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어젓갈만도 못한 주제에!’
어느 작가가 이와 비슷한 어판장의 조기 사진을 올리고, 거기에 이렇게 매달았다.
‘생명/생선/돈/삶/일상’.
그는 그 조기떼 앞에서 ‘생명’을 생각했다. 그러고는 잊었단다.
작가의 그 생각을 섣불리 짐작해 보자면, 그것은 어쩌면 ‘생선들은 죽음으로 인간에게 돈이 되고 생명의 박탈을 통해서 돈벌이를 하는 게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삶이자 일상이고, 그런 것들에 생각이 머무는 것도, 그걸 떠올리는 사람도 금세 일상으로 돌아간다...’였을른지도 모르겠다.
그 밖의 많은 사람들도 저 사진을 두고 여러 가지 말들을 했는데, 크게 나누면 두 가지. 작가의 제시어에 이끌려 생명의 무참한 박탈을 언급한 이들과, 우리의 일상에 더 많이 무게를 두고, ‘~여 먹으면 맛있다’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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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의 조기들은 상태로 보아, 황석어젓을 담그면 딱 맞을 듯하다. (흔히 ‘황새기젓’이라고들 하지만 그건 잘못. ‘황석어(黃石魚)’는 참조기의 한자어다. 조기 머리 쪽의 단단한 부위가 마치 돌 같은 데다 배 쪽의 누런색도 있고 해서 붙여진 이름.) 예전에는 주로 세 치 이하의 것들을 젓갈로 담갔지만, 요즘은 손들이 커져서(?)인지 어판장에서 생조기나 굴비용으로 즉매가 이뤄지지 않은 채 시간이 흐르면 네~다섯 치짜리들도 젓갈감으로 쓰인다.
젓갈은 어류가 발효와 숙성 과정을 거쳐 전혀 새로운 의미로 놀랍게 재탄생하는 식품 중의 하나다. 참조기는 죽어서 젓갈로 다시 태어나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그 과정을 통해 조기의 생명을 갈무리한 사람에겐 돈이 되고, 그걸 생각하거나 들여다본 우리들은 잠시 두 패로 갈린다. 생선의 생명성에만 착안한 이들은 젓갈 탄생의 의미를 간과하며 비난하기 일쑤고, 젓갈의 맛에만 환호하는 사람들은 탈생명의 과정을 생각하지 않기 쉽다. 그러고는 두 그룹 모두 이내 잊는다. 생각의 방향이 어느 쪽이든. 일상의 압력에 등 떠밀려 지나간 풍경으로 치부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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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는 조기찜, 조개찌개, 조기조림, 또는 굴비 등으로 명찰을 바꿔 달 때마다 그 외양과 내용물이 조금씩 달라진다. 나아가, ‘백조기’(부산 지방에서 ‘보구치’를 흔히 부르는 말. 전남에서는 ‘흰조기’, 법성포에서는 ‘보거치’로도 부름), ‘부세(富世. 조기와 같은 민어과지만 조기보다 몸집이 큼)’, ‘수조기’(조기와 같은 민어과. 몸길이가 40cm 정도로 큰데, 부산에서는 이걸 ‘부세’라고 부름)에서처럼, 조기와 같은 민어과인데다 모양도 비슷해서 몸값을 올리기 위해 붙여진 것들 앞에서는, 어쩌면 ‘조기는 내가 원조’라는 팻말을 높이 들고서, 기를 쓰고 자존심과 정체성을 되찾고 싶어할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의 삶은 다층위다. 그리고 그 삶의 상하 좌우 순환의 매듭에는 사연들이 빼곡하다. 특히, 마지막 순환인 죽음 이후의 그것들에는 특히나 더.
산란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강을 기어오르는 연어. 연어는 최후의 임무를 마치고는 자진한다. 자식들의 먹잇감으로 제 몸을 바치는 가시고기의 부성은 이미 우리들의 눈물샘을 자극한 지 오래다. 그런 데에는 문어의 모성도 빠지지 않는다. 산란 후 자식들을 위해, 제 몸을 내놓기 위해 어미 문어 역시 그 자리에서 자진의 길을 택한다.
죽어서, 죽은 뒤의 몸으로, 더 많은 의미를 남기는 것들은 인간이 아니다. 사람의 몸에서는 죽은 뒤 아주 몹쓸 냄새만 날 뿐이다. 되레 우리가 하잘것없는 것들로 여겨 온 것들이 죽은 몸으로 우리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남긴다. 하등생물들이 인간을 생각하는 동물로 만든다. 그런 것들에 주목하는 이들에게만이지만.
아랫것들이 더 많은 의미, 진정한 삶의 의미를 남기는 건, 때로 사람도 마찬가지다. 높은 것들이 악취를 풍기는 세상에서 그걸 정화하는 이들은 아랫것들일 때가 좀 많은가. 그 한 가지 예로, 사후 장기 기부를 약속한 이들의 99.9%가 이름 없는 이들이란다. 1%(50만 명)가 지배하는 이 나라에서, 죽어서 제 몸이라도 선뜻 내놓겠다는 이른바 사회지도층은 그중 1%도 안 된다. 100여 명도 되지 않으니 1%의 1%는 고사하고, 0.02%도 안 된다. 5천 만 인구로는 0.0002%.
잘난 이들에게, 그러므로, 줄 선물 하나가 있다. 이렇게 한마디 해주는 거다.
‘에이, 황석어젓갈만도 못한 사람 같으니라고’. [Jan. 2015]
- 溫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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