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 말하길, ‘자기는 좋아하면서도 남을 비난하는 자들, 정말로 밉다’
“속으로는 아주 좋아하면서도 거꾸로 남을 비난하는 자들도 있다. [확실한 전거(典據)나 주견을 가지고 남을 비난하는] 두 종류의 사람들은 옳다. 그러나 자기는 좋아하면서도 남을 비난하는 자들, 나는 이런 자들이 정말로 밉다.”
세종*이 한 말이다. 그의 재위 28년이 되던 해(1446년)에. 그해는 바로 3년 전에 완성한 ‘훈민정음’을 실험하고 가다듬은 뒤 반포한 해인데, 숭불 문제로 일부 신하들과의 대립이 최고조에 달하던 해이기도 하다. 그때 세종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말이다. [세종실록 111권]
나는 세종의 말을 잠시 빌려서 이렇게 말하고도 싶다. ‘자신은 뒷전에서 은근히 밝히거나 해대면서도 남을 비난하는 자들, 그런 자들이 정말로 밉다’고.
정치판을 기웃거리며 국리민복이니 민생 경제니 소리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명예욕에 꿰인 것일 뿐이거나, 뒷전으로는 마누라의 재테크조차 흐뭇이 바라보거나 부추기기도 하는 비천한 소유욕의 주인공들. 그런 이들이 불쌍해 보이기도 한다. 세월이 조금만 흘러, 자신의 행적을 돌아볼 때도 그처럼 흐뭇해하게 될까 궁금해지면서.
가까이로도 많다. 공교육에 비난의 화살을 쏴대는 일에 앞장서는 이들이 뒷전으로는 오늘도 아이가 학원에 제대로 갔는지 확인해대는 일에 부산을 떤다.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비난부터 앞세우는 이들, 실제로 그들의 일상에서는 자신들 역시 수도 없이 그 원인 제공자 역할을 되풀이해댄다. 대형 교통사고라 할 수 있는 세월호 사건에서 남들 따라 목소리 높이는 일에 뒤지기라도 하면 후진 사람이 된다는 식으로 나서던 이가 그 자신이 유발한 교통사고 와중에서는 삿대질과 고함으로 윽박지르면서 대충 때우려 든다.
댓글 중독자들 모습도 떠오른다. 앞뒤 생각 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까마득히 잊은 채 그저 덩달이호(號)에 무임승차부터 하고 보는 이들... 그런 사람들의 등 뒤에, 저 세종의 말귀를 새긴 명판들을 하나씩 걸어주고 싶다. -溫草 [Sep. 2015]
* 세종과 불교 : 세종은 32년간 임금 자리에 있었다. 조선조 임금 중 재위 기간이 7번째로 길다. 1446년은 재위 28년차. 임금 노릇을 28년 동안 했으면 그야말로 숙달된(?) 임금이었음에도 신하들을 윽박지르거나 함부로 대하진 않았다. 자신의 속내를 내비치는 언행을 극도로 삼갔지만, 올바르다고 생각한 일은 밀어붙였다.
그런 그가 개인적으로 해낸 일은 죽기 직전까지 아들인 문종과 세조와 더불어 삼부자가 수시로 모여 서로 번역한 불교 경전을 비교하며 통일 번역본을 하나씩 정리해 간 게 있다. 그것이 이른바 오늘날 ‘언해불전(언해불전)’으로 약칭되는 것들 중 하나를 이루는데, 그중 지금까지 전해 오는 것은 <금강경삼가해>와 <증도가남명계송>이다. <석보상절>은 그런 세종이 직접 지은 작품이기도 하다.
세종은 조선조 개국 이념으로 채택된 숭유억불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 그리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세종 6년에 전국 유명 사찰 36개소의 폐지에 관해 올린 예조의 계(啓. 정식 공문서)에 적힌 그의 처분은 단 두 글자, ‘종지(從之. 이에 따른다)‘였다.] 자신과 아들들의 개인적 심안(心眼) 개안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불경의 심오한 뜻을 우리말로 쉽게 풀어쓰기 위한 노력을 했던 것뿐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철학적 자기 계발을 위한 노력의 한 가지였다. 그리고 그의 불경 번역 솜씨는 전문가의 수준에 뒤지지 않았다.
그런 세종의 겨눔 덕분에 그 어려운 불경의 이해가 한결 쉬워지게 되었다. 단적인 예로 <능엄경언해>와 거기에 함께 실린 <능엄경요해>에 ‘듣기를 가져, 부처의 부처를 지녔는데 어째서 너는 듣기를 듣지 않느냐’라는 우리말 풀이가 보이는데 ‘부처의 부처’와 ‘듣기의 듣기’의 원문은 각각 ‘불불(佛佛)’과 ‘문문(聞聞)’이다. 그처럼 간단해서 더욱 난해하기 짝이 없는 경전의 뜻을 쉬운 우리말로 풀어 보인다.
세종의 그런 선각자적 노력이 없었더라면 세조의 간경도감 설치나 언해불전 간행 사업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기에 세조는 아버지 세종의 그 큰 뜻을 잊지 않기 위해 거기에 적었다. 간행된 책자에 적었다. ‘장헌대왕의 뜻을 받들어...’라고. 세종은 그의 말년에 더욱 불경의 심오한 뜻을 평범한 우리말로 번역해 내기 위해 매달렸는데, 그것을 마치지 못하고 죽었다. 그 뜻을 세조가 이어 받았는데 (세조는 <석보상절>이 아버지 작품이란 걸 여러 곳에서 세 번씩이나 밝힐 정도), 부자의 각자 번역본을 대조하고 더 나은 번역을 고르던 아버지의 모습은 아들에게 그처럼 깊은 영향을 끼쳤다.
참고로, 52세의 아버지 태종으로부터 22세에 선위 받은 세종은 (태종은 그 뒤로 4년을 더 살다 갔다) 조선조의 임금 중 7번째로 오랫동안, 32년간 임금 자리에 있었다. 가장 오래 임금 노릇을 한 이는 영조로 52년, 그 뒤로는 각각 숙종(46년), 고종(44년), 선조(41년), 중종(39년), 순조(35년) 등의 순서를 이룬다.
세종의 불경 공부나 불경 언해에 관해서는 오윤희, <왜 세종은 불교 책을 읽었을까>가 가장 잘 정리된 책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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