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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7회(2016.7.25.) 우리말 겨루기 : 연예인 특집과 ‘개그맨’ vs. ‘코미디언’

우리말 겨루기 문제 풀이

by 지구촌사람 2016. 7. 26.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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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7(2016.7.25.) 우리말 겨루기 : 연예인 특집과 개그맨’ vs. ‘코미디언

 

-출연자들


김학래 : 63. 개그맨

박상철 : 48. 가수

이경애 : 53. 개그우먼. 방송인/사업가

이애란 : 54. 가수

 

-문제 풀이 : 생략

 

[] ‘개그맨’과 '코미디언'

 

어제 출연자들은 공교롭게도 남녀 두 사람씩이 같은 직업. 그중 김학래/이경애의 경우는 현재 그들의 직업 표기를 개그맨/개그우먼으로 하고 있다.

 

개그맨이란 말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다. 하지만 그걸 그 직업의 당사자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잘 모르고 있다. 이참에, 몇 가지를 언급하기로 한다.

 

1. 개그맨(gagman)은 콩글리시에 가까운 호칭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말이 번지게 된 것은 전유성으로부터라는 게 유력한 설인데, 전유성은 당시 코미디언이란 말이 싸구려 슬랩스틱 희극 배우를 주로 의미하는 듯해서, 그 격(?)을 높이려고 이 개그맨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코미디언이란 말의 진정한 의미를 잘 몰랐던 무지의 소치다.

 

2. 슬랩스틱 코미디[slapstick comedy]

    

슬랩은 과장된 액션을 특징으로 하는 희극으로 철썩 때린다는 의미를 지닌다. 스틱은 본래 광대가 연극할 때 쓰던 막대기를 뜻하는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단장, 막대기의 의미를 지닌다. 이것이 전의되면서 슬랩스틱 코미디는 어수선하고 소란스러운 코미디를 뜻하게 되었다.

 

우스꽝스러움 속에 풍자와 반역 정신을 담은 밀도 있는 이 희극의 형식을 영화에서 본격적으로 선보인 사람은 1910년대 미국의 희극배우인 맥 세넷(Mack Sennett)이다. 이후 찰리 채플린, 바스터 키튼, 워레이 비어리 등이 계보를 이어받아 슬랩스틱 코미디의 붐을 일으켰다. 우리나라에서는 영구 캐릭터로 활약한 심형래, 맹구 이창훈 등이 대표적이다.

 

요약하자면, ‘해학적인 내용으로 익살스럽게 꾸민 연극또는 과장되고 우스운 행위 등을 주요한 웃음거리를 사용하는 코미디로서, 시끄럽고 요란하면서도 극단적으로 과장되고 우스운 행위 등으로 이루어진 익살극이라 할 수 있다

 

3. 희극 배우(喜劇俳優) 또는 코미디언이란

 

농담, 장난, 재치, 우스꽝스러운 표정이나 행동 등으로 관객을 웃게 만들어 즐거움을 주는 연예인이며, 희극(코미디) 장르의 연극,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등에서 연기하는 배우를 포함한다. 따라서 이 코미디언은 멜로드라마, 뮤지컬, 즐거움을 주는 극 전체를 이르는 희극, 스탠드업 코미디(1인 풍자극/재담 등)... 등 도처에 활약하는 연예인을 이른다.

 

영화의 발달로 찰리 채플린과 같은 세계적인 희극 배우가 나타났고, 대한민국에서는 1920년대 유랑 극단의 막간극을 무대로 희극 배우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후 텔레비전 방송의 발달과 함께 주간 코미디 프로그램을 통하여 점차 대중과 친숙해졌다. , 관객을 웃게 만들어 즐거움을 주는 연예인이면 역할의 종류를 막론하고 코미디언(희극배우 또는 희극인)에 속한다. 넘어지고 뒹굴고 하면서 요란한 슬랩스틱 코미디언만을 이르는 말이 아니다.

(좀 더 어렵게 표현하자면, 그리스 시대에 연극에서 희극과 비극을 구분할 때의 주요 기준 중 하나는 인간에 대한 시각이었는데,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보면 희극이고, 우주적 존재로 다루면 비극으로 구분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코미디언(comedian)’희극 배우와 동의어로 보고, ‘희극인(희극을 전문적으로 연기하는 사람)’을 그 순화어로 제시하고 있다.

 

4. 개그맨이란?

 

<표준국어대사전>의 뜻풀이를 보면 익살이나 우스갯소리를 하여 일반 대중을 즐겁게 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으로서, ‘익살꾼을 그 순화어로 제시하고 있다. ‘익살꾼이란 남을 웃기는 우스운 말이나 행동을 아주 잘하는 사람을 뜻한다. 아주 쉬운 말로 하면 말로 웃기는 사람이다.

 

따라서, 이런 익살꾼인 개그맨은 엄밀히 말해서 코미디언보다 격이 낮다. 품격 면에서 떨어진다. 우리말에 어릿광대라는 말이 있는데, ‘곡예나 연극 따위에서, 얼럭광대의 재주가 시작되기 전이나 막간에 나와 우습고 재미있는 말이나 행동으로 판을 어울리게 하는 사람.’을 뜻한다. 얼럭광대어릿광대의 상대어로서 쓰이는 일반적 의미의 광대(전문 분야의 기술을 갖춘), 즉 가면극, 인형극, 줄타기, 땅재주, 판소리 따위를 하던 직업적/전문적 예능인을 통틀어 이르던 말이다.

 

코미디언을 광대(얼럭광대)라 한다면, 개그맨은 이 어릿광대에 가깝다. 재담가내지는 만담가(만담꾼)’ 정도다. 그렇기 때문에 전유성이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개그맨은 코미디언보다 아래 급에 속하게 되는 것인데, 그런 실상을 제대로 잘 모른 채 개그맨이 (슬랩스틱) 코미디언들보다는 고급의 말만 같아서 그걸 애용들 하고 있다.

 

그러니, 혹시라도 우리나라의 개그맨들이 다른 나라에 나가거든 어설피 개그맨이란 말을 고집하지 않는 게 좋다. 그저 막간에서 익살을 떨어 잠시 관객들을 즐겁게 해주는 하급 코미디언 정도로 여기게 마련이므로.

 

위에 언급한 재담가만담가/만담꾼에 쓰인 재담만담의 뜻풀이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재담(才談) : 익살과 재치를 부리며 재미있게 이야기함. 또는 그런 말.

만담(漫談) : 재미있고 익살스럽게 세상이나 인정을 비판풍자하는 이야기를 함. 또는 그 이야기.

 

마지막으로 주의할 것 한 가지. 흔히 로 잘못 적기 쉬운데, 외래어 표기법상 가 그 옳은 표기. 이유는 원어 발음에서 악센트가 앞쪽에 있어서 me-의 발음이 아주 약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실제로의 원어 발음은 머디에 가깝다.

 

5. 한국 최초의 개그맨은 윤부길(윤항기/윤복희의 아버지. 성악 출신의 복화술가)

 

개그맨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연기인은 윤부길(尹富吉)이다. 그가 개그맨으로 인정받은 것은 1940년에 창단되어 수준 높은 래퍼토리를 보여주었던 콜롬비아 가극단의 창단 멤버로 들어가면서부터다.

 

윤부길은 원래 성악을 전공한 음악도였다. 1912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돌아온 후 박용구·황문평 등과 함께 콜롬비아 가극단에 입단, 타고난 기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콜롬비아 가극단은 서항성·설의식 등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민족색 짙은 예술단체. 그들은 식민지 시절 일본에도 원정공연을 가 한국의 혼을 알림으로써 주목을 받기도 했다.

 

윤부길은 이 가극단의 주요 레퍼토리라 할 수 있는 <콩쥐팥쥐><견우직녀>에 출연하여 호평을 받았다. 이 두 작품은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레타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코미디적인 요소를 띠기 시작한 것은 미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복화술(腹話術)을 배워 보여주면서부터다.

 

복화술이란 자그마한 인형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인형과 대화를 나누는 연기. 대화는 물론 연기자 혼자 여러 사람 목소리를 바꿔가면서 한다. 이를테면 인형을 가지고 하는 원맨쇼인 셈. 복화술은 미국에서 크게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다루는 내용은 주로 시국 풍자였다. 따라서 자연히 관중을 웃기는 재능이 있어야 효과를 낼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연기자는 대부분 희극배우였다. 연예계 원로인 황문평이 쓴 연예 인물사에 의하면 국내에서 맨 처음 복화술을 선보인 사람은 전방일이었다. 윤부길은 그 뒤를 이은 연기자라 할 수 있고, 그 다음이 후라이보이 곽규석이었다.

 

윤부길은 복화술을 하면서 자신의 재능을 또 한 번 보여주었다. , 웃기는 재능이었다. 그의 복화술은 가는 곳마다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그는 어느새 희극배우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윤부길은 또 한 번의 새로운 시도로 개그맨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희극적으로 연출한 <춘향전>에서였다. 당시 윤부길의 역은 방자. 이몽룡이 광한루에 놀러가자 해서 갔을 때다. 마침 춘향이 그네를 타며 놀고 있는 것을 보고 이몽룡이 방자를 보내 수작을 거는데, 방자는 말을 붙이다가 춘향의 몸종이 향단에게 호되게 얻어맞는다.

 

그러자 방자는 도련님을 찾으면서 구원을 요청하는데 느닷없이 허리춤에서 수화기를 꺼내더니 이몽령에게 전화를 한다. 거기서 관객은 폭소를 터뜨렸고, 그 기발한 착상에 찬사를 보냈다. 그런 식의 웃기는 연기는 그때까지 어느 무대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시 웃음을 제공하는 연예로는 재담과 만담 그리고 코미디가 있었다. 재담은 전통적인 웃음이었고, 만담은 신불출이 재담을 변형시킨 새로운 웃음이었으며, 코미디는 서양의 희극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부분에서도 윤부길의 연기와 같은 재치와 파격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은관·장소팔 등 그의 연기를 보아왔던 원로 연예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부터 한국에도 개그라는 용어가 등장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재담·만담·코미디로 이어지는 웃음의 세계에 개그의 마당이 처음으로 열리게 된 것. 윤부길의 그런 재능은 학식을 바탕으로 한 본인의 꾸준한 자기계발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성악뿐이 아니라 시나리오도 썼고, 작곡·반주·의상·무대장치에도 능했다. 황문평은가요 50년사에서 본격적인 오페레타 형식의 무대가 윤부길에 의해 시도되었다고 쓴 적이 있는데, 그 무대는 윤부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광복 후에 <부길부길 쇼>를 이끌다가 지병을 견디지 못하고 천안에서 목회자로 있는 형의 교회로 들어갔다. 그러던 1957년 새벽 예배 중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는 아까운 45. 그의 재능을 그대로 이어받았는지 그의 아들 윤항기와 딸 윤복희는 훗날 한국의 유명한 가수가 되었다. (한국 최초 101장면,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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