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배꼽으로 나올 경우 원본은 이곳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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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이런 멋진 학형이 있었으면
중국 청나라 때 변법자강에 앞장섰던 캉유웨이(康有爲)의 글씨다.
(예술사학자 고00 교수가 독일 자료에서 발굴한 것임)
호를 장소(長素. '소왕'인 공자보다도 낫다는 뜻)라 할 정도의 패기만만함에 어울리게,
젊은 시절에는 이웃 나라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보며 입헌군주제의 꿈에 부풀기도 했던 이.
나중에는 수구 보수로 회귀하여 마지막 황제 부의의 복위를 시도하는
'복벽운동'에도 참여할 정도로 변절하기도 했다.
위의 글씨를 어설프게 번역해 보자면
'(가려진) 장막을 열고 보니 하늘 가를 달리는 한 필의 말.
숨어 있어 드러나지 않는 빼어난 인재들 중에서도 용이로다'
이런 찬사를 받은 이는 위에 적힌 걸로 보아 '청인'이라는 사람인데
누군지 궁금하다.
혹시 '복벽운동'을 함께했던 장훈(張勳)이라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위 글에 보이는 '장(張)'에서 떠오른 짐작이긴 하지만.
나에게도 이처럼 최고의 찬사를 바치고 싶은 이가 있다면 그 얼마나 좋을까.
죽기 전에라도 그런 이를 벗으로 삼고 싶다. [Feb. 2016]
-溫草
아래 글은 캉위웨이에 대한 모 사학자의 재미있는 인물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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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변법을 국시로 한다 (…) 제도국을 설치하여 불필요한 관제를 정리할 것이며 (…) 유신을 수행할 인재를 등용할 것이며…” 1898년 6월 11일, 청나라의 제11대 황제 광서제는 ‘명정국시(明定國是)’라는 조칙을 내렸다. 그것은 강유위를 비롯한 ‘변법파’가 오랫동안 주장해 온 “법을 바꾸어 부국강병을 모색한다”는 이념을 국시로 삼고 청나라를 전면적으로 개혁해 나가겠다는 선언이었다. 5일 뒤에 정식으로 강유위를 접견한 황제는 그에게 총리아문의 장경상행도라는 직위를 내렸다. 그리고 언제든지 자신의 생각을 황제에게 직접 보고할 권한을 주었다.
20세기에 접어들기 직전, 청나라는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였다. 수천 년 동안 문명의 중심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살아온 중국, 그러나 아편전쟁과 애로우호전쟁, 청불전쟁을 거치며 서양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서구 국가들에게 손도 발도 못 내밀며 연거푸 치욕을 당했다. 급기야 청일전쟁에서는 일본에게까지 무릎을 꿇고 말았다. 여기에 국내적으로도 불안이 커져만 갔다. 태평천국의 난이 천하를 휩쓸고, 결국 서양의 힘을 빌려서야 그들을 가까스로 진압할 수 있었다. 청나라가 얼마나 약한지는 이로써 나라 안팎이 전부 알게 되었고, 더 이상 만주족의 지배를 받지 않겠다는 한족들의 움직임은 물론 위구르나 몽골족들의 웅성거림도 왕조의 황혼을 부르고 있었다.
청일전쟁에서 위해위 해전. 청일전쟁은 중국의 자존심에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이런 가운데 마지못해 서양의 앞선 군사기술을 조금 수용하는 정도로는 안 되며, 서양의 제도와 법률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나라 전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개혁이 필요하다는 변법론이 점차 힘을 얻어갔다. 10년 전부터 계속해서 상소를 올려 개혁을 촉구하던 강유위의 주장이 바로 그것이었다. 강유위는 2년 전에도 광서제를 만나 직접 변법개혁을 주청했지만, 보수파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 정식으로 개혁에 착수한다는 황제의 조칙이 내려진 것이다. 강유위의 마음은 구름을 둥실 타고 북경성 위를 떠돌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개혁의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서양의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지만, 관료들의 수염을 일제히 잘라 버린 표트르 대제나 머리모양에서 옷까지 모조리 서양식으로 바꾼 메이지 유신의 과단성은 아무래도 벅찼다. 그래서 전통과 쇄신을 적당히 섞다 보니 어떤 것은 너무 과거에 머물렀고, 어떤 것은 지나치게 앞서나갔다. 그리고 황제와 소수의 지식인들, 그리고 극소수의 고위 관료들 말고는 개혁의 주체 세력이 없었다. 개혁 세력 사이에도 의견이 엇갈려서, 강유위의 논문이 공자를 모독했다며 불태워 버리라고 한 개혁파 고관도 있을 정도였다. 그나마의 개혁에도 “중화를 오랑캐 나라로 만드는 망발”이라는 보수 세력의 비난이 빗발쳤다. 그 비난의 뒤에는 서태후가 있었다. 오랫동안 실질적으로 중국을 통치했으나, 의붓아들 광서제가 성인이 되자 더 이상 수렴청정의 명분이 없어 뒤로 물러앉아 있던 서태후. 그러나 그녀의 야망은 조금도 식지 않았고, 유형 무형의 권력을 아직도 손에 쥔 채로 언젠가 전면으로 다시 나설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어설프고 위태로운 변법의 개혁은 그 기회처럼 보였다.
강유위는 1858년 3월 19일, 광동성 남해현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고위관리를 배출한 명문이었지만, 강유위의 대에 가까워져서는 그렇게 세도가는 못 되었던 것 같다. 그래도 그의 아버지는 현령이었고, 따라서 아들에게 고급 교육을 시킬 수 있었다. 강유위는 다섯 살에 한시 수백 수를 외우고, 여섯 살에는 <논어>, <대학> 등 경전 공부를 해서 신동으로 알려졌다.
강유위가 자라던 때는 이미 서구 열강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어 나라가 어수선하던 때였다. 그래서 과거를 목표로 하는 틀에 박힌 공부가 갈수록 시간 낭비처럼 여겨졌던 강유위는 25세 때 본 과거에서 낙방하자, 아예 과거에 미련을 버리고 마음이 가는 대로 공부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러면서 유학만이 아니라 불교와 도교, 서양 학문까지 두루 공부하게 됐다. 그러던 그가 “학문이란 나라와 백성을 위한 학문이어야 한다” “이 나라에는 개혁이 필요하다”고 절실히 느끼게 된 때는 1884년, 그의 나이 27세 때였다.
패기 넘치던 젊은이 강유위는 나이가 들면서 수구세력으로 돌변한다. 그는 위대한 개혁가였는가. 어설픈 유생이었는가?
들리느니 분노의 소리뿐, 보이느니 괴로워하는 모습뿐이다. 과부가 된 사람은 남편을 생각하며 밤새 통곡하고, 고아가 된 아이는 서럽고 배가 고파서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노인은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섰고, 노파는 이불도 없이 내내 방구석에 웅크려 잠을 청하며 하루를 보낸다 (…) 백성과 나라끼리 서로 해치고 다투어, 죽은 사람이 성안을 메우고, 피가 흘러 들어 강물이 붉게 흐른다.
남해의 서초산에 은거하며 공부 중이던 강유위는 가까이서 벌어진 청불전쟁에 휘말리지는 않았으나, 그 참상을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왜 이토록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곱씹으며, 그때까지 배운 지식을 총동원해 <대동서>라는 책을 지었다. 그리고 정부에 상소를 올려 개혁을 촉구하는 한편, 광주에 만목학당이라는 학교를 세워 자신의 변법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때 제자가 되어, 강유위와 함께 변법운동을 추진하게 되는 사람들이 양계초, 맥맹화, 진천추, 서근 등이었다.
강유위는 불교와 서양 학문에 접한 후로 전통적인 유교의 가르침에 많은 회의를 품었다. 그러나 유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았는데, 이미 중국의 문화와 정신에 뿌리를 깊이 내린 유교를 정면으로 부정하기보다는 ‘그 본래의 정신을 물음으로써 새로운 제도를 가능하게 하는’ ‘탁고개제(託古改制)’가 적절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유위는 경전 해석이 경직되어 있던 고증학이나 주자학 대신 경전의 숨은 뜻을 비교적 자유롭게 해석하는 것이 특징인 공양학을 주장했다. 강유위가 보기에는 공자 자신도 탁고개제의 사상가였다. 주나라의 사상과 전통을 그대로 받드는 듯 하면서 실제로는 당시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공자 스스로의 사상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이처럼 개혁지향적이면서 전통에의 존중을 잊지 않는 이중적 성향은 변법운동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변법개혁의 주된 내용은 중앙관제를 대폭 축소하고, 자리만 채우고 있는 관료들을 정리하며, 행정절차를 간소화하는 등의 행정개혁, 신학문을 배우는 신학교를 수립하고 그 졸업생에게 과거합격증을 줌으로써 과거제를 사실상 폐지하며, 역서국을 설치해 서양 서적을 널리 번역해 보급하는 등의 교육개혁, 무과를 폐지하고 근대식 군대 체제를 수립하는 군사개혁, 상공업을 진흥하며 철도 부설, 화폐 통일, 조선소 설립 등을 추진하는 산업개혁 등이었고, 이 밖에 여성의 전족을 금지하고 한족과 만주족의 차별을 없애며 새 수도를 건설하는 등의 개혁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변법개혁에는 의회를 설치하고 황제의 전제권을 없애 입헌군주제를 실시하는 개혁이 빠질 수가 없었는데, 당시로서는 너무 급진적이라 여겨졌는지 구체화되지 않았다. 또한 사실상 과거를 폐지하고 서양식 교육 체제로 전환하면서도 과거라는 이름만은 남겨 보수파들의 반발을 무마하려 하였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도 반발의 건덕지는 충분했으며, 특히 행정개혁은 ‘철밥통’을 잃게 생긴 관료 사회 전반에 개혁에 대한 불신과 저항을 불러왔다.
광서제가 유폐되어 있던 영대(왼쪽), 광서제에 대한 배반으로 변법개혁의 숨통을 끊은 원세개
이런 불만을 바탕으로, 서태후는 이미 2선으로 물러앉았음에도 여전히 자기 손에 남아 있던 각종 특권을 활용하여 개혁파 고관들을 견제하고 보수파들에게 유리한 국면을 조성해 나갔다. 광서제와 서태후 사이의 대립이 점점 뚜렷해지고, 서태후가 쿠데타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광서제는 선수를 치기로 했다. 그래서 변법개혁에 긍정적인 태도를 취해 왔던 신건육군을 지휘하던 원세개에게 밀지를 내려 보수파를 공격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원세개가 곧장 달려간 곳은 서태후의 측근인 영록의 저택이었다. 영록에게서 황제의 계획을 보고받은 서태후는 마침내 광서제를 자금성의 영대에 유폐해 버리고, 변법파를 일체 검거하는 정변을 일으킨다. 1898년 9월 21일. ‘명정국시’의 조칙이 내려진 지 백일만이었다. 우연히도, 역시 낡은 체제를 근대식-서양식으로 뜯어 고치려던 소수 지식인들의 모험인 조선의 갑신정변도 삼일천하를 누리고 끝났었다.
당시 강유위는 영국의 도움으로 홍콩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담사동, 강광인, 유광제 등 강유위를 따르던 젊은 지식인들은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황제의 스승이며 변법을 적극 후원했던 옹동화를 비롯한 개혁파 관료들은 파면, 추방되었다. 그리고 광서제는 죽을 때까지 영대에서 나오지 못한 채, 10년 동안 고독과 좌절 속에 신음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최근에 연구를 통해 그가 자연사한 것이 아니라 비소에 의해 독살된 사실을 밝혀냈다.
강유위는 죽음을 모면했지만 이후 15년 동안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야 했다. 그가 마침내 귀국할 수 있었던 것은 1911년의 신해혁명으로 청 왕조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세워진 덕분이었다. 그런데 귀국 후 그의 행동은 왕년의 개혁파와는 너무도 동떨어졌다. 새로 수립된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청 왕실을 복원한다는 ‘복벽운동’에 가담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란 도둑놈에게 나라 살림을 맡기는 꼴이다” “여성에게 자유를 주면 풍속이 음란해지고 세상이 망한다” 등등 ‘수구꼴통’다운 발언을 쏟아냄으로써 그를 지지하고 그리워하던 많은 사람들을 아연실색케 하였다.
'비운의 황제'광서제와 '철의 여인'서태후
사람이 나이가 들면 자연히 보수적이 된다지만, 이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이 당혹감은 그의 대표 저서인 <대동서>를 들춰 보면 더욱 짙어진다. <대동서>는 그가 변법개혁에서 주장했던 내용은 상대도 안 될 만큼 급진적이고 이상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가령 그는 그 책에서 사유재산의 존재가 끊임없는 전쟁의 원인이므로 사유재산을 없애야 하며, 재산의 욕심은 가족을 잘 먹이고 입히려는 데서 나오므로 가족도 없애야 하고, 입헌군주제도 넘어서 황제를 없애고, 나아가 국가도 없애 세계를 하나의 집처럼 만들고 모든 공직자는 선거로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성과 여성의 차별도 일체 없애야 한다고 했다. ‘대동’이란 유교 경전의 하나인 <예기>에서 착안한 개념이라고 하지만, 그 내용은 유교의 핵심인 삼강오륜까지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의식은 불교적이며(“세상은 왜 이토록 고통으로 차 있는가?”), 대안은 서구의 인권, 민주주의, 사회주의가 뒤섞여 있다.
어떤 사람들은 <대동서>는 그가 20대였던 시절에 지은 이상주의에 치우친 저작이며, 이후 변법개혁기에는 보다 현실과 타협하는 쪽이 되고, 그 뒤에는 더욱 보수화된 것이라고 풀이한다. 한편 그의 사상에는 일관성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대동’이란 ‘난세’와 ‘승평’을 잇는 최종적인 역사의 발전단계이며, 강유위가 보기에 당시는 아직 난세에서 승평으로 넘어가는 단계일 뿐이었다. 그것은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넘어가는 단계라는 뜻도 된다. 따라서 그는 변법개혁 때 <대동서>의 정치를 실현하려 하지 않았고, 이후 복벽운동에 참여한 것도 “공화제 이전에 반드시 입헌군주제가 와야 한다”는 자기 사상에 대한 고집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강유위가 동아시아의 전환기를 살면서 각종 사상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미처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못한 채 자신의 사상으로 내놓으면서 이상하거나 모순이 되는 부분이 적잖게 남은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곧 근대화, 즉 서구화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서구화에 저항해야 했던 당시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공통된 모순이었다. 온갖 시행착오를 거치며, 그들은 비로소 알게 된다. 그들이 단지 불쌍히 여기던 일반 대중의 뜻에 따른 개혁, 일반 국민의 현실을 반영한 사상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리 고귀한 개혁이라도, 그것이 전통에 기반했던 서양 사상에 힘입었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변법자강, 그 야심 찬 개혁의 1백일은 광서제도 강유위도 불행하게 했고, 청 왕조의 멸망을 재촉했으며, 중국이 서구 열강과 일본의 손에 갈가리 찢기는 일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깨달음을 주었다. 이제 더 이상 청 왕조에는 희망이 없었고, 2백 년 동안의 만주족의 지배와 4천 년 동안 왕조의 지배는 동시에 끝장나야 했다. 그리고 불안한 리더십과 어설픈 신념을 가지고 한 개혁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교훈과 함께, 그래도 개혁은 멈추지 않음을, 한 번 물꼬가 터진 개혁에의 열망은 누구도 되돌릴 수 없음을 깨우쳐주기도 했다. 광서제는 양어머니의 손에 유폐되어 고독과 고통 속에 죽어갔다. 강유위는 위대한 꿈과 헛된 망상을 오가며 방황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인 불행과 좌절을 넘어, 만리장성보다 두터운 보수파의 철벽을 넘어, 새로운 내일을 꿈꾸는 중국 민족과 민중의 열망은 끝까지 살아남았다.
강유위 본인이 남긴 책으로 <대동서>(을유문화사, 이성애 역)는 그의 사상의 방대함과 상상력의 대담함을 엿볼 수 있다. 동양사상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이 책은 필독서의 하나지만, 앞에서 쓴 대로 이 책만으로 강유위 사상의 전모를 알거나, 변법자강의 과정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시게자와 도시로의 <역사 속에 살아 있는 중국사상>(예문서원, 이혜경 역)은 강유위 사상의 모순과 비일관성을 해부하면서 그의 한계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반면 리쩌허우(이택후)의 중국사상사 3부작 중 하나인 <중국근대사상사론>(한길사, 임춘성 역)은 강유위 사상을 어느 책보다 철저히 분석하면서 그가 비교적 일관성 있게 중국 근대사의 과제를 풀어냈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한편 변법자강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그린 책으로는 임계순이 쓴 <청사: 만주족이 통치한 중국 >(신서원)이 좋다. 저자는 변법자강을 청나라 말기의 지속적인 개혁과 좌절의 흐름 속에서 파악하며, 그 중에서 강유위보다 광서제의 역할에 더 주목한다. 또한 당시를 살았던 사람의 기록으로서, 최후의 황제 선통제의 가정교사였던 레지널드 존스턴이 쓴 <자금성의 황혼>(돌베개, 김성배 역)도 읽어볼 만하다.
글 함규진 서울교육대학교 교수/역사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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