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신잡] 잡학의 위력 : 그대를 구원해 주기도 한다
요즘 모 종편에서 뜨고 있는 프로그램 중에 <알쓸신잡>이 있습니다. ‘알아도 쓸데없는 신기한 잡학’인가의 준말일 겁니다. 그런데, 정말 잡학은 알아봤자 쓸데없는 것일까요?
정주영 회장이 조선소가 들어설 모래사장 사진 한 장만 들고서 그리스 선주를 찾아가 조선 수주 1호를 받고, 그 계약서를 들고 영국으로 가서 차관을 얻어낸 일화는 거의 전설적이죠. 그때 대출 책임자와의 대화에서 동원된 것이 바로 우리 500원 지폐에 들어 있던 거북선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화폐에 들어 있을 정도의 가치가 있는 거북선과 그 제조 사실을 증명하는 데에 더 이상의 증거물이 필요 없었습니다.
<500원짜리 지폐 : 지금은 1개 주화일 뿐이지만, 지폐로 통용되던 시절에는 큰 돈이었습니다.
가장 비싼 담배인 '청자'가 80원 하다가 100원. 커피 한 잔 값이 50원이었으니까요.>
두어 해 전 JP의 생생한 육성 회고록 <소이부답(笑而不答)>이 중앙일보에 절찬리에 연재되었습니다. JP의 관점만을 담은 것이어서 일부 공정성의 논란은 있었지만, 일반인들 기준으로 놀랐던 것들은 여러 가지였는데요. 그중에서 저는 그의 박학다식과 놀라운 기억력 부분에서였습니다. 카메라 앞에서 망설임이나 더듬거림 없이 유명 정치인들의 일화나 명저의 글귀를 즉석에서 그대로 인용해내더군요.
그의 회고를 보면, 일본의 근대 정치가/장군들의 말들이나, 드골/처칠/나폴레옹의 일화, 이집트 나세르의 혁명 공약... 등과 같이 웬만한 이들이라면 까마득히 잊고 있거나 알지도 못하는 것들을 중요 회담/면담 때마다 아주 요긴하게 써먹었던 일들이 아주 여러 번 자주 나옵니다. 일본인들과의 회담에서는 바로 그들이 존경하는 인물들의 일화(명언)를 인용해서, 반한(反韓) 인사를 친한파(親韓派)로 돌려세우고, 그 뒤로도 그런 좋은 관계가 이어지는 이야기도 여러 군데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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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잡학 응용(?) 사례는 위인전의 어느 페이지를 들춰도 나옵니다. 그만큼 흔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구구절절 현안에 대해 따지고 밝히는 것보다는 그러한 우회적인 접근이 훨씬 더 효과적일 때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뒤에 저절로 밝혀집니다.
그런 유명한 분들에 비해서는 그야말로 ‘잽’도 안 되지만, 저 역시도 다른 나라 사람들과 일을 하면서 잘 안 풀릴 때, 혹은 짧은 시간에 상대방과 가까워져야 할 때, 잡학의 도움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지금처럼 베트남과 가까워지지 않았을 때, 호치민에서의 활동만으로는 부족하여 중앙정부가 있는 하노이로 날아가 경직돼 보이는 공산당 고위층의 마음을 빨리 얻어야 했을 때의 일인데요. 이야기가 답보 상태에 빠졌을 때 제가 ‘호치민’과 ‘호환키엠(還劍)’ 호수 얘기를 꺼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찾는 호치민 기념관에는 그가 머물던 방도 있는데요. 평생 검소하게 지낸 진정한 지도자, 독서를 많이 한 지도자답게 장식도 없는 방 안의 주요 기물은 책상 하나입니다. 그 책상 위에는 그가 애독하던 책들이 놓여 있는데 그중에는 정약용의 <목민심서>도 있다는 얘기가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없습니다만, 그가 관리들의 직분과 관련하여 그 책을 언급한 적이 있어서 그리 알려진 모양입니다.)
호수가 많은 하노이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호환키엠(Hoa Huan Kiem)’ 호수입니다. 우리나라의 단체 관광객들도 대부분 한 번씩은 들러 대충 훑고 나오는 곳입니다. 그 호수는 레 왕조를 연 유명한 군주가 그곳에서 얻은 검으로 명나라를 물리친 뒤 다시 돌려주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인데요. 호환키엠(Hoa Huan Kiem)의 실제 발음을 들어보면 우리의 ‘환검(還劍)’과 거의 같고, 그 의미도 똑같습니다. 즉, 베트남어 중에는 우리와 같은 한자어에서 비롯된 말들이 아주 많습니다. 물론 발음은 중국어 영향을 많이 받은 것들입니다만. 남부 호치민의 사찰에는 아직도 그 표지를 한자로 표기한 걸 그대로 두고 있는 곳들도 적지 않습니다. 땅굴로 유명한 ‘구찌’도 실은 ‘故地’라는 한자어의 베트남 발음 표기입니다.
그런 얘기들을 하면서, 한국이 당신네들이 생각해 오고 있던 ‘미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꼭두각시’가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베트남과는 통해 온, 같은 문화권의 사람들이라는 점을 살살 우회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들이 예외 없이 존경하는 국부 호치민도 알아주던(?) 나라라고요. 미국인들과는 전혀 다른, 동족은 아니어도 근친족은 될 수 있는 나라라는 점을 심어주기 위해서요.
그러자 내내 근엄하게 (실은 무표정하게) 굳어 있던 상대방의 표정과 자세가 풀렸습니다. 그것은 빗장을 걸고 있던 마음 문이 열리는 증좌였습니다. 그날 그 뒤의 대화들은 딱딱한 현안을 떠나서 베트남 문화 일반에 대한 이야기, 한국인들의 일상 이야기 등으로만 이어졌습니다 (어느 나라든 고위층들은 모두 다 문화적 대화에서는 한 몫씩은 해내는 사람들입니다. 그 점이 일반인들과는 다릅니다). 그렇게 끝난 회합이었는데,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호치민 시 정부로 중앙정부의 승인 문건이 하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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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비슷한 사례는 아주 많습니다. 미국 주류 백인들은 어찌해도 한국인(동양인)들을 속으로는 아주 낮추 보는데요. 안팎으로 같은 수준의 동격 인종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거의 없다고 해야 할 만치, 실은 그 정도가 심합니다. 지금도 일부 영화에서는 3류 인간 역으로 동양인이나 한국인을 끼워넣는 게 일반적일 정도로요. 그런 백인들을 업무적으로 상대해야 할 때, 업무 얘기보다는 다른 얘기를 하는 편이 훨씬 더 빠르고 효과적입니다. 특히 여인들이 수장(首長)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조직에서는 더욱더요.
저는 상대방이 흔하지 않은 성을 쓰고 있을 때는 그 조상들이 어디서 온 사람인지를 대충 맞히는 편입니다. 이름을 보고 조금만 관심하면 유태계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일은 기초적이라 해야겠지요? 그만큼 웬만한 이들에게도 상식에 가까우니까요. 여인들의 머리칼 색깔을 보면 저는 그들의 조모/조부 출신 지역을 웬만큼 짐작합니다. 말을 기르는 사람의 집에 초청받아 가면 사라브레드 계열인지 아닌지 대충 알아봅니다.
대단히 어려운 일들 같죠? 실은 조금만 관심하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여자 프로골퍼 중에 노르웨이의 수잔 페테르센(Suzann Pettersen)과 스웨덴의 안나 노르드비스트(Anna Nordqvist)가 있습니다. 이들은 이름만으로도 북구 출신임을 알 수 있는데요.
정상적인 미국인이라면 Pettersen의 표기는 아마 Petterson이나 Peterson쯤이어야 하고, 발음도 ‘피터슨’이라 했을 것입니다. 안나 노르드비스트(Anna Nordqvist)의 경우는 더 표가 납니다. 미국계라면 Anna의 발음은 ‘안나’가 아니라 ‘애너’로 해야 정상이지만, 스칸디나비아 반도 지역에서는 겹자음 –nn-의 경우, 영미 발음과는 달리 모두를 발음합니다. 또 순종 미국인의 경우에는 Nordqvist에서 보이는 묵음 표기가 없습니다.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노르웨이의 로알 아문센(Roald Amundsen)에도 묵음 표기가 들어 있어서, 스칸디나비아 출신이라는 표가 납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머리 색깔만 보고도 조상들이 블론드 계열의 북구 출신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의 조부는 독일계이고 조모는 칼쉬타트로 옮겨온 북구 출신에다, 모친은 스코틀랜드 출신입니다. 그의 옅은 금발은 그러므로 다중의 금발계 혈연으로 물려받은 유산이기도 합니다.
이런 조상들의 계보 얘기엔 누구라도 귀가 번쩍합니다. 한 무릎을 내디디며 다음 얘기를 재촉하기 마련이죠. 그러다가 얘기가 007 영화에도 나오는 영국 귀족들의 가문 마크를 관리하는 문장원(紋章院)에 이르면 귀들을 쫑긋 합니다. 혹시라도 자신들의 가문과 관련된 얘기가 있을까 싶어서요. 우리들 역시 족보 얘기가 나오면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게 되잖습니까.
그쯤 되면 딱딱한 얘기는 더 이상 할 필요 없어집니다. 그리고 까다로운 계약서도 최소한의 수정을 거친 뒤 서명이 이뤄집니다. 어떤 것이고 간에 사람간의 속내 교류가 가장 효과적인 법이죠. 계약서의 두께는 상대방에 대한 불확신/의심/불신의 양과 비례하거든요.
미국 독립 선언 후 특명 대사로 프랑스로 간 벤자민 프랭클린은 정부 건물 대신 여인들이 주인공인 살롱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거기서 여인들과 예술인들을 대상으로 살롱 정치를 했고, 코 큰 대머리였지만 여인들에게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 결과 프랑스는 지금 뉴욕의 문간을 지키는 거대한 작품 <자유의 여신상>을 보내주게 됩니다. 벤자민은 대통령이 아니었음에도 지금 실제로 유통되는 지폐로는 최고액권인 100불짜리에 그 얼굴이 실려 있습니다. 이름에 벤(자민)이 들어가 있고 코가 큰 것으로 보아 그는 보나 마나 100% 유태계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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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그룹사의 임원으로 비싼 육류와 해산물에 박식한 이가 있었습니다. 88올림픽 시절에 제가 사석에서 ‘와규(和牛)’ 중 최고급인 ‘교토 카우’와 우리나라의 다금바리에 관한 교육(?)을 받은 것은 그로부터였습니다. (다금다리 구분법에 대해서는 다음 사이트에 정리해 둔 게 있습니다 : http://blog.naver.com/jonychoi/221017425335)
그 그룹사에 폭탄주계의 도사 격인 또 다른 임원이 있었습니다. 신문 잡지와 인터뷰도 많이 하고, 그에 관한 기고도 한 사람인데, 실제로 그는 임원 생활 중 폭탄주의 도움을 엄청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폭탄주 예찬론자 중 최고봉이라 할 만합니다.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그의 이름이 나올 정도니까요.
경영학을 전공한 이 두 사람은 훗날 이 나라에서 1~2위를 다투는 호텔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선임자와 후임자로요. 제조업 중심의 그룹사였던 곳에서, 그 둘은 자신들의 잡학(?)에 걸맞은 그런 일터의 사장 자리에 올랐습니다.
작년 어느 날 서울에서 귀가할 때입니다. 제 옆자리에 20대의 아가씨가 있었는데, 차 안에서도 열심히 뭔가를 보고 있더군요. 흘낏 보니 면접 관련 책자였습니다. 호기심에 끌려 이야기를 해 보니, 내일이 면접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나라 굴지의 석유화학 업체에 서류 심사를 통과하고, 면접 통지를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저런 면접 관련 이야기 끝에, 그 회사의 주력 상품이 뭔지 아느냐 물었습니다. 그녀의 답은 ‘모른다’였고요. 면접자가 그 회사의 주요 제품이 뭔지 알고 가야 하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인지라 그걸 알려주려고 하는데, 도무지 ‘나프타’의 명칭 생각이 안 나는 것이었습니다. 하기야, 저는 술 한잔하고 나면 머리가 삐걱거리는 바람에 입에 익은 낱말들도 뱅뱅 돌기만 할 때가 많습니다.
다음날 그 낱말이 떠오르고, 그 아가씨 생각이 나서 그 회사 홈피를 접속했더니만 세상에나... 주력 상품이자 기본 제품인 나프타 얘기가 통째로 빠져 있더군요.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나프타[naphtha]’는 예전의 초등학교 수준에서는 휘발유, 등유, 경유, 중유... 식으로만 가르치는 바람에 빠졌던 것인데요. 휘발유와 등유 사이에 위치하는 것(비등점 75~150도)으로, 화학섬유/타이어/합성수지/부직포... 등을 만들 때 기본 원료로 쓰입니다. 우리가 흔히 PP/PE/PU 등으로 약칭하는 것들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죠. 예전에는 우리나라의 나프타 가격 변동이 중국을 위시한 동남아 일대의 모든 관련 제품 가격 변동으로 직결될 정도로 그 역할이 컸는데, 요즘은 유화 제품 중 생산량이 소비량을 밑돌아서, 소요량의 45% 정도를 수입하고 있죠.
나프타를 생산하는 회사에 면접을 보러가면서 정작 그 ‘나프타’를 챙기지 못하고 간 그 아가씨. 총명하고 야무진 데다 착하기까지 했는데, 무사히 면접을 치렀을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각각 '뉴욕 사람/더블린 사람'을 뜻하는 'New Yorker/Dubliner'는 아는데 ‘서울 사람’을 뜻하는 'Seoulite'는 생각이 안 나서, 면접 결과에 불안해하던 또 다른 착한 ‘언론 고시생’ 얼굴도 떠오르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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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 얘기가 쓸데없이 길어졌군요. 여기서 맨 위에 자문해 봤던 말을 다시 꺼내봅니다. 정말 잡학은 알아봤자 쓸데없는 것일까요?
이미 위의 글에서도 드러났듯이, 제 개인적인 생각은 그 반대입니다. 잡학은 아주 요긴합니다. 아주 좋은 엔진에 최고급 연료를 쓰더라도 거기에 제대로 된 윤활유가 더해지지 않으면 엔진 자체가 돌아가지 않거나 망가지기도 합니다. 잡학은 그런 윤활유라는 생각이 듭니다. 삐걱거리거나 어색한 관계, 어렵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잡학의 쓸모는 작지 않습니다. 긴장관계에서 유머 하나가 모든 분위기를 일신시키는 것처럼, 잡학의 쓸모 또한 그러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멋진 탈출구가 될 때, 많습니다.
그런 잡학에의 호기심 발동. 그 또한 자신만의 세계를 호젓하고도 살뜰하게 가꿔가는 열쇠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걸 부풀려서 ‘창의적’ 생각이라는 말도 합니다만. 그리고, 어떤 경우에서건 호기심은 모든 궁구(窮究)에의 출발점이자 기초 원료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발전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아주 많죠.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말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알쓸신잡’을 ‘알아도 쓸데없는 신기한 잡학’이라는 풀이 대신에, ‘알면 쓸모가 참 많은 신기한 잡학’으로 바꾸고 싶어집니다. 우리 삶에서 무척 유용한, 꼭 필요한, 윤활유만 같은 것이니까요. -溫草 [Nov.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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