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한판> 제작팀은 자폭해도 괜찮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라는 영화. 2008년인가에 아카데미 8개 부문의 상을 휩쓸었다. 인도 빈민촌의 소년이 퀴즈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백만 불(11억 원)의 상금을 거머쥔 이야기를 역추적 방식으로 그린 영화였다.
그로부터 세 해 뒤 인도에서 실제로 영화 속의 일이 벌어졌다. 28살의 쿠마르라는 청년이 퀴즈 프로그램에서 5천만 루피(11.3억 원 상당)의 최종 상금을 탄 것. 그 장면이 방송되던 날, 인도 전역에서는 모든 일손을 멈추고 그 프로그램을 시청했고 각 지방의회에서도 회의를 중단하고 티브이를 시청했다. 상금이 적힌 수표를 받자 그걸 아내에게 건넸고 그의 젊은 아내는 눈물부터 쏟았다.
미국을 대표하는 퀴즈 프로그램인 ‘Wheel of Fortune’과 ‘Jeopardy’가 올해(2015) 각각 방송 33주년과 32주년을 맞았다. 독립사에서 제작하여 납품하는 프로그램인데, 전 세계로 방송 포맷이 수출되기도 하고(Wheel...의 경우는 54개국), 영어권 국가에는 작품이 그대로 수출되어 방영되기도 한다(Jeopardy). 그중 Jeopardy의 진행자 알렉스 트레벡은 34년 동안이나 이 프로그램을 맡고 있다.
오래 전 ‘Jeopardy’를 보다가 미국의 지명 중에 ‘s’ 자가 네 개씩이나 들어간 곳이 있다는 걸 새삼 알았다. (Mississippi).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프로그램 중간 중간 소개되는 출연자들의 사연은 인간 승리의 표본이랄 만치, 감동적이다. 그 정도로 이 두 프로그램은 출제 수준도 높고, 무엇보다도 출연자들과 하나가 되어 프로그램에 몰입하도록 이끈다. 그만큼 감동적이다.
우리나라의 장수 프로그램들, 제법 된다. 연예/오락 프로그램을 제외하고 대충만 꼽아 봐도, MBC의 <전원일기>(22년간 방송), KBS의 <6시 내 고향>과 <아침 마당>(24년째 방송 중), 다큐멘터리 <인간극장>(15년째 방송 중)이 있고, EBS에서 이어가고 있는 <장학퀴즈>는 1973년 2월부터 지금까지 42년째로 최장수 프로그램에 든다. 연예/오락 프로그램이긴 하지만 <전국 노래자랑>은 올해로 35년째이고.
이들 비연예/비오락 프로그램 중 장수 프로그램들의 하나같은 특징은 ‘감동적’이라는 점이다. 출연자들이 주는 조용한 감동, 잔잔한 감동, 가슴을 흔들고 가는 감동에서부터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감동까지... 그 감동의 파장과 진폭, 그리고 깊이는 다르지만 그 프로그램을 외면하지 않게 하는 흡인력은 90% 이상 출연자들이 만들어내는 감동이다.
심지어 말없는 자연까지도 그러한 감동을 지어내면 그 또한 명품이 된다. 2007년인가에 두 달 이상 방송되고 재방송까지 되었던 KBS의 <인사이트 아시아 – 차마고도> 같은 것은 주연배우 하나 없어도 최불암의 구수한 해설 하나만으로 시청률을 휩쓸었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와 같은 프로그램 역시 마찬가지다. 얼굴도 모르는 피디 한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시청자들은 아주 편하게, 때로는 카메라의 눈이 되어 풍광들을 쓰다듬으며 함께 걷는다. 이국 풍물의 감동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심지어 <한국인의 밥상>과 같은 경우는 고정 출연자라고는 해설자 격인 최불암 씨 혼자인데도 벌써 4년 반째 장기 방송 중이다. 당초에는 한 해 정도의 기획물이었다고 하는데... 이 프로그램에는 음식 외에 그 음식을 만드는 이들의 모습이 나온다. 그들의 삶이 음식 속에 녹아 들어가 있어서 음식 하나에 인생과 그곳 풍광, 그리고 인심들이 담겨 있다. 그래서일까 갈수록 그 내용이 더 깊어지고 풍성해진다. 나중에 이 프로그램에서 편간한 우리나라 음식 책자가 나오게 되면 스테디셀러 자리는 틀림없이 차지하리라. 이 <한국인의 밥상>도 꾸준히 두 자릿수 시청률을 보이고 있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한 가지다. 퀴즈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주는 감동을 제하면 그것은 뭐 없는 찐빵과도 같다. <우겨>의 경우, 최종 우승이나 달인에 오르는 장면에도 박수하지만, 시청자들은 그 중간 과정에서 더 많이 감동한다. 혼자 또는 두셋이 벌이는 고투/사투 앞에서 함께 긴장하고, 손에 힘을 주기도 하고 박수나 함성으로 응원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리말 퀴즈에서 거두는 수확의 쏠쏠함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새삼 배우게 되는 것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온 가족이 함께하면서, 부모의 무식(?)이 즐겁게 들통 나기도 하고, 아이들은 머릿속에 최소한 한두 낱말은 챙겨 간다. 프로그램 시작 전 노트들을 들고 나와서 적으며 보라고 시키는 집들도 있다고 들었다. <우리말 겨루기>가 거두는 국민적 교육 효과이기도 하다.
어제의 <우리말 한판>. 제작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우리나라 사람의 54%가 국어 실력이 기초 등급 이하라고 적시했다. 백 번 옳은 소리다. 나 역시 내 사전 머리말에 우리나라 교사들의 국어 실력이 100점 만점 기준 65점이라고 밝혔을 정도니까.
그래서 이 프로그램을 통해 국어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고 했다. 뜻은 상찬감이다. 그러나, 그 효과 면에서는 수준 이하의 졸속 기획이라 아니할 수 없다. 국어 실력이 두어 주일 정도의 출연 준비만으로 쉽게 거둬지는 것이든가.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퀴즈란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이다. 그 과정을 이겨내기 위해서 죽어라 파고들어야 한다. 우리말 실력을 쌓기 위해서 최소한으로도 몇 달이 필요하다는 건, 어린애들도 안다. 떼거리로 나가니까, 재미로 나가 보는 거니까 한두 사람이 실수해도 될 것이란 생각을 하게 하는 것, 그 순간 국어 실력 향상이란 목표는 집단적으로 와해된다.
어제의 진행 중 문제점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생각나는 대로 몇 가지만 적어본다.
- 집단으로서의 떼거리 출연
출연자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어쩌다가 정답/오답 행진을 하는 사람의 경우만 거명될 정도로. 떼거리 속에서의 무명에 가까운 일개인은 퀴즈 프로그램에서 가장 문제적 존재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저 부속품의 하나일 뿐이므로.
출연자는 소감이 없거나 적게 마련이고, 시청자들은 출연자들에게서 얻는 게 없다. 감동이 없다는 말이다. 집단 언어 무용 내지는 답안 쓰기 따위를 보자는 것도 아니므로.
그 때문에 출연 희망자들은 자연적으로 감소하게 된다. 이 프로그램이 1년도 못 되어 폐지/하차될 게 뻔한 것은 출연 희망 열기의 자연스러운 저하 때문이기도 하다. 시청자들의 외면 다음으로.
- 우리말 겨루기 출연을 벼르는 사람들의 가치 무시
<우리말 한판>은 우리말 퀴즈에 출연하고자 하는 이들에 대한 가치 파악을 전혀 하지 못한 기획이다. 머리 나쁜 이들의 ‘한탕주의’에서 나온 작품인 듯만 하다. 생각이 깊지 못하다 보니, 시청자나 출연자들을 위한 기획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기획이 되었다. 마치 끼리끼리만 박수하고 좋아하는 텔레토비들의 모습을 보는 듯만 했다.
우리말 퀴즈에 출연을 꿈꾸는 이들의 공통점은 ‘왕년의 우등생’이란 점이다. 공부는 잘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책가방 끈은 짧게 되었더라도 (내 짐작에 출연자 중 30%~ 40% 정도가 고졸 이하 학력자들이다.) 엄청 열심히 살아낸, 이 사회의 이른바 ‘범생’들이 출연을 꿈꾼다. 물론 대졸자들도 많지만, 그들 역시 ‘왕년의 우등생’일 뿐만 아니라, 오늘도 열심히 한눈팔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이란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예컨대, 9급 공무원으로 출발하여 꾸준히 승진한 이들. 지금도 생선가게를 지키고 있지만 성적 우수자에게 주는 표창장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이. 트럭 기사. 우체부로 시작하여 군청 공무원으로 퇴직한 이. 대학 졸업생이 아니어서 간호조무사에 머문 이. 주경야독으로 약대를 나온 약사. 공부방/학습지 교사들. 병상 생활 중 우리말 공부를 시작한 이들. 만학도로 50~60대에 대학을 마친 이들. 야간 당직 전문 간호사 생활을 하면서 책을 놓지 않은 이. 임신 우울증 치료차 우리말 공부를 했던 이. 제대 후 복학 기간까지의 공백기에 우리말 상금을 타서 효도하려던 학생. 부모님 효도 여행을 꼭 보내드리고 싶어서 도전한 중년 여성. 공부하는 모습에서 학생들 앞에서 수범하고 싶었던 교사. 도서 벽지에서 떨어져 지내면서 우리말 공부로 외로움을 덜어낸 이. 자식들에게 공부하라는 말 대신 직접 모범을 보여, 전 가족 독서를 생활화한 이... 등등. 그런 수많은 사람들이 <우겨>에 출연했거나 준비 중인 사람들이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티브이 화면에서 오락/연예 프로그램 따위에 코를 박고 지내는 시간이 아주 짧거나 아예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제작한 이들은 정반대다. 드라마깨나 보고 연예/오락 프로그램 중의 몇 개는 아예 고정 시청자인 이들이 참여한 냄새가 물씬 난다. 어떻게든 연예적 요소를 삽입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도처에서 엿보인다.
- 웬 돈타령 얘기가 그리 많은지
상금 얘기는 대충만 해도 된다. 출연자들에게는 출연 전 교육을 시키니 출연자들은 당연히 알고 있기 마련이고, 시청자들에게는 자막으로 처리해 줘도 된다.
쓸데없이 상금 얘기를 하도 되풀이하는 바람에 문제 해설이나 풀이 시간은 턱없이 짧았다. 시청자들이 함께 문제를 풀어 볼 시간을 방송에서 빼앗아 갔다. 시청자 게시판에 적힌 시청 소감에도 그런 말들이 꽤 많다.
<우겨>에 출연하는 이들 역시 돈 욕심 없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돈만 바라고 그처럼 죽어라 공부하진 않는다. 공부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서 거두는 소득이, 자신을 바라보는 자신의 눈길에 뿌듯함이 어리는 그런 소득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된다. 우리말 공부로 우울증에서 벗어났다는 말을 방송에서 자주 듣는다. 시대의 유행병처럼 늘어나고 있는 우울증 환자들에게 반가운 소식이었으면 한다.
- 퀴즈에서 복불복 개념은 근본적으로 제거되어야 할 요소
KBS의 <일 대 백> 프로그램이 기본적으로 큰 호응을 얻지 못하는 것은 ‘찍기’ 때문이다. 1인 출연자는 저단계에서부터 골라 찍기를 해대고, 백인 출연자들 역시 찍기를 해야만 하는 문제들이 적지 않다. 고난도 문제라고 해서 꼭 찍기를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 프로그램에서는 찍기를 해야만 넘어갈 수 있는 문제들이 유난히 많다. 찍기는 실력과 무관한 복불복의 전형이다.
어제 소개된 <우리말 한판>은 기본적인 틀이 이 복불복 개념이다. 표본팀에서의 정답률보다 높아야만 생존하는... 표본팀의 정답률이 낮을 경우에는 출연자들의 실력이 어떠하든 생존율이 높아진다. 출연자들의 실력보다도 표본팀의 정답률이 더 관건이 된다.
어제 일반인 표본팀으로 거명된 <글쓰기코칭협회>. 한마디로 무척 웃겼다. 앞으로는 그 협회 간판을 내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정답률이 겨우 50%였다니까. 하기야, 울 나라 작가/시인들의 국어 실력은 정말이지 웃겨도 한참 웃기긴 한다. 국립국어원의 의뢰로 조사된 국어 교사들의 국어 점수 평균이 75점이었는데, 그보다도 한참 아래로 내려갈 정도니까.
어제 박완서 님 관련, 일반인 문제로 나온 ‘점심/선전/파죽시세’ 중 ‘점심(點心)’은 사전 한 번 떠들어보지 않는 글쟁이들에겐 백전백패의 낱말이다. 마음(心)을 점검(點)한다는 것이 본뜻으로서, 불교에서 배고플 때에 조금 먹는 음식을 이르는 말이니까
여하간, 이처럼 공개적으로 수모를 당하는 일반인 표본 집단에 선뜻 응할 단체들이 계속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 프로그램의 장기 존속 가능성이 더욱 희박해지는 부분이기도 하고.
- 드라마를 안 보던 이가 보게 되면 그게 인기 드라마다
위의 말은 전설적인 명품(?) 전문 피디 출신으로서 지금은 다시 학교로 돌아가 있는 주철환 교수의 말이다.
다른 많은 할 말들 대신, 나는 아래의 말로 어제 방송된 <우리말 한판>의 졸속 기획, 얕은 겨눔, 협소한 시각을 지적하고자 한다.
‘<우리말 한판>은 <우리말 겨루기>를 즐겨 보아 오던 이들에게서 더 많이 외면을 당하기 십상인 프로그램이다. <우겨> 시청자들은 제작팀보다도 실생활의 품질이 상위에 있는 이들이므로...’
참, 위에 제목으로 쓰인 글귀는, 어제 이 방송을 보고 내게 보내온 메일에 대한 내 답장에 쓰인 글귀다.
[추기]
1. 어제의 시청률은 겨우 6%대에 머문 모양이다. 그것도 새 프로그램이라 하니까 호기심 차원에서
들여다 본 이들의 덕분일 듯. '롱런'은 물 건너 간 듯하다.
2. 출연 후일담 중 상금에 관해서도 뒷말이 많은 듯하다. 마지막 문제에서 성공하지 못할 경우,
250만 원을 놓고 도전했을 때, 취득 상금은 125만 원이 되는데 거기서 세금 떼고 어쩌고 하면
15명에게 돌아가는 건 10만 원도 안 된다면서... 가장 흔히 나오는 말은 '애들 장난도 아니고...'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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