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하는(x) 사랑 vs. 욕망하는(o) 사랑 : ‘-하다’와 행위성 명사의 결합
<고통하는 사랑>과 <인생 가시에 찔려 고통하는 영혼을 위한 9가지 해법>. 앞의 것은 어느 재미 목사의 성경 강해서 제목이고, 뒤의 것은 모 인생 계발서의 부제로 쓰인 내용입니다. 여기서 쓰인 ‘고통하는’이라는 표현은 해괴한 어법의 말입니다. 우리 어법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조어법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죠.
접미사 ‘–하다’는 일부 명사/의성ㆍ의태어/성상 부사/어근/의존명사 뒤에 붙어서 동사나 형용사를 만듭니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 그 예입니다 : 공부하다/생각하다/사랑하다/빨래하다; 건강하다/순수하다/정직하다/진실하다/행복하다; 덜컹덜컹하다/반짝반짝하다/소곤소곤하다; 달리하다/돌연하다/빨리하다/잘하다; 흥하다/망하다/착하다/따뜻하다; 체하다/척하다/뻔하다/듯하다.
이처럼 여러 가지 경우들이 있다 보니, 웬만한 말 뒤에 이 ‘-하다’를 붙이면 말이 되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위의 예에서 보인 ‘고통하다’처럼요. 하지만, ‘일부 명사’ 뒤에 붙어서 동사를 만들 때에도 조건이 있습니다. 즉, 행위성 명사 뒤에만 붙일 수 있다는 것이죠.
명사는 그 내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요. 동작/행위와 관련된 것을 행위성 명사라고 합니다. 그와 상대적인 것으로서 성질/상태/성상을 나타내는 것은 비실체성 명사(학자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지만)라고 합니다. 서술성 명사 중에서 실체성 명사가 아닌 것을 이릅니다.
다시 위에 예시된 말, ‘고통’과 ‘욕망’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고통(苦痛)’이란 ‘몸/마음의 괴로움과 아픔’을 뜻합니다. 상태를 나타내는 비실체성 명사죠. 한편 ‘욕망(欲望/慾望)’은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함. 또는 그런 마음’을 이릅니다. 의미 속에 탐하는 행위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행위성 명사에 듭니다.
위에서 말했죠? 명사 뒤에 붙여서 동사로 만들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행위성 명사여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고통하다’는 잘못된 말이고, ‘욕망하다’는 바르게 이뤄진 말이 되는 것입니다.
‘고통하다’가 왜 말이 안 되는 무리한 조어법인지 좀 더 예를 들어볼까요? 명사 ‘슬픔’과 ‘야망(野望)’을 보죠. 각각 ‘슬픈 마음/느낌’과 ‘크게 무엇을 이루어 보겠다는 희망’을 뜻합니다. 둘 다 어떤 심정적 상태를 뜻하는 말들입니다. 행위/동작과는 무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슬픔하다/야망하다’라는 동사를 만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째서 ‘고통하는(x) 사랑 vs. 욕망하는(o) 사랑’인지 이제는 확실히 아시겠죠? 그러므로 시인 곽재구의 <새벽 편지> 중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표현도 어법으로 볼 때는 엉터리라고 말할 수 있답니다. (단, ‘시적 자유’를 인정할지는 제외하고요.)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참, '고통하는' 대신 '고통 받는'은 가능한 표현입니다. 다만 '-받다' 역시 행위성 명사와 어울리는 말이어서 '고통 받다'로 띄어 적어야 바릅니다. 참고로, ‘고통’과 같이 정태적인 말들은 ‘-스럽다’와 같은 접사를 붙여 ‘고통스럽다’를 만든 뒤 그 뒤에 접사 ‘-하다’를 붙이면 자연스럽습니다. 즉, ‘고통스러워하다’가 되는 거죠.
다만, 위와 같은 경우에는 시어라서 이런 식으로 조어하면 시어로서는 지나치게 길어져 번거롭게 됩니다. 그럴 때는 다른 말, 예를 들면 ‘아파하는’ 등으로 바꿔 쓰면 좋습니다. 시어로서도 ‘고통하는’보다는 ‘아파하는’이 그 뜻과 깊이에서 한 수 앞선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溫草 [Aug.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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