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화이트데이, 그리고 나의 변덕과 변심
70년대의 일입니다. 제가 어디서 밸런타인데이 얘기를 주워들었습니다. 그때는 남들이 안 하는 걸 해대는 걸 은근한 자존심의 일부로 착각하던 시절인지라, 제 방 천장에 체리 비슷한 것을 매달아 두었습니다. 그날 그런 걸 매달아두면 애인 없는 사람은 애인이 생긴다는 괴상한 속설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짓이었지만, 그걸 왜 매달아뒀느냐는 질문들이 나오면 은근히 폼을 잡고 설명해 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후, 이 밸런타인데이가 널리 유포되고 너도나도 따라 할 무렵쯤 해서는 되레 앤티파가 되었습니다. 초콜릿 장사꾼들이 내세운 근거 없는 속설에 휘말리는 어리석은 짓이라면서, 밸런타인데이의 연원지인 유럽 얘기까지 들먹였습니다.
이 ‘근거 없는 속설’이 요즘에는 ‘속설’로만 줄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밸런타인데이의 뜻풀이를 이렇게 하고 있죠 : ‘발렌티누스의 축일(祝日)인 2월 14일을 이르는 말. 해마다 성 발렌티누스 사제가 순교한 2월 14일에 사랑하는 사람끼리 선물이나 카드를 주고받는 풍습이 있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이날 여성이 먼저 남성에게 사랑을 고백해도 좋다는 속설이 퍼져 있다.’ 그 바람에 여성, 특히 소녀를 포함한 젊은 여성들은 주변의 남성들에게 대체로 초콜릿 등을 사서 건넵니다.
화이트데이가 유행하게 되면서, 저의 태도야 뻔하죠. 밸런타인데이(2.14.)는 안중근 의사가 사형 선고를 받았던 날이기도 하므로 차라리 안중근의 날로 바꾸어 부르자고 하는 목소리들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으니까요. 더구나 이 화이트데이는 밸런타인데이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일본의 전국사탕과자공업협동조합(全國飴菓子工業協同組合)에서 매출 증진과 재고 처리를 위해 1980년에 시작한, 상술 기반의 인공 기념일이잖습니까.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을 팔아먹으려는 상술도 고약하고 괘씸하기 짝이 없는데, 화이트데이까지 만들어 죄 없는(?) 솔로들을 이중으로 괴롭힌다? 팔을 걷어붙이고 제거해야 할 악습이라는 생각에서 그런 말을 꺼내거나 거기에 휩쓸려 초콜릿이나 사탕 따위를 거금을 들여 사대는 사람들을 싸잡아 멸시했습니다. 무식해서 품격 없는 부화뇌동이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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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고단한 하루를 마치는 사람이 사무실에서 하얀 초콜릿 하나를 얻어먹었는데 기운이 나더라네요. 은근한 피곤이 쌓이기 시작하는 오후의 일이었답니다. 화이트데이라면서 상사가 직원들에게 그걸 나눠줬던 모양입니다. 호두보다 작은 초콜릿 하나에 피로가 씻겨나간 거죠. 정신에 초록불이 켜지자 육체가 거기에 착실하게 반응한 효과라 해야겠죠?
저도 언젠가부터 화이트데이가 되면 도서관에서 자리를 뜨기 전이나 생각났을 때, 제 가방을 뒤적입니다. 오후에 가끔 제 입에 무는 캔디가 기본적으로 가방에 들어있기 마련이라서 그걸 꺼내들고 가서 카운터를 지키는 직원들에게 한 알씩 밀어주곤 했습니다. 어디서고 오후 서너 시가 되면 한자리를 지키는 일을 해내는 사람들은 육신 모두가 조금씩 피곤해질 때거든요.
이제는 화이트데이든 밸런타인데이든 그날에 초콜릿이나 사탕 따위를 사서 건네는 이들에게 제가 손가락질을 해대지 않습니다. 블랙데이, 빼빼로데이에 조그만 과자 선물을 해대는 이들을 기특하게도 바라봅니다. (다만, 거금을 들이지 않은 작은 것들에). 그게 이제 거의 십여 년쯤 된 듯합니다.
(좌) 요런 건 부담스럽고요. (우)요런 건 좋을 듯
그런 날들의 출발 지점이 어디고 연유가 무엇이었건 간에, 그날 서로 주고받는 일들이 그나마 우리들의 각박한 삶에, 기뻐할 날들이 줄어드는 일상에, 기름칠을 해주는 것 같아서입니다. 그런 날들마저 없다면 주변 사람이나 친한 벗, 마음에 두고 고마워하고 있지만 선뜻 표현을 하지 못하거나 잊는 게 버릇이 돼버린 세상에서, 그런 날들은 일종의 망각 방부제 내지는 기억 호출기, 추억 회복제이기도 하죠. 아참, 무슨 무슨 날이구나 하면서, 그런 대상자들을 떠올리게 하니까요.
그뿐만 아니라 그런 특정 대상들 간이 아니라도, 위에서 예를 든 것처럼, 같은 일터에 있는 사람들끼리 과자 한 쪽을 나눠먹는 일은 우리들의 의식 공간, 심정적 쉼터를 환히 밝혀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전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 빼빼로데이와 같은 날들 앞에서 거부감을 넘어 적극적인 반감까지도 감추지 않았던 제게는 큰 변화입니다. 일상의 위안처가 자꾸만 좁아들거나 쪼그라드는 소시민들에게 그나마 그런 것들이 있기에, 살아내기가 조금은 더 나아지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까요. 변덕도 그런 변덕이 없습니다.
변덕(變德). 글자를 들여다보면, 덕(德)이 변한다는 뜻입니다. 덕이란 베푸는 것. 마음씀씀이와 생각하기가 그 출발점 아니겠습니까. 그 생각들이 바뀌어야 하는 거죠. 다시 말하면, 변심(變心)이란 말인데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두 말 모두가 흔히는 부정적인 의미로 더 많이 쓰입니다. 하지만, 변심의 본래 뜻은 ‘마음이 변함’입니다. 중립적입니다.
화이트데이 앞에서 지금까지의 생각을 바꾸기. 변심하여 변덕부리기. 그 또한 한번 시도해 볼 만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늦철이 들어 변덕을 부리는 일도, 그 방향에 따라서는 때론 괜찮은 짓인 듯합니다. 갑자기 늦철이 왕창 들면 죽을 때가 가까워졌을 때라니까, 살살 늦철 드는 일을 아주 조금만 앞당기면 더욱 좋겠죠?
-溫草 [Mar.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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