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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穗談]어느 날 : '무한경쟁'적 '여성' '섹스'의 '脫都市記'

[내 글] 수담(穗談)

by 지구촌사람 2012. 5. 16.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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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 '무한경쟁'적 '여성' '섹스'의 '脫都市記'

 

                                                         

  주말입니다. 출근길에 나서는 발걸음도 가볍습니다. 목을 옥죄는 넥타이를 풀어 젖히고 남방에 콤비 차림으로, 거기에다가 오랜만에 까만 구두가 아닌 갈색 구두를 신고 나서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달랑거리는 종 모양으로 생긴 구두 장식도 찰랑거리며 발등을 간질입니다.

  사무실에 도착합니다. 오늘은 평소처럼 책상 위에 놓인 대여섯 개의 신문을 죄다 훑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초급간부 자리에 오른 이후로 내내 남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서, 아니 속으로는 조금이라도 앞서고 싶어서, 이십여 년 가까이 일터에 나오면 빼놓지 않고 해온 경제신문 읽기를 오늘은 하루만이라도 건너뛰고 싶어집니다.


  오늘은 왠지 그 동안 내내 전공 필수과목처럼 내키지 않아도 해왔던 그 의무적인 작업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업무처럼 되어버린 일과(日課)전 신문 읽기에서 놓여나고 싶어집니다. 오늘만은 왠지.

  나는 00일보라고 적힌 일반지 한 가지만 남기고 나머지 신문들은 접객용 테이블 로 옮겨 제호들이 보이도록 차례로 정리해 놓습니다. 문득 경제지들에 붙어있는 신문 제호에 눈길이 갑니다. 하나같이 00경제로 끝나서 그 뒤에 무슨 일보니 신문이니 하는 말이 없습니다. 제목으로만 보자면, 일보도 아니고 신문이라는 말도 없으므로 그런 신문에 관심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매일 매일의 새 소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경제지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은 최소한 그 만큼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신문들을 꽉 채우고 있는 골치 아픈 숫자들에 매달리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내 책상 위에 남아 있는 신문을 펼칩니다. 정치면은 대개 그냥 건너뜁니다. 이 나라 정치라는 게 하도 말도 안 되는 코메디일 때가 대부분이어서 보지 않아야 속 편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기고란은 꼭 훑습니다. 외부 필진의 경우는 신문쟁이들의 직업적 시선과는 어딘지 조금 다른데다 대체로 조금 더 정성을 들여 쓰기 때문에 아주 조금은 신선한 맛이 있습니다.

  제목과 필자의 얼굴을 보고 제목이 맘에 들면 코를 박습니다. 1-2분 정도 투자합니다. (그 동안 하도 많은 자료들을 빨리빨리 읽어 젖혀야 하는 바람에 내가 체득한 재주가 있다면 그것은 속독입니다. 웬만한 소설책 한 권은 두어 시간이면 되고, 신문 대여섯 가지의 제목과 주요기사를 빼놓지 않고 읽어보는 데 삼십 분 정도면 족할 정도로 발전(?)했거든요.)


  오늘 기고 글은 그 제목부터 썩 맘에 듭니다. "창조하는 삶이 아름답다". 윤 모 변호사의 글인데, 무조건 이기고 보자는 이 시대의 무한경쟁이 우리를, 특히 우리 아이들을 얼마나 피폐하게 하는지 담담하게 적고 있습니다. 시원하게 핵심을 집어내는 깜냥이 필자의 평소 성찰력의 깊이와 끈기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경쟁력만 갖춰주면 자녀들의 미래가 보장될 거라는 식으로 가치 전도의 현상이 심화되는 바람에, 이기느냐 지느냐의 경쟁에 빠져서 일 자체의 가치는 뒷전이 되어 버렸다며 이 시대의 무한경쟁의 폐해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간디나 슈바이처, 마더 테레사는 어느 누구와도 경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고의 인간으로 존중받고 있다고 하면서 빌 게이츠의 얘기도 보태고 있습니다. 하버드대라는 경쟁세계에서 빠져 나와 오직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섰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라면서요.


  그런 광범위한 무한경쟁에 희생되는 바람에 자신의 삶을 남과 비교하도록 해서 자신을 늘 불행하게 만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경쟁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발버둥치는 '안타까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필자는 날카롭게 꼬집고 있습니다. 비교하는 데에 버릇이 되어 버린 삶, 남보다 나아 보이기 위한 삶이 우리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차분하지만 매섭게 질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말도 적었습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창의력을 키우자는 것과 창의적인 삶을 위해 창의력을 키우자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입니다.

  어쩌면...... 그 역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요즘 내가 직장생활을 다시 시작하면서 새삼스럽게 떠올리게 된 화두가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해 반만에 내 주변에서 새로 대하게 되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왠지 모조리 조금씩 낯설었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그것은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다 조금씩 굳어져 있거나 어두워서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대부분이 그처럼 밝은 표정을 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곰곰 겨누다보니 그것은 바로 자신의 삶을 남들과 비교하면서 그 무한경쟁의 틀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게 으뜸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이기기 위한 목적으로, 아니 더 많이는 뒤쳐지지 않으려는 습관적인 절박함에 이끌려서, 그 경쟁의 세계에서 익사직전까지 이르고 있는 삶들 속에는 무엇보다도 꿈들이 없다는 게 보였습니다. 꿈은 모든 창조적인 것들의 모태이자 삶에 진정한 활력을 공급해주는 생기의 근원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들도 홀로 있는 시간이면 그렇다는 걸 늘 긍정하는 사람들이기도 하구요.

 

  무한경쟁. 그 말에 휩싸이거나 휘둘려진 채 죽어라고 내닫거나 끌려가는 부모들 뒤로 이제는 우리 아이들까지도 죄다 한 줄로 꿰어있는 게 보여서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 숫자들이 줄기는커녕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주요도시의 학원 숫자가 매년 5% 비율로 늘고 있답니다.

  어떤 삶이 가치 있은 삶일까요 하면서 OX 문제로 출제되면 거의 100% 정답을 댈 정도로 모두가 머리속으로는 꿰고 있으면서도 삶의 현장에서는 오답쪽으로만 돌진하는 그 괴이한 삶의 관성......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 기사를 오려낸 뒤 신문의 페이지를 넘깁니다.

 

                                       *

  여러 페이지를 넘기니 눈에 들어오는 제목이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여성의 성욕 억압하는 사회에 몸으로 맞서"      

  내용을 보니 전에 한번 기사화되었던 여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러 해 전에 10시간 동안 251명의 남성 자원자들과 공개리에 마라톤 섹스를 하면서 그것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했던 포르노 배우 애너벨 청이라는 싱가포르 여인이 그녀의 영화 선전을 위해서 우리나라에 온다는 소식입니다.

  

    (사진 : 포르노 다큐를 촬영할 때의 애너벨 청 분장)

 

  

 

     (사진 좌 : 포르노 다큐 촬영 현장

      사진 우 : 그녀의 영화 선전을 위해 제작되었던 이 나라의 영화포스터)

 

  그녀의 이야기는 그때 단 한번 기사화되었지만 나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법학과 졸업생에다가 미국에서 다시 인류학까지 전공한 이른바 인텔리 여성이었거든요. 그런 여인이 그런 대담한 이벤트를 벌였으니 나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화제가 되고도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이벤트가 이 나라에서는 엉뚱한 부문에서 더 많은 관심을 받기도 했습니다. 처음 그녀의 이야기가 기사화되었을 때 사람들이 더 많이 한 일은 남자들 숫자에 관심한 일과 1회의 섹스에 소요된 시간계산이었거든요. 10시간에 상대한 남자가 251명이면 1인당 채 3분이 안 되는 시간인데다, 중간중간 쉬는 일도 있었을거라면서 1인당 2분 이내였을 거라고 자랑스럽게 계산치를 얼른 내놓으며 사람들은 대단하군 대단해를 연발했습니다. 남자들도 그랬지만 여자들도 그랬습니다.


  나는 그때 뒷전에 있긴 했지만, 그런 이벤트를 벌였을 때 그녀의 나이가 겨우 스물셋이었다는 걸 생각해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그런 행위의 전면에 내걸었던 구호, 곧 여성에게도 성욕이라는 게 있으며 여성도 그걸 떳떳하게 주장할 수 있다는 걸 몸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알몸으로 세상 남자들 앞에 섰다는 말에서는 왠지 설득력이 모자라다는 느낌이 진하게 엉겨왔습니다.

  그녀가 영국에서 공부할 때 당했던 집단적인 성폭행에 관한 기사를 보았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행위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어쩌면 바로 그러한 집단 성폭행 피해자로서의 그녀의 과거에 착목하는 대안렌즈들이 부착되어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는 했습니다.


  그렇게 여겨선지 한국에 발걸음을 내딛는 그녀의 표정에는 왠지 자신이 없어 보입니다. 여성의 성욕에 관한 그녀의 메시지도 그녀의 성행위를 눈요기거리로만 바라보려는 사람들의 시선을 크게 교정해주지는 못한 듯합니다. 이미 그 영화가 개봉된 다른 나라들의 사정들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되레 어린 사람이 그렇게 해서라도 매스컴의 관심을 빌어 '떠 보려고' 한 게 아니냐고 사시로 바라보는 사람이 더 많이 생기고 있다는 추측도 가능하게 합니다. 옆에서 그 기사를 들여다보던 동료 하나가 포르노 배우로 나서기에는 얼굴도 그리 잘 생긴 편이 아니구만 하면서 별로라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을 때 내게도 언뜻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여성의 성욕 해방. 그건 누가 떠든다고 해서 여성들이 들고일어날 일도 아니고, 이제서야 그 말을 듣고 크게 깨우쳤다는 듯이 따라할 이도 그다지 많지 않은 그런 세상이 아닌가 싶은 생각과 함께였습니다. 그러니까. 남성의 성욕 앞에서 피동적인 존재로 머문다고 여기는 여성들을 죄다 해방전선의 전사로 끌어내야겠다고 단정하는 것은 어쩌면 여성들 전체의 자존심을 나이 어린 사람의 편협한 독단에 맡기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마치, 그녀가 뭐라고 하든 그 숱한 남자들과의 마라톤섹스 자체가 그녀를 대하는 세상 사람들의 습관적 대물렌즈가 될 수 있듯이 말입니다. 하여간 아직도 이십 대인 그녀가 벌써 이처럼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걸 보면 일단 그녀가 대단하긴 합니다. 나중에 한참 세월이 흐른 뒤에 그녀가 뭐라고 말할지, 어떻게 변신하게 될지 자못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내 개인적인 깜냥으로는 아들 딸 두엇 데리고 풀밭에서 행복한 모습으로 찍은 가족사진의 주인공으로 보여지기를 희망하기는 합니다만.


                                       *


  신문을 또 넘깁니다. 웬 거미 사진이 여러 장  나타납니다. 아니, 그녀의 기사보다 앞서의 페이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기사도 스크랩해두려고 칼질을 하느라 신문을 드러냈다가 다시 섞으면서 페이지가 뒤엉켰으니까요.

  기사의 제목이 재밌습니다. "거미는 사랑고백 할 때 다리 들고 춤춘대".  <열려라! 거미나라>라는 책소개였습니다. 임문순과 김승태 두 사람이 우리 나라의 거미에 대해 동화처럼 재미있게 쓰고 많은 사진들까지 곁들여 내놓은 모양입니다. 신문에 사진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거미만 봐도 여러 종류입니다. 무당거미, 땅늑대거미, 오각게거미, 손짓거미, 큰새똥거미, 눈깡충거미, 실받이게거미, 긴호랑거미......


  그 중에서도 제일 재미있는 이름은 낯표스라소니거미입니다. 동식물의 이름들을 짓는 그 희한한 작명법을 대할 때마다 그들에게서 이따금 놀라곤 하던 버릇이 또 다시 되풀이됩니다.

  어법과 관찰력으로 보자면 동식물학자들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작가이기 때문입

니다. (그래선지, 웬만한 작가들보다도 훨씬 더 빼어난 글을 쓰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만.)


  내용소개를 보니 집을 짓지 않고 떠도는 배회성 거미의 일종인 늑대거미의 얘기도 있고, 거미줄은 같은 굵기의 강철보다 5배나 강하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배회성 거미에 속하는 늑대거미가 사랑을 고백할 때는 다리를 들어올려 춤을  춘다는 얘기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날쌘돌이로 불려지던 그 늑대거미가 나중에 크고 보니 사실은 암컷이었다는군요. 허 참.

  삶에서 이따금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욱 진지하고 치열한 모습을 보여주는 일

이 적지 않은데, 그 늑대거미도 그런 모양입니다. 그 늑개거미가 사실은 여자였다나... 로 끝나는 기사를 보면서 실은 나도 적잖게 놀랐습니다.


  내가 거미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거미가 아니라 미제(美製) 거미를 통해서입니다. 맨 처음 성교가 끝나면 수컷을 잡아먹는 암컷이 있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보았고, 이어서 그것이 북미 지역에서 black widow로 불리는 거미라는 것을 시차를 두고 알게 된 뒤로입니다.

  그리고 그 거미 이름을 어느 방송에선가 검은 과부로 번역해서 그것을 퀴즈의 정답으로 강요하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때쯤은 이미 재미 동포인 어느 젊은 여인이 (아직 대학생일 겁니다. 중간에 한번 손을 뗐던 당구에 다시 몰입하느라 학교까지 빼먹어서 늦은 나이에 다시 다니느라구요.) 포켓당구의 세계 챔피언으로 등극한 게 이년 전의 일이었고, 작년말인가 올 초쯤에 우리나라의 CF에도 그녀가 출연한 다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당구계에서 그녀에게 붙인 별명이 바로 black widow거든요. 늘 검은 드레스를 입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몸매는 무당거미의 몸통처럼 늘씬하기도 합니다. 여하간 방송에서 번역해서 사용한 바로 그 '검은 과부'가 그 거미의 올바른 이름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대학 중에는 거미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D대학이 있는데 그곳에 전화 한 통만 걸어서 물어만 봤어도 그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진 좌 : 검은과부 거미는 엄지 손톱만 하다. 치명율 80% 이상.

      사진 우 : 자넷 리(이진희). 1971년생)


 

  정식 이름인 Latrodectus라는 라틴어를 사용하거나 차라리 아메리카 독거미라고 하는 게 훨씬 나았을 것입니다. 아마 방송제작진 쪽에서는 수컷을 잡아먹는다니까 (사실은 부화된 알들이 수컷을 잡아먹는 것이지만) 재미로 얼른 과부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어 해서 그러지 않았나 짐작합니다.

  아무튼 거미의 세계를 다는 몰라도 역시 여성들의 힘이 놀랍게 발휘되는 곳인  모양입니다. 하기야 Black widow는 그 종류도 대여섯 가지가 되는데 모두들 암컷의 체구가 수컷보다 훨씬 큽니다. 그래서, 수컷이 살고 보려면 암컷이 알을 낳자마자 그 알을 얼른 딴 데로 빼돌려야 합니다. 쉬나이더와 루빈이라는 사람이 자연과학지(Nature)에 실은 연구기록을 보면 그렇게 해서 수컷이 목숨을 부지한 게 278건 중에 21건만 성공했다는 얘기도 있긴 합니다만......


  하여간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제 자식들이 담긴 알무더기를 어미 몰래 허겁지겁 빼돌리는 수컷의 모습을 연상해 보면 기분이 묘합니다.

  나는 거미 기사 역시 스크랩 대상에 올려 두고 다음 페이지로 갑니다.


                                    *

  "필요한 만큼 생산-소비. 지식인 부부의 脫도시記"

  탈도시 소리만 나와도 나는 전기에 감전된 듯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때쯤은 내 살갗들이 미리 알고 슬슬 긴장합니다.  기사에 코를 박습니다.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 부부가 쓴 책인데, <조화로운 삶>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아, 그거라면 오래 전에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원래 제목이 <좋은 인생을 살아내기 Living the Good Life>라는 걸 기억할 정도로요. 하지만, 여전히 반갑습니다.


  "마음 속 깊이 불만스럽게 여기는 이 삶의 환경을 죽을 때까지 참고 견디는 대신, 다른 삶"을 택하기 위해 뉴욕에서 버몬트의 시골로 내려가 백 살 가까이 행복하게 살아낸 선각자들의 이야기입니다. 펜실베니아 대학 교수이던 남편의 나이가 49살, 부유한 뉴욕의 사업가를 친정아버지로 두고 있던 헬렌의 나이가 38살 때 그 둘은 그 부산한 도시를 벗어났던 것이지요. 까마득한 시절 1932년의 일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까지 그들의 삶은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그들의 책이 출간된 것도 거의 반백 년이 가까워오는데, 그들이 거기서 "미친 듯이 서두르고 속도를 내는 것에서 벗어나 평온한 속도로 나아가고 싶었다"고 적은 것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인 모양입니다.


  그들은 시골에 내려가서 여섯 달 만을 사는 일에 바치고 나머지 여섯 달 동안은 연구와 여행, 글쓰기,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의 대화 교육에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시간에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유용하게 시간을 이용했기 때문에 삶에 안달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먹고사는 일에는 직접 땀을 흘렸습니다. 농산물을 직접 가꿔 먹었고, 자신들의 임금이 나올 만큼만 메이플 시럽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착취를 욕심 낼 잉여가 전혀 없을 정도로만요.


  나는 이십여 년전 어느 날 우연히 내 장래의 소망은 시골살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약초재배와 조림을 하리라 결심했습니다. 그리고는 그걸 꿈으로 간직하고, 거기에 덧살을 붙이는 일로 지금껏 살아왔습니다. 한 때의 푸념 끝에 떠올린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돌아볼 때만 그 모습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게 보이곤 하는 꿈, 눈길을 돌리고 나면 이내 사라지곤 하던 꿈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 꿈은 구체적인 실현을 바로 코앞에 두고 있습니다. 십여 년 안쪽으로 좁혀졌습니다. 돌아보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내 지나간 세월 중에서 혹여 미망에라도 휩싸이게 되는 일이 생길 때마다 항상 그 좌표를 선명히 드러내어 나를 이끌어주었던 것은 바로 그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니어링 부부의 신간소개도 스크랩감입니다. 오려두면서, 문득 그들의 이름을 소리내어 봅니다. Nearing으로도 읽힙니다. Near는 가까이 가다라는 동사도 됩니다.

  가까이 가기. 그들은 이름자에서처럼 가치 있는 삶, 진정한 자유 의지로 때국에 절지 않은 삶을 살아내는 쪽으로 가까이 간 사람들입니다.


                                    *   


  내 책상 위에는 네 쪽의 신문기사들이 놓입니다. 신문에서 오려져 나와 책상 위에 놓이니 이제는 신문 같지가 않습니다. 마치, 시험을 앞두고 마련한 핵심 정리용 요약 쪽지들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한번쯤 더 기억해 둘만한 것들로 추려지는 거 말입니다.

  나는 요약판을 공부하던 버릇으로 제목들만 훑어봅니다. 제목과 연결시켜 글 내용의 핵심을 연상하여 기억을 불러내는 흔한 수법입니다. 1. 변호사의 글 : 창조하는 삶 <-> 무한경쟁의 폐해 2. 거미책 : 거미의  삶 -> 여성성의 강인함과 진지함  3. 애너벨 청 : 여성의 성욕 억압에 대한 성급한 개인화 --->섹스의 개인적 시대 상품화 가능성과의 충돌 4. 니어링 부부 : 지식인 부부의 탈도시기 ---> 가치로서의 자유의 시현과 행복한 개인적 사업(task)의 성취


  이제는 그 네 가지를 통합해야 합니다. 확실한 기억을 위해섭니다. 그러고 보니 그 모든 것의 안쪽에 여성이 자리하고 있는 게 보입니다. 특히, 이 나라 어린이 교육과 남편 교육의 전담자인 아내의 자리가 확실하지 않고서는 그 첫 단추조차 제대로 끼워지지 않을 게 자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한경쟁의 문제에서도 그렇고, 탈도시에서도 그 주도권은 아내들이 쥐고 있지 않습니까.

  탈도시의 최종 승인권자가 아내들이다 보니, IMF 시절 귀향의 문제가 나왔을 때 아내와 갈등을 빚은 남정네들이 심심찮게 많았던 일도 바로 그런 것의 한 단면이었지 싶습니다. 그리고, 거미 얘기를 하지 않더라도 생활의 실체로서나 성애의 주된 평가자로서 여성들이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그 완벽한 효율성의 체계를 떠올리면 그 역시 적잖이 놀라게 됩니다.


  아, 그러고 보면 이 네 가지 이야기를 될 수 있으면 오래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나 자신에게도 이따금 들려주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다시 머릿글자 따오기 방식의 그 익숙한 초보적 암기방법을 동원합니다.

  '무한경쟁'적 '여성' '섹스'의 '탈도시기'.  그러고 보니 기억용 요약판으로도 웬만큼은 말귀가 통하는 거 같습니다.


  나는 비로소 커피잔을 손에 듭니다. 책상 위에 놓여진지 꽤 되었는데도 내내 내 시선에서 벗어나 있던 커피잔을요. 하지만, 오늘 커피는 좀 식어 있어도 괜찮습니다. 신문에서 몇 개의 스크랩을 하면서 마치 장편소설 한 권을 되는 대로 들춰서 읽어본 듯한 기분까지 들었거든요. 하기야, 오늘은 주말이기도 합니다. 어떻게든 한 주일의 인생 주름살을 다시 손질해야 하는 날 아니겠습니까. [22/04/2000]

                                                                    

* [보태기] 자넷 리는 최근 화보 촬영도 하고, 배우 직업도 겸한다고 들었다. 

                                                         (July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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