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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색과 ‘고맙습니다/감사합니다.’ 그리고...

[내 글]슬픔이 답이다

by 지구촌사람 2016. 8. 2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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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색과 고맙습니다/감사합니다.’

그리고, ‘안녕하십니까수고하십니다.’

 

도서관을 서재 삼다 보니 하루에 예닐곱 번 정도는

큰 문을 밀고 여닫으며 드나든다.

휴식을 핑계로 담배를 피러 나가거나 물을 뜨러 가거나

휴게실/화장실/식당 등에 가기 위해서.

그럴 때 내 앞이나 뒤에 사람이 있으면

문을 연 채로 잠시 문을 잡고 서서 다음 사람이 드나들도록 기다린다.

 

그럴 때 나는 그 사람의 다음 말마디가 일부러 궁금해진다.

이 사람은 좀 다를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그럴 때, ‘고맙습니다감사합니다소리를 하는 사람은

열에 한 사람도 채 안 된다. 지금껏 지켜본 바로는.

 

기본 예의 따위가 실종 상태인 10대야 그렇다 치고 포기한 지 오래지만

말끔해 보이는 20~30대는 물론이고

멀쩡한(?) 40대 여인들조차도 그렇다.

도무지 그 간단한 말 한마디를 듣기가 참 어렵다.

 

어느 땐가 그런 말을 할 자리가 있어서

그 얘기를 했더니만

대변인(?)들의 말은 대체로 한가지로 모였다.

부끄러워서, 표현하기가 쑥스러워서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변호에 수긍하지 않는다.

그리고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표현하지 않는 것도 때로는 죄가 된다고.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상대방의 기분을 잠시 휘젓는 일이 되므로.

그리고, 표현하지 않는 것까지 헤아려주는 세상은 아니라고.

 

*

아침 운동으로 단지 몇 바퀴를 속보로 돌던 서너 해 전의 일이다.

(그 뒤론 바닥이 모래흙인 학교 운동장에서 걷기와 체력 운동을 하다가

겨울이면 자주 삐던 발목 부위가 불편해져서 요즘엔 자전거 타기로 바꿨지만.)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들과 마주치면 아침 인사를 했다.

대체로 안녕하십니까?’좋은 아침입니다.

 

그걸 두어 달 하다가 멈췄다.

내 딴에 기분이 좋아서 밝은 목소리로 건네는데도

상대방의 대꾸는 모기소리 수준이거나

심지어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까지 바라보는 여인들까지 생겨서다.

 

그녀들에겐 내 아침인사가 어쩌면

집적거리는 것으로 비쳤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내 기분이 몹시 나빠져 왔다.

서로 기분 좋자고 하는 인사를 두고

서로가 기분 틀어지는 일이라면 안 하는 게 백 번 나은 일이라는

손쉬운 계산도 얼른 뒤따라 나오며, 내 기분 마무리를 거들었다.

 

*

등산길이나 동네 산길에서 오가는 사람들끼리 마주치면

대체로 인사를 한다.

수고하십니다아~’가 거의 그 표준형이라 할 만치 흔히 쓰인다.

 

수고하십니다는 사실 손위 사람에게는 쓸 수 없는 말이지만

산길에서는 손위/손아래의 구분 자체가 불필요하긴 하다.

모두다 산에서 만나는, 산사람들이니까.

산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평등하니까.

 

그런데, 이처럼 동네 산길에서 만나는 사람이라도

아침 운동 길에 만나면 사정이 달라진다.

산길에서 서로 인사를 나눌 정도로 확실히 얼굴을 익힌 처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한쪽에서는 알아볼 만한 그런 사이라 해도

동네 운동 길에서는 봐도 못 본 척이다.

그게 상례화되어 있고, 그리되어 간다.

 

그래서일까.

요즘 아침 자전거 운동 길에서 대하는 몇몇 사람들의 인사 앞에서

내가 도리어 당황해 한다.

내 라이딩 코스는 호수공원 주변을 두어 바퀴 돌고

건강공원을 전후좌우로 훑은 다음

자운학교 맞은편 도로를 따라 운정고를 바라보며

크게 한 바퀴를 하는 대략 한 시간 코스인데

그 길에서 간간이 나와 역방향으로 주행하는 이들과 만난다.

(호수공원 쪽은 일방통행이어서 마주치는 이들이 없다.)

 

그들 중 몇몇 사람은 인사를 한다.

수고하십니다좋은 아침입니다쪽이다.

처음에 사내들(?)이 그런 말을 할 때는

걷는 이들과는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라서 그런가 싶기도 했다.

 

그처럼 인사를 하는 이들 중에도 여인들도 있다.

더구나 아침에 자전거를 타는 여인들은 주로 호수공원 쪽에서 하는지라

나와 역주행으로 마주치는 여인은 아주 적은 편인데

놀라운 것은 그들도 산사람들처럼 인사를 한다는 점이다.

최소한 손을 들어 흔들거나, 명쾌한 소리로 아침인사를 한다.

 

*

K 도서관에서의 일이다.

집 앞의 도서관이 격주 휴무라서 휴관일이면 난 그곳으로 가는데

거기 갈 때마다 자주 마주치는 한 여인이 있다.

그녀 역시 내내 문 앞에서 예의 말없음표족에 속했는데

며칠 전 깎듯이 고맙습니다의 인사를 던지는 걸 대했다.

늘 해맑은 얼굴의, 나와 알고 지내는, 관장에게였다.

좀 이상해서 관장에게 다가가서 살짝 물었다. 아는 사이냐고?

돌아오는 답. 계약직 사서 보조에 응모했던 사람이란다.

 

어느 날, 집으로 가려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는데

마침, 주차장 쪽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엘리베이터 문을 열어둔 채 잠시 기다렸다.

여인 하나가 뛰어들 듯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오면서

고맙습니다소리를 한다.

얼굴을 보니 집 앞 도서관에서 가끔 마주치는, 말없음표 여인.

 

그날 우리는 같은 층에서 내렸고

같은 현관문 앞에 섰다.

상담차 우리 집에 처음 오는 딸내미 방문 가정교사였다.

여인은 진 모친과만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진 모친이 내린 결론은 아닌 듯하다쪽이었다.

나는 아무소리도 안 하고, 그저 듣기만 했다.

 

*

갈겨니나 피라미를 보면, 배 쪽이 붉어지면서 아주 멋있는 색을 띨 때가 있다.

번식기가 되면 수컷들의 몸 색깔이 그처럼 다른 색으로

멋지게 변하는데, 그걸 혼인색이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정액을 만들고, 암컷을 꼬드기기도 한다.

 

피라미/갈겨니 외에도 연어/황어/은어/가시고기 등의 수컷에서도

그와 같은 혼인색을 볼 수 있다.

그럴 때면 금붕어 못지않게 예쁘게 보이기도 한다.

번식기가 지나면 본래의 무덤덤한 색으로 돌아가지만...

 

필요에 따라, 잘 보여야 할 때만 인사를 하는 이들.

어쩌면 그들의 인사법은 이 번식기의 혼인색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자신이 필요하지 않을 때면 지극히 간단한 서로간의 인사나 고마움의 표시조차도

아예 생략한 채 살아가니까.

 

그건 다른 무엇보다도 그 자신에 대한 결례다.

고가로 매겨 온 자신의 값을 얼결에 깎아내리는 일이므로.

간단한 인사 하나가 얼마나 그 자신을 맑고 밝게 해주는지

그걸 맛보지 못한 채 살아가므로, 손해를 자초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요즘 자전거 아침 운동 길에 만나는 이들의 인사.

설마 일회용 혼인색 인사는 아니렷다. 하하하.

상황과 처지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그런 인사가 아니기를 빌어본다.

 

어쨌거나 아침 운동을 자전거 라이딩으로 바꾼 것은

이래저래 썩 잘한 일인 듯하다.

아침 인사만 해도, 그 때문에 마음에 그어지던 빗금 따위를

싹 지우게 되었으므로.

산길 동행들을 다시 만난 듯만 하다. [Aug. 2016]

-溫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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