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전에]
이 주례사는 작년에 어떤 결혼식을 위해 준비해 두었는데 써먹지 못했다. 결혼을 앞두고 신부 측에 돌발사고가 생기는 바람에. 끝내 결혼도 못 했다.
주례라는 건 일단 외견상 그럴 듯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함량 부족인 내가 주례로 선택된(?) 것은 특별한 인연 때문. 신랑 아버지의 결혼식 사회를 내가 봐서였다. 그리고 그가 한 말도 크게 작용했다. ‘야. 늬가 내 아들에게 평소에 해주고 싶었던 얘기를 네 수준으로 맘껏 떠벌여 봐. 상소리만 빼고.’
최근 나이 40을 넘긴 노총각이 어렵게 장가를 들었다. 그에게 당부했던 말도 바로 아래의 내용과 흡사하다. 이참에 주례사 대신 그에게 건네고 싶은 말들이기에 올린다.
[Oct. 2015]
써먹지 못한 주례사
-암컷과 수컷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 자리에 함께해주신 분들 고맙습니다. 신랑 신부의 멋진 새 출발은 물론이고 양가 부모님들이 맞이하는 경사에 한마음으로 축하해 주시기 위해서 귀한 시간들을 내주신 것으로 압니다.
볼품도 별로인 제가 이 자리에 선 것은 신랑 아버지와의 인연 때문입니다. 그의 결혼식 때 주례, 아니 사회를, 봤는데 그때 첫 아들이 분명하다며 내기를 했습니다. 첫 아들이면 제가 주례를 보고, 딸일 때는 혼례 비용의 1/4은 제가 부담하겠노라고 했는데요. 천만 다행히도 아들이어서, 뒤늦게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요즘 혼례 비용을 생각하면 참으로 아찔한 일 아닌가요? 하하하.
결혼식장에들 가시면 주례가 늘 좋은 말을 합니다. 그런 데에는 저보다도 하객 여러분들이 더 많이 익숙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수준을 대폭 낮춰서 암컷과 수컷 얘기 좀 하려고 합니다.
암컷과 수컷을 표시할 때, 생물학적 기호로 쓰는 것 있죠? ♀, ♂말입니다. 암컷(♀)은 열십자 끝에 큼지막한 동그라미를 달고, 수컷(♂)은 동그라미 끝에 창을 매달아놓은 듯하지요. 끝의 모습으로만 보자면, 암컷은 원(동그라미)이고, 수컷은 삼각형(창)의 모양으로 압축됩니다.
이 원과 삼각형을 떼어다가 평면에 놓고 보면 천양지차입니다. 모양부터가 상극이죠. 하나는 둥글고 하나는 뾰족하니까요. 사람들은 흔히 둥글게 둥글게 사는 게 좋다면서 원만하게 살기를 자주 언급합니다. 사람이 원만해지라면서요. 원만(圓滿)을 한자 뜻대로 풀면, 동그라미를 꽉 채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원이라는 녀석은 기하학적으로 보면 평면상에서 자신의 안 면적을 가장 크게 늘렸을 때의 형태입니다. 한마디로 최대의 욕심꾸러기인 거죠. 그래서일 겁니다. 일정 면적 안에 똑같은 크기의 원들을 배치하면, 빈 공간이 가장 많이 생깁니다. 서로 최대한의 욕심들을 부린 때문이죠.
그런데, 반대로 똑같은 면적 안에 삼각형을 배치해 보면, 빈틈이 하나도 없을 때도 있습니다. 서로서로 사이좋게 어깨를 겯고 있어서죠. 얼핏 보면 날카롭기 짝이 없는 삼각형이지만 그 뿔 방향을 반대로 해서 어깨를 겯게 하면 그처럼 사이좋은 모습으로 빈틈 하나 없이 평면 공간을 다 채웁니다.
부부도 이와 비슷합니다. 결혼을 하고 나면 아내는 진짜 암컷이 됩니다. 욕심꾸러기가 됩니다. 최대한 욕심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자식들이 잘돼야 하고, 남편이 잘 나가야 하고, 집안이 융성해져야 하고, 나아가 풍족해지기를 소망합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행복한 가정을 이뤄내고 싶어합니다.
남편들은 여지없이 삼각형의 어깨 겯기를 실천합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다 못해, 집으로 끌고 들어오기도 하고, 카운터에서 음식값/술값 계산을 할 때는 카드 빨리 꺼내기 경쟁도 하는데요. 그처럼 친구 앞에서 호기를 부리는 사내들 모습은 여전히 정겹습니다. 그냥 하는 척으로만 끝나는 이들도 있긴 하지만요. 요즘은 보기 드물지만, 예전엔 절친한 친구의 빚보증을 거절하는 사람은 친구도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육신의 존재입니다. 영과 육, 곧 육체와 정신이 한 몸에 기거하고 있지요. 그런데요. 우리말엔 한 몸이 된 부부조차도 ‘한몸’이란 말을 붙여 쓸 수 없을 정도로, 이 ‘한 몸’이란 말은 두 낱말로 이뤄져 있습니다. ‘암수한몸’이란 낱말도 있지만, 그건 동물 용어입니다. 사람이 아닌 하등동물에게만 쓰입니다. 한 개체에 암수 두 생식 기관을 갖춘 것을 이르는 말인데, 지렁이, 달팽이, 선충 따위에만 쓰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최소한 20몇 년에서 30년 이상을 서로 다른 토양에서 자라온 생물입니다. 그러니, 먹고 자는 것에서부터 생각하는 것에까지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서로 보완을 해야지, 그 다름에만 주목하여 한쪽으로의 통합을 강압적으로 시도해서는 안 됩니다. 억지로 한쪽으로 끌어 붙이면 삼각형과 원의 강제 접합 꼴이 납니다. 절대로 하나의 완성된 모양, 근사한 모양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통합 중에 가장 바람직한 형태는 동그라미(원) 속에 창날이 들어가 있을 때 그때에만 그나마 한 몸 형태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결혼은 암컷과 수컷의 결합이자, 육체와 정신의 결합입니다. 남편과 아내로의 재탄생이란 서로 다른 두 육신의 결합을 뜻합니다. 거기서 진정한 암수한몸이 되려면 동물 수준으로 몸수고로 살아야 합니다. 뭐든 연장을 찾아들고 가서 해보고, 변기가 막히거든 팔을 걷어붙이고라도 어떻게 직접 해야 합니다. 해본 뒤 안 되거든 그때 전문가를 부르는 겁니다.
이처럼 촌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꾸미고 뭐 어쩌고 그리 신경 쓰지 마세요. 아내가 ‘몸뻬’를 입든, 남편이 일 년 내내 같은 잠옷을 입든 못 본 척하세요. 그렇다고 해서 결혼생활의 질이 떨어지거나 가정이 흔들릴 일은 전혀 없습니다. 지겨우면 지가 알아서 다른 걸로 달라고 하니까요. 덜 지성적으로 사십시오. 서로 유식한, 고상한 듯한 잔소리를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결혼생활은 유식하거나 고상한 삶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암수한몸이 되려면 하등동물의 수준으로 대폭 수준을 낮추십시오. 상대방을 향한 입은 최소한으로 열고 몸수고는 최대한으로 넓혀서 생활을 일궈 나가십시오.
연애는 상대방이 잘나서, 잘나 보여서, 주로 앞모습을 보고 합니다. 때로는 뒷모습도 보이지만, 그때는 눈에 콩깍지가 껴 있는 때라서 그냥 넘어갑니다. 그렇지만, 결혼하고 나서부터는 다릅니다. 뒷모습을 봐야 하고 또 보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잔소리를 하게 되고 외부의 어떤 일이 가정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걸 빌미 삼아 상대방에게 흠집을 냅니다. 부부싸움의 발단이나 계기는 대개 바깥세상의 일들인데 과정이나 결과는 상대방에 대한 상처내기로 이어집니다.
결혼이 연애와 180도 다른 것 중의 하나는, 상대방을 바라보는 시선이 180도 바뀌거나 바꿔야 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결혼 후에는 즉시, 상대방의 모자람을 껴안기 위해서, 나같이 모자란 사람도 상대방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어야 하거든요. 그렇지 않은 사람은 결혼을 후회하는 일을 자주 하게 됩니다.
아울러 내 모자람을 상대방이 보완하는 걸 기쁘게, 행운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단단히 해둬야 합니다. 그 방식은 대체로 잔소리 형식으로 이뤄지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내의 잔소리를 듣게 되는 사람은 행운아라고 여기시면 됩니다. 그게 가장 속 편한 일이고, 사실 실제로도 여전히 아내의 잔소리를 듣는 사람은 정말 행운아입니다. 단, 남편의 잔소리는 그런 행운에 해당되지 않지만요.
아내의 잔소리를 듣는 사람이 어째서 행운아냐고요? 만정이 떨어져 나가고, 아내의 관심이 바깥세상으로 이동하게 되면 그때는 아예 단 한마디도 하지 않거든요. 대꾸나 대답도 건성건성, 생각은 딴 데 가 있어서,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거나 속으로는 무슨 미물 따위로 여기게 되기 때문이죠. 부부간에 하루에 겨우 몇 마디, 그것도 생활 관련 대화만 몇 마디 오가는 집은 둘 다 상대방을 마음속으로는 더 이상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고 단정해도 좋습니다.
살다보면 부부싸움은 필연입니다. 거기에는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구분도 없고, 자동 면제되는 특권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대통령 부부도 싸우고, 교황도 아내를 거느리던 시절에는 교황까지도 부부싸움 끝에 아내를 갈아치우기도 했습니다. 아내에게 삐져서 처첩을 열 명 넘게 둔 교황도 있습니다.
이 부부싸움과 관련하여, 딱 한 가지를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건 승자에게 아무 것도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승자 패자 모두에게 돌아가는 건 상처뿐입니다. 부부싸움은 처음부터 득 볼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는 싸움입니다. 그러니 싸움을 피하는 게 최상책이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름길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부부싸움 뒤에 제대로, 깊게, 오래, 후회하면 피하는 방책도 나옵니다. 그 다음 차선책은 짧게, 깨끗하게, 얼른 끝내는 일입니다.
이것은 오늘의 신랑 신부보다 30여 년도 넘는 시간 전에 새신랑의 길에 들어섰다가 20여 년 넘게 값비싼 시행착오의 대가를 치렀던, 어제의 낡은 신랑이 때늦은 후회를 담아 알려드리는 비책이기도 합니다. 신혼 초에 제가 장롱 안쪽에 미래의 목표들을 잔뜩 적어 붙여둔 것이 있었는데, 그것보다도 더 먼저, 더 소중하게 적어놨어야 할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아내의 말은 무조건 다 옳다. 아내를 이기려고 억압하거나 강제하지 말라. 아내의 말에는 승복 아니면 침묵 두 가지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 아니다 싶을 때는 그냥 침묵으로 투쟁하라. 언젠가는 반드시 그 중간 지점쯤에서 진실의 모습이 나타나고, 거기서 저절로 다 해결된다.”
얘기를 마칩니다. 요약하겠습니다. : 부부가 된 이후로는 그냥 하등동물 수준으로 살아라. 누구든, 특히 남편은, 부부싸움에서 이기려는 ‘쪼다’ 짓을 하지 마라. 아내의 말에는 ‘마나님 말씀은 다 옳습죠’ 하는 태도로 즉시 그 자리에서 무조건 승복하거나, 아니면 침묵하거나, 둘 중 하나를 즉시 선택하라. 만약 10년쯤 침묵할 일이 생기거든 그때는 이혼하라.
축복의 말 대신 섬뜩한 소리까지 해서 미안하지만, 어제의 낡은 신랑이 치렀던 값비싼 대가를 오늘의 새 신랑은 절대로 치르지 않아도 되는 일종의 특급 비결 삼아서 하는 말이니, 넓은 마음으로 기쁘게 새겨주기를 부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주례는 무료로 떠맡았다는 것도 아울러 하객분들에게 알려드립니다. 하하하. 시간을 줄이려고 말을 좀 빨리했는데도, 시간이 제법 흘렀습니다. 어쭙잖은 이야기를 잘들 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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