도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예컨대, 제출용 자기소개서 같은 것조차도 전문적인 대필업자에게 의뢰해야 할 정도로, 자기 자신의 객관적 서술에조차 서툴거나 논리성 결여가 흔하다. 논술 시험과 같은 논리적 서술 상황에서조차도 암기형으로 어떻게 해보려는, 임시방편이나 요행수에 의지하는 성향을 보인다. 양과 시간 모두에서 많은 긴장을 요구하는 논리적 상황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들은 장문의 글 따위에서는 얼른 얼굴을 돌려 버린다. 골치부터 아파와서다. 불행히도 이 나라 청소년들의 다수가 그렇다. 걸핏 하면 이른바 <귀차니즘>을 내세우는 청장년층에서조차도 빈번하게 눈에 띈다. 불행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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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파에 비교되는 사람들로 메일파를 들 수가 있다. 이들은 쪽지파의 성향과 대체로 대칭 지역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감성 지향의 반대, 곧 이성 지향적이라는 점이다.
메일은 현재는 물론 과거와 미래를 아우른다. 현재 중심적인 쪽지와는 그 점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메일 지향적인 사람은 인터넷 망에서의 엮임에 대해서도 장기투자 쪽이다. 한 군데에서 대체로 오래 머물고, 아이디를 바꾸는 일도 드물다. 여러 곳의 사이트에 드나들어도 한 가지 아이디를 쓰는 경우가 많다. 변신하여 감춰야 할 과거가 많지 않다.
그러므로 메일파들의 경우에는 일관성과 지속성 부분에서는 돋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손가락질의 대상으로 여러 사람에게 오르내리게 되면 똥고집으로 몰리게 되기도 한다. 그런 경우에조차도, 그들은 자신의 신념과 이상, 그리고 철학을 들어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는 성향을 보인다.
이들은 그러므로 대체로 내숭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해결책을 최우선으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물론 논리적 사고를 통한 판단을 동원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때로는 직관을 굽히지 않을 때도 있다. 이런 이들이 그 판단을 행동으로 옮기면 과감하게 보일 때가 많다.
때문에 이러한 유형의 행동 양식이나 결과를 두고 씩씩하다거나 남성적이라고 이를 때가 많다. 물론 우호적 시선으로 바라볼 때다. 비우호적이거나 악의적인 깎아내림이 작용하면 잘 해야 저돌적이고, 심하면 무지막지한 우매함으로 치부된다.
그러므로 이들의 행동은 삶의 공개도 측면에서 대체로 반공개형 이상에 속한다. 활짝 열어젖혀 속내를 훤히 드러내는 최상층부터, 조금 삐져나온 속옷을 사람들 앞에서 대수롭지 않게 도로 집어넣을 정도로 담백한 여유가 있는 사람들까지, 대체로 내숭과는 일정한 거리들을 두고 있다.
그래서일까. 쪽지파에 비해서는 자신감들이 한 수 위다. 즉흥성의 스펙트럼은 다양하지만,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쪽지파와 다소 다른 모습을 보인다.
메일은 대체로 쪽지보다 양이 많다. 길이가 길다. 장문이 될 경우도 드물지 않다. 당연히 메일파들은 쪽지파에 비하여 긴 글 쓰기에 강하다. 논술시험과 같은 경우에 힘을 발휘할 정도로... 학문의 세계에 학자로 뛰어든 이들이나 연구개발직, 기획직, 상층부 경영관리직들이 대체로 메일파에 속한다.
이러한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은 젊은 시절에도 쪽지파와는 다르다. 위에서 예로 든 자기소개서 같은 것을 대필에 의뢰하는 경우는 드물다. 자신이 직접 하고, 그럴 때 잘 만들어져 있는 것을 참고할 정도로 앞뒤 헤아림과 준비성이 쪽지파의 <귀차니즘>을 밟고 나간다.
이러한 쪽지파와 메일파를 두고 내향형이나 외향형의 어느 한 편에 이들을 배속시키는 것은 무리일 듯하다. 논리적 사고만 두고 보자면 내향형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MBTI에서 규정하는 사고형(T)과 감정형(F), 직관형(N)과 감각형(S)의 구분에서는 어느 정도 편 가르기가 가능할 듯하고, 그 내용은 이미 앞서 언급한 바 있다.
이제 글 마무리를 짓자. 쪽지파와 메일파를 두고 단순한 어느 편의 장단점에만 착안하거나, 모든 인간을 이 두 가지 형으로 단정하고 싶지도 않다. 중간성향자들 역시 적지 않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으므로.
그리고, 그처럼 우리들을 단순 2분법으로 일도양단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들의 가치를 강박하여 협소화하는 우를 범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런 우를 범하고 싶지는 않다. 나름대로 다 쓸모가 있어서다. 마치 이 세상의 계층 구조에서 하부기층이 없이는 상부층도 존재할 수가 없고, 중간층 또한 완충지지 역할을 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일상에서 수도 없이 날리고 날아다니는 쪽지와 메일들을 바라보는 일은, 어찌 해도 꽤나 재미있다. 인터넷 세상 덕분에 누구에게든 아무 때라도 그리 할 수 있는 우리의 교신 환경을 돌아보면서, 거기서 너와 내가 예외일 수 없는 그런 상황들을 잠시 손바닥에 올려놓고 곰곰 헤집어 보는 일은 잠시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게도 해준다.
나는 어떤가. 쪽지 집과 메일 세상 사이에서 어디쯤 위치하고 있을까 하고 말이다. 쪽지라는 요술 빗자루를 타고 이 집 저 집을 기웃거리느라 더 바쁜 걸까, 아님 우편 배달부의 가방에 담긴 편지처럼 목적지 주소를 달고 그곳들만을 향해서 뚜벅이 걸음을 하는 데에 더 많은 시간과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관찰 한 가지만 덧대기로 하자. 남성의 야망은 여성의 최음제라는 말이 있다. 그처럼 야망이 크고 행동적이며 씩씩한 남성들 앞에서 여성은 녹아든다(?)는 말이다. 한 마디로 가장 확실한 메일파 남성들을 여성들은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말도 된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그 다음이다. 그러한 남성들을 좋아하는 여성들의 대부분은 쪽지파이고, 나아가 그러한 남성들이 그녀에게 가장 자주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수시로 쪽지를 보내주는 것이라고 한다. 메일파 남성을 삶의 도구로 소용하고 의존하되, 그에게서 바라는 사랑 방식은 그와 반대인 쪽지파의 행위들이니, 그 결합은 어떨까.
남녀간의 결합이 항상 찌걱거리고, 중년부인들의 상당수가 까닭 모를 우울증에 시달리는 건, 혹시 이러한 어긋난 바람 때문은 아닐까.
돈 잘 벌어오느라, 고위직으로 힘주느라, 혹은 이런저런 방면에서 잘 나가느라, 밖에서 아주 씩씩한 남자들 중에서, 집에 와서 아내에게까지 그 씩씩함을 자상함으로 녹여 바치는 데에 우등생이었던 이들은 역사를 뒤져봐도 별로 없었던듯하다. ㅎㅎㅎ. [Nov. 2006]
<쪽지만 보내줘도
안 잡아먹지!>
<쪽지 하나
보내는 게
그리 힘들단 말얏?>
<거봐. 쪽지 하나에도
내가 이리 행복해지는데...>
<가만 있어봐.
차 한 잔 마시구 생각 좀 해볼게>
<급한 일부터 우선 처리하고>
<이제 돼얐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