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곳[자리]만 거쳤을 때는 ‘순방(巡訪)/역임(歷任)’은 부적절한 말이다
1. 순방(巡訪) : 나라/도시 따위를 차례로 돌아가며 방문함
<사진 : 2018.5.24. 새벽 성남의 서울공항을 통해 귀국하는 문 대통령 부부. 김정숙 여사의 얼굴이 부어 있다.
하기야 10시간 이상의 장거리 비행은 사람 잡는다. 워싱턴-서울은 16시간 걸린다.>
“문재인 대통령이 1박4일의 미국 워싱턴 순방 일정을 마치고 24일 귀국했다.”
문 대통령의 귀국을 다룬, 오늘 자 조선일보 기사의 첫 부분입니다.
‘순방’은 저 위의 뜻풀이에서 보듯, 다른 여러 곳을 차례차례 방문할 때 쓰이는 말입니다. 지난번처럼 베트남을 거쳐 UAE를 방문하고 온 경우에 쓰일 수 있는 말이고, 한곳에만 머물다 온 경우에도 이 말을 쓰면 뜻이 아주 괴상해집니다. 말이 되지 않으니까요. 그럴 때는 그냥 ‘방문’이라 해도 되고, 또 그것이 적절한 표현일 것입니다.
‘순(巡)’은 ‘돌 순’입니다. 여러 곳을 돌아다닌다는 뜻이죠. ‘순회대사/순회공연/순회강연’ 등에 보이는 ‘순회(巡廻)’가 대표적인데, 여러 곳을 돌아다님을 뜻합니다. ‘순경(巡警)’도 있군요. 본래는 ‘순찰(巡察.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사정을 살핌)’의 동의어였는데요. 요새는 경찰 계급으로도 쓰이고 있죠. 경장 아래, 잎사귀 두 개로 경찰 직급 중에서는 최하위죠(의경들은 빼고요). 아마 바삐 몸으로 뛰어 순경을 하기 때문에 직급 명칭도 그리되었을 듯합니다.
워싱턴만 방문하고 돌아온 것을 ‘순방’이라 표기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기사를 데스크에서 그냥 통과시킨 것도 이상합니다. 타성에 젖어서 그런 건지... 하기야, 조선일보는 인건비를 줄인다고 2003년에 사내 교열부를 폐지했습니다. 그보다 훨씬 작은 규모의 국민일보 등도 아직은 교열부를 두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런 일들이 쌓여 ‘기레기(기자+쓰레기)’를 양산한다고 현직 고참 기자는 다음과 같이 통탄하고 있습니다.
... [전략] 종이에 육필로 기사를 쓰던 시대에는 ‘재판 받는다’고 말할 정도로 엄격한 선배의 데스킹을 거쳐야 했다. 잘 쓰지 못했거나 말이 되지 않는 기사는 휴지통에 들어갔다. 그러나 지금은 기사를 버릴 수도 없다. 그렇게 하면 지면을 채우지 못한다. [중략] 게다가 IMF 당시 인력 감축 차원에서 교열부(또는 교정부)를 축소한 이후 정상화가 되지 않아 맞춤법 띄어쓰기 등에 대한 교열 기능이 쇠약해졌다. 누군가가 틀리게 쓰면 그대로 복사 전송되고 더 왜곡돼 확산되고 있다. 이런 모든 요인이 기레기를 낳게 한 것이다. -임철순, 한국일보 2014.06.27.
[끼어들기] 그러니, 여러분들도 종이 신문을 보시려면 될 수 있는 한 아직 교열부가 살아 있는 곳들의 것을 보셔요...
2. 역임(歷任) : 여러 직위를 두루 거쳐 지냄
“00장관을 역임한 000 씨가 이번에 설립된 00재단의 초대 이사장에 올랐다.”
모 신설 재단 관련 기사의 일부입니다. 초대 이사장에 오른 사람은 장관 자리라고는 00장관을 딱 한 번 지냈을 뿐이었습니다.
위의 뜻풀이에서 보듯, 이처럼 어떤 자리에 딱 한 번 머물렀던 이에게 '역임'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역임' 대신 ‘지낸/거친’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여러 직위를 거친 경우는, 다음과 같이 표현해도 됩니다 : 박정희 밑에서 외무장관, 총리, 국회의장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한 정일권 씨가 7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박정희와 동갑내기인 그는 박정희가 소령 시절, 중장으로 육참총장까지 했다.
참, 위에 보이는 ‘초대’에 쓰인 ‘대(代)’를 잠시 살펴보죠. 어떤 쓰임에서는 1000명 중 999명이 실수할 정도로 까다로운 말이니까요.
위와 같이 어떤 지위가 이어지고 있는 동안/단계를 나타날 때는 ‘초대 대통령, 2대 회장, 3대 총장...’ 등으로 쓰입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어떤 말이 맞을까요?
-할아버지 때부터 지금까지 해 왔으니, 3대째[2대째] 가업이죠.
흔히 쓰는 말이지만, ‘3대째’라 하면 잘못입니다. 이때의 ‘대’는 ‘지위/시대가 이어지고 있는 순서’를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에(즉 다음 대에 이르러서야 1대가 되기 때문에) 3대째가 아니라 2대째라고 해야 합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1대, 아버지와 아들이 1대니까, 도합 2대거든요.
정리하면, 이어진 기간을 차례대로 나타낼 때는 초대, 2대, 3대...로 쓸 수 있지만, 이어진 동안을 나타낼 때는 초대와 2대를 거치는 기간을 1대라 하므로, 조부와 손자 사이는 2대가 됩니다. 즉,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가보는 2대째* 내려온 것이지, 3대째 전해오는 가보가 아닙니다. 주의들 하셔요.
[*주의 : ‘2대째 가보처럼’ 쓰일 때는 일반명사지만, ‘33대손’처럼 순서를 뜻할 때는 의존명사로 바뀌는 까다로운 말이기도 합니다. 그럴 일은 드물지만 33대를 풀어서 ‘삼심삼 대’로 적을 때는 의존명사이므로 앞말과 띄어 적어야 합니다. ‘세종 대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
여기서 좀 더 어렵게 활용되는 것 하나 더요. 족보를 따질 때 무슨 파의 몇 세(世), 혹은 몇 대라고들 합니다. 이때도 ‘세’는 위의 초대, 2대, 3대와 같이 그 차례에 곧장 붙지만(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2세라 하듯), ‘대’는 위의 2대째에서 보듯, 기간의 차례 개념이므로 세보다는 꼭 1대가 늦습니다. 쉽게 말해서 33세손은 32대손이 됩니다. (천천히 생각해 보시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요즘 아이들이 흔히 쓰는 ‘역대급(歷代級)’이란 말. 아직은 표준어가 아닙니다. 어쩌면 시일이 흐르면 사전에 오르게 될지도 모르지만요.
[추기]
1. ‘한곳/한자리’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쓰일 때는 한 낱말의 복합어입니다. 다만, 명확히 하나만을 뜻하는 관형사일 때는 띄어 적을 수도 있습니다. 복합어일 때의 ‘한-’은 ‘같다/크다’를 뜻하는 접두어입니다.
한곳 : 일정한 곳. 또는 같은 곳.
한자리 : 1. 같은 자리. 2.중요한 직위나 어느 한 직위.
2. 개인적인 의견 : 이 ‘대’의 뜻풀이는 현행 사전에 따른 것이지만, 저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잘못돼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뒤바뀌어 있습니다.
‘초대, 2대, 3대’의 경우는 순서(차례) 개념이고 ‘3대째’와 같은 경우의 ‘대’는 기간(동안) 개념이 우선입니다. 현재의 뜻풀이가 바뀌어야 옳을 듯합니다.
-온초 [May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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