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이런 교수들도 있어야 한다. 인용(認容)해야 한다 : 고려대 정안기, 서울대 이영훈

[내 글]슬픔이 답이다

by 지구촌사람 2015. 10. 1. 06:27

본문

728x90
반응형
SMALL

이런 교수들도 있어야 한다인용(認容)해야 한다 : 고려대 정안기, 서울대 이영훈

 

역사는 승자의 전공(戰功) 기록 나열도, 패자의 아우성도 아니다. 역사의 기록은 그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치거나 채워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떤가. 일제 관련 역사에 대해서는, 그 역사의 해석/적용에 있어서는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애국주의 국가관과 왜곡된 민주주의 일색으로 편향된 시선만 용납된다.

 

교수란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일방적 집단적 사고에 대한 거스름이 본업이다. 새로운 사고방식, 관점을 계발/개발하여 의식의 새 지평을 넓히는 일을 주업으로 삼아야 하는 이들이다. 완고한 수구주의, 편협한 국수주의, 왜곡된 민족주의에 꿰어 역사의 정면을 빗질하지 못하고, 역사의 이면을 꿰뚫어보지 못하는 눈 뜬 장님들에게 경책(警策)* 내리치는 일. 그것이 교수의 기본 책무다. 역사학자가 아닐지라도... 고정관념의 껍데기 속에 갇힌(더 많이는 '가둬 둔') 역사에게 물꼬를 터주어 역사가 알아서 흘러가면서 제 속살을 보이도록 걷어붙이고 나서는 것, 그것이 교수가 정작 해야 할 일 중의 하나다.

 

*경책(警策) : 대나무나 갈대로 만든 납작하고 긴 막대기. 앉아서 참선할 때 졸거나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권태로워하는 사람의 어깨를 쳐서 정신을 차리게 하는 데에 주로 씀. 죽비(竹篦)는 승려가 손바닥 위를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는 데 쓰는 것. 천 명 중 999명이, '경책'으로 적어야 할 것을 '죽비'로 잘못 쓰고 있다.

 

                                                                 *

미국의 언어학자들 몇과 우연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열린 동아시아 언어 관련 모임에 참석했다가, ‘파주 북소리라는 도서 관련 축제가 있다고 해서 들렀다는 이들이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한글의 순혈주의’(純血主義.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처음부터 완제품 문자로 태어난 것을 포함하여, 외래어 수용에서도 선택적/제한적으로 최소화시켜 온 것 등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나의 용어. 하지만 나는 한글의 순혈주의를 고집하는 사람은 아니다)에 대해 의견이 분분해졌다.

 

관점이 영어와의 차이점으로 옮겨졌을 때, 내가 영어는 착한 잡년 언어(honest slut language)’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켈트어, 게르만어,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어... 등의 이민족 언어들을 죄다 받아들여 형성된 언어, 다른 언어들의 간섭에 아주 널리 개방된 언어, 상류층 언어와 중.하류층 언어가 사이좋게 공존하는 언어라는 말끝에, 비유를 그리했다. 물론 나쁜 뜻으로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로.

 

오늘날 영어가 300만 어휘를 넘기는, 풍성한 언어로 발전된 배경에는 그처럼 개방된 언어였던 덕분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비유를 했다. (그에 비해 우리말은 역사적인 낱말, 고유명사 격인 인명/지명, 사건명 따위를 빼면 40만에도 미치지 못한다. 영어의 1/10 . 그중에서 65%를 넘기는 한자어를 빼면 고유어는 10만을 조금 넘긴다.)

 

그런데, 그처럼 심한 표현으로 영어를 규정했음에도 그들은 나를 전혀 비판하지 않았다. 되레 적절한 비유라 여기며, 어떤 이는 박장대소까지 했다. 한국이 더 큰 나라로 훌쩍 자라날 무렵에는 한글도 잡년 언어의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그리되어야 더 넓은 땅에서 생육될 것이라면서.

 

                                                                 *

지난 915일 강의 중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다” “그 시대엔 모두 친일파였다는 등의 발언을 했다고, 고려대 정안기 교수 관련 내용이 인터넷에 올랐다. (그것도 전체적인 맥락은 무시하고 일부 낱말들만 따온, 예의 그 문제적 제보 형태로)

 

고려대 정 교수의 문제적 발언 1호로 꼽힌 위안부’. 그 위안부에 대한 지금까지의 일률적인 애국애족적 시선. 어찌 보면 당연하고 마땅하다. 하지만, 그 실상/진실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관심해 왔는가. 위안부라는 말조차 언제부터 대한 말인가.

 

예전에 그들은 우리의 역사 책 속에서 정신대(挺身隊)’라는 말로 소개되었다. 정신대는 '어떤 목적을 위해 솔선해서 몸을 바치는 부대'라는 뜻으로, 전쟁을 위해 동원한 인력 조직을 미화하기 위해 일제가 붙인 이름이었다. 남녀 모두 그 대상이 되었는데, 농촌정신대·보도정신대·의료정신대·근로정신대 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여성으로만 구성된 경우를 여성정신대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정신대가 일제식 용어임을 뒤늦게 깨닫고, 해방 후 한참 되어서야 허겁지겁 종군위안부로 표현했다. 그러나 종군위안부라는 뜻에는 '종군기자'처럼 자발적으로 군을 따라갔다는 의미가 담겨 있고, 나아가 일본 정부가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도 함께 숨겨져 있다고 자각하게 되어, 관계 법령에서의 공식 명칭을 일본군 '위안부'로 바꿨다. 20세기의 끝 무렵, 해방 50년의 세월을 그냥 흘려보낸 뒤의 일이었다. (유엔인권위원회에서는 위안부라는 용어 대신에 '일본군 성노예'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일본군의 조직적이고도 강제적인 동원 사실을 더욱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식민지 피치민으로서 비극적 집단 희생자가 된 그들에게 위안부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됨에 따라 일본군의 위안품으로 쓰인 그들을 우리는 더욱 안쓰럽게 여기게 되었다. 그런 것이다. 용어 하나를 바꿈에 따라, 초창기의 인신매매 방식으로, 혹은 돈벌이가 된다 싶은 착각에 자발적으로 나섰거나, 쑥을 뜯으러 갔다가 강제로 납치되다시피 했던 이들을 포함하여 강제 징발로 끌려간 그들 모두가 하나의 비극적 희생자로 뭉뚱그려지게 되고, 희생의 품격도 격상되었다. ‘위안부라는 통칭에는 착각 합의형(인신매매형), 배당 차출 및 자원형, 강제징발형이라는 이질적인 층위가 있음에도.

 

그런 과정 뒤에는 정치적 조명을 집중적으로 쏟아 부어 그들을 정치적 미끼로 사용한 당대 정권들의 집요한 시선도 크게 한몫했다. 생각해 보라. 현재 생존해 있는 위안부들은 1920~1930년대 생인데 그 시대에 태어나 독립 운동에 참여한 남자들이 현재 생존해 있을 확률은 그들 못지않다. 아니, 확실하게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그들이 독립운동 조직의 초급 막료, 또는 하급 조직원이었다 할지라도.

 

그런 독립운동 참여자들에게, 정권을 잡은 이들은 얼마나 관심했는가. 어떤 방식으로? 그들의 희생에 비하면, 그들은 현재 턱도 없이 낮은 정치적 조명 가치로 환산된 이들이었기에, 국민들에겐 충분히 식상한 과거 시대의 독립군 이야기의 일단이었을 뿐이기에, 그냥 묻혀 가거나 그저 보훈처에 이름을 올리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해오지 않았는가.

 

정권을 잡은 이들은 국민의 의식 분출구 조작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했다고 치자. 우리들은 어떠했는가. 국사편찬위원회에서조차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개칭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조차도, 이러한 하급/초급 독립운동 종사자들에 대한 총합적인 조사나 연구는 아직도 미완이다. 국가보훈처 자료나 먼지 쌓인 광복회 자료에서 그 일부를 접할 수 있다. 그러니 일반 국민은 물론이고 언론 등에서도 눈길조차 주지 않을 건 뻔한 일이다. 우리 모두는 눈 뜬 장님들이다. 정치적 용도로 집중 조명되거나 정치용 미끼로 던져지지 않은 것들에는 시선을 돌리지 않는 쪽으로 길들여져 온 우리들이므로.

 

                                                               *

정 교수의 또 다른 문제 발언으로 지적된 야스쿠니 신사 문제도 그렇다. 우리는 일본인들의 정신적인 뿌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아니, 얼마나 관심하는가. 관심한 적이라도 있는가.

 

일본은 기독교가 힘을 못 쓰는 나라다. 크리스마스가 공휴일인 아닌 몇 안 되는 나라 중의 하나이고, 아시아에서는 태국과 더불어 두 나라밖에 없다. 이슬람 국가인 중동에서도 크리스마스가 공휴일인데... 일본의 절들은 외관만 보아도 어느 종파의 절인지 한눈에 알 수 있다우리나라는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의 사찰은 문간의 현판을 올려다봐야만 무슨 종파인지를 알 수 있거나, 아예 적혀 있지 않은 곳도 많다.  같은 불교인데도 그만치 서로 다르다.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집 안 부처 모시기를 대부분 금하고 있지만, 일본인들의 집 안엔 불단을 마련해둔 집들도 엄청 많다. 집 안 부처를 모시기 위한 받침대(방석) 가격이 우리의 한복 한 벌 값을 넘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만치 정성을 들인다. 그들에게 현세는 곧 내세다. 내세와 현세가 연결되어 있는 독특한 의식구조를 지니고 있다. 할복자살을 영예로 여기는 것도 그 때문이고, 천국의 존재를 근본 교리의 하나로 삼는 기독교가 일본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이들에게 신사 참배는 그저 그들의 고유한 종교 행사일 뿐이다. 거기에 승자가 박아 놓은 명토일 뿐인 ‘1급 전범의 위패가 놓여 있건 어쨌건... 그들의 신사 참배 행위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정화수를 떠놓고 빌던 우리 어머니들에게 미련하고 무식한 사람들이어서 그렇다고, 맹물 한 그릇에 정신을 파는 웃기는 사람들이라고 무조건 손가락질부터 해대는 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그들의 전쟁 행위까지, 잘못된 식민 통치와 세계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긴 전쟁 죄과까지, 껴안고 덮어두자는 말은 아니다. 그 잘못된 행위를 깨끗하게 시인하고 반성하고 사과하지 않는 것은 탓해야 한다. 다만, 그러한 나무람에다 그들의 종교 행위일 뿐인 신사 참배를 희생양 삼아 손가락질을 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닐까.

 

비난의 표적이 잘못돼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나는 정 교수의 발언이 그런 차원이기를 빌고 싶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교수로서의 직분이기도 하다. 의식의 올바른 표적 구분은 스승들의 책무다. 고승들이 학승들을 그리 이끌었듯이.

 

일본의 식민 통치에 대해서도 그 공과가 객관적으로 밝혀져야 한다. 이제껏 피치자의 울분 토로형 비분강개형 기록 위주의 역사를, 객관적 실적을 중심으로 재편하여야 한다. 정 교수가 언급한 것은 그러한 단초를 마련하려는 의도로 관용하여야 하지 않을까.

 

한마디로, 교수들의 연구/교수 행위는 자율적이어야 한다. 강요적인 구시대적 발상이나 현시대의 일방적인 유행으로 그들의 연구를 억압하거나, 집단/다수의 힘으로 소수의 새로운 발상을 고사시켜서는 안 된다. 아베 수상의 행보를 일본적관점에서 논평한 서울대 이영훈 교수의 발언 내용 또한 그러한 전향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한 객관적, 현상 비판적 관점을 인용(認容)해야 한다. 낡은 틀을 깨려는 몸짓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 그래야 발전한다. 발전적 개인주의를 지향해야 하는 이유다. 교수들은 물론 지성인들이라면 모두가. 이러한 태도는 현대에서 가장 유력한 철학자로 받들리는 칼 포퍼의 비판적 합리주의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그런 교수들을 학생들이 비판을 하든, 혹은 부분적 수긍을 하든, 학생들의 힘으로 스스로 취사선택하여 생각하는 힘을 더 키워나가도록 하는 그런 교육적 환경을 마련해주고 지켜보는 일, 그것이 학생들의 보육장(保育場)으로서 이 사회가 해나가야 할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참에 부끄러운 줄 아세요등의 그 뻔한(?) 선정적 손가락질용 결론부터 앞세우고 보는 소수의(30여 명) 학생들에게도 한마디하고 싶다.

 

유럽이나 미국의 명문 대학에서는 교수가 기존 가치들에 대한 재검토 작업을 하지 않으면 그를 교수로 여기지 않는 풍토가 자리 잡고 있다. <열린사회>라는 말로 비판적 합리주의의 통로를 개척한 칼 포퍼가 마르크스와 아인슈타인을 만났던 빈 대학. 케인즈가 일개 젊은 청년을 대하고서 ()이 왔다고 격찬했던 비트겐슈타인이 머물던 케임브리지 그리고 옥스퍼드. 영원한 철학의 고장으로 자리 매김 되어 온 독일의 유수한 대학들. 그리고 미국의 아이비리그 학교들에서는 하나같이 그렇다.

 

모두 거론하자면 끝이 없을 그런 대학들의 공통점은 교수와 학생 간에 항상 서로 다른 관점들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그것들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거나 하지 않았고 그저 서로 이해하려고만(제대로 알아들으려고만) 노력했다. 수용 여부는 각자의 몫이었고, 교수의 이론을 제대로 (혹은 새롭게) 반박하는 학생들의 답안은 도리어 가점을 받았다.

 

우리나라 학생들 중에서도 그런 이들이 나오길 바란다. 아니, 교수의 의견은 항상 새로운 것이기를 소망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길 바란다. 그처럼 교수의 새로운 관점을 더 새로운 관점으로 변혁하는 노력들을 학구적 자세의 토대로 삼았으면 한다. 나아가 생활 전반에서도 그리할 수 있다면, 그거야 금상첨화일 터이고...

 

앵무새 교수들에게서는 배울 게 없다. 딱 한 가지만 빼고는. 훗날 그런 교수(어른)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 溫草 [Sep. 2015]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