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누군가에게 자유이용권이 되고 싶다
오늘 아침, 마마님께오서 잠깐 좀 도와 달란다.
하던 일을 멈추고 부엌으로 갔다.
불판에 올려져 있는 양은 찜통에 들어있는 게 무거운데,
그걸 욕실 안의 물받이 통으로 옮겨 달란다.
들어 보니 제법 묵직하다.
물어보니, 추석용 단술(감주)이란다.
물에 담가 식혀야 한다면서.
추석 가족모임에 쓰고 먹는 음식은
네 집에서 각자 알아서 해온다.
물론 메뉴는 사전 조정이지만, 이젠 아예 굳어져 있다시피 한다.
마마님 몫은 고전적인 것들.
대체로 손이 많이 가는 것들이다.
감주나 식혜, 묵나물 모둠(고사리/질경이/홑잎나물... 등으로 이뤄진),
고구마순무침, 더덕구이... 따위.
올해엔 거기에 도라지나물, 박속무침, 가지구이, 그리고 겉절이가 보태졌다.
물론 대부분은 자원 추가 메뉴이고 겉절이는 요청 메뉴.
겉절이에 들어가는 ‘우리 집 표’ 소스가 독특한 탓에
인기 메뉴에 들어서다.
(참. 올해는 도라지와 더덕이 모두 야생의 것들로서
그중 장생 도라지는 내가 강원도에서 캐 온 것.
도라지는 100%, 더덕은 70% 가량을 내가 깠다.
그 바람에 엄지의 손톱 밑까지 새까맣게 되어
때가 낀 것처럼 지저분한 모습으로 며칠을 지냈지만. ㅎㅎ)
찜통을 물받이 통 안의 중심에 맞춰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뒤 나오면서, 한마디 던졌다.
괜히 뿌듯해지는 마음에서.
암 것도 아닌 일을 한 것일 뿐이지만, 그렇게라도 티를 내고 싶어서.
(내가 하던 일을 멈추고 내 방에서 즉시 뛰어나왔다는 것이 중요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은 저를 자주 이용해 주세요.
이용료는 무료!
그러자 마마님에게서 즉답이 건너왔다.
-그럼 자유이용권?
마마님의 날렵한 즉석 대꾸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적당한 말대답거리를 찾아낼 능력이 내겐 없었다.
그냥 웃음으로 때웠다.
[마마님의 주특기 중 하나는 빛나는(?) 즉흥 답변이다.]
내 방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을 때다.
그 ‘자유이용권’이란 낱말에 뒤가 켕겨 왔다.
내가 지금까지 누구에게 자유이용권이 돼 본 적이 있기나 했던가.
심지어 아이들에게조차도.
아. 이제 나도, 비록 때늦긴 했지만
정말이지 자유이용권이 되고 싶다.
그 누군가에게만이라도.
아무런 전제 조건도 매달지 않은,
아무나 건너 넘을 수 있는 물막이 담뿐인... -溫草 [Sep.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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