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횡설수설 (1) : 마이산 등산 동행기 (2011. 4. 9)

[차 한잔]

by 지구촌사람 2011. 4. 12. 15:21

본문

728x90
반응형
SMALL

 

횡설수설 (1) : 마이산 등산 동행기 (2011. 4. 9)

 

 

...인간은 바닷가 모래 속의 한 얼굴처럼 사라질 수도 있다.

미셀 푸코의 세기적 명저 <말과 사물>*의 맨 마지막 문장이다. 그 재미없는 책을 끝까지 다 읽어낸 이들을 찔끔 놀라게 하는 악담으로 더욱 유명해진 말.

  [*註 : 영문 번역본의 제목은 <사물의 질서 The Order of Things>]

 

  오늘의 이 횡설수설 잡문은 푸코의 저 말과도 연관이 있다. 내용이나 기술

방식 모두에서. 인간 전체가 어쩌면 모래 속 얼굴처럼 사라질 수도 있는 터이

므로, 무엇이든 남길 수 있을 때 남겨두어야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보태자면, 모든 사상(事象. 사물)에는 의미가 있다. 의미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 사물들이 드러내거나 담고 있는 의미들을 알아채는 건 그 사물을 대하는 이의 몫. 따라서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관찰자, 방관자, 혹은 눈 먼 자 중의 하나가 된다. 숙명적으로.

 

  사람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관심 대상은 관찰자의 관찰대상이 되고나서야 획득하는 지위이고, 방관자에게는 어중이떠중이로 접수된다. 그리고, 눈 먼 자에게는 이내 잊히고 마는 사람이 된다.

                                                            *

  자크 아탈리는 말했다. ‘미래의 가난은 소속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이 소속감은 영문 표기에서 두 가지로 이뤄진다. 그 하나는 sense of belonging이고 또 하나는 connectedness이다. 前者는 가족, 국가, 사회 등과 같은 집단에 소속되는 것과 같은 의미로서의 경질성(硬質性)이 돋보이고 (소속원으로서의 의무가 전제되어 있는 까닭에), 후자는 요즘 뜨는, 소셜 네트워크니 뭐니 하는 용어와 맥락이 닿아있다.

  이 잡문의 바닥에 깔려 있는 생각의 또 한 가지 줄기도 이 소속감이라는 말, 특히 후자의 의미와 연관되어 있다. 때문에, 이 잡문의 말미쯤에서 이뤄질 그 의미 해득의 부름켜(형성층) 두께는 각자의 몫이 된다. 자신의 소속감에 대한 자리 찾기는 물론이고, 타인과 사물에 대한 의미 붙이기의 두 가지 모두에서. 나는 어디에 얼마 만큼 어떻게 소속되어 있는 것일까. 나는 내 주변의 타인과 내게 스쳐간 사물들에게 얼마나 관심했는가...

 

  그런가 하면,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과 행진도 하지만, 더 많이는 혼자 걷는다.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에게 낱개로 억매이거나, 낱개로서 그 자신에게 다가가게 될 때 (어디엔가 소속된) 그 자신의 삶이 지닌 의미를 더욱 새록새록 깨닫게 된다. 굳이 인생 전체를 돌아보지 않더라도, 어느 하루의 일상 한 가지를 되훑기만 해봐도 이 말의 의미는 처절하도록 새삼스러워진다. 하루의 일상 중에서 그나마 그 자신에게 의미가 있었던 일들은 죄다 그 자신 혼자서, 자신만의 선택으로 이뤄진 일들이 아니던가?

  어느 휴일 하루 중에 자신의 선택으로 산행에 나서고, 그 산행길 내내 자신이 타인과 무관하게 (혹은 형식적으로는 타인들과 함께 하고는 있었지만) 자신의 선택으로 이뤄내거나 맛본 느낌들. 그것이 그 휴일의 의미 전체를 가름하게 되는 경험은 우리들 모두에게 공통이다. 그런 것이다. 일상까지도 자신에게 어떤 의미 있는 존재로 다가오게 되는 것은 혼자서 맛본 주관적인 느낌들 바로 그것이다.

                                                    *

  위에 명기했듯, 이 글은 횡설수설이다. 그리고, 좌충우돌이다. 화두(話頭)에 순서가 없고, 더듬이에 일정 방향이 설정되어 있지 않다. 눈에 띄고, 기억에 남고, 가슴에 엉킨 것들을 되는 대로 주절거리는 잡문이니, 읽는 이들 역시 긁적이는 이의 흥얼거림 방식대로 편하게, 되는 대로 훑어 읽으면 된다. 글자 수가 많아서 지겨워지거나 ‘잼바리’가 없다 싶으면 중간에 건너뛰어도 되는 건 불문가지.

  하지만, 어디엔가 자신의 모습도 들어 있을 수 있으므로 -그리고 할 수 있으면 더 늦기 전에 긴 글을 읽는 훈련도 해볼 겸 - 대충이라도 훑는 게 ‘안(內) 훈련’에도 좋다. 드러낼 것도 없는 처지에 자꾸만 밖으로 보이는 것에만 신경 쓰느라 헛심 빼지 말고.

 

? 들어가기 : 원행(遠行)은 ‘시로오~’! 북한산이 좋아!

 

  나는 원행 등산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오고가는 길가에 까는(?) 시간이 아까워서다. 4~6시간 정도의 산행을 위해 그 두 배의 시간을 길바닥에 깔아 모셔야 하는 건, 누가 봐도 비경제적인 투자. 이번의 마이산 등산은 시간 낭비가 없어서 아주 깔끔하고도 멋진 나들이였음에도, 4시간 등산을 위해 나는 새벽 4시 반에 현관문을 나섰고 밤 열 시에 그 문에 다시 들어섰다. 등산에 쓰인 시간의 3배가 넘는 13시간이 길바닥에 깔리고 밟혔다. 대충 짚어도.

  그리고, 오가는 시간에 차내에 깔리는 소음들 중에는 마뜩치 않은 것들이 적잖게 있기 마련인데, 그 또한 원행 등산을 주저하게 한다. 하지만, 이번 마이산행은 그런 면에서도 참 멋졌다. 모범생들의 집합 같아서 속으로 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집에 돌아와서는, 못된 놀이판으로 뛰쳐나간 철없는 머슴애를 바라보는 듯한 아내에게 내놓고 자랑하면서 약을 올렸다. 참, 근사한 산악회이더라고.

 

  원행산행을 좋아하지 않는 진짜 이유가 있다. 나는, 10년도 더 뒤로 돌아간 시기에 30만 미터 등정 기념패를 받은 적이 있다. 이 나라의 명산 순례를 핑계로 최소한 천 미터를 넘기는 산들만 골라서 (속으로는 은근히 그럴 듯한 산돌이 흉내를 드러내고 자랑하기 위해서), 다닌 덕분에...

  그것도 관광버스 8대 정도에 회사 직원들을 싣고서, 동호회 대장으로 떠받들리면서였다.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이른바 힘 있는 실세 부서장이라는 끗발의 힘 덕분이었지만.)

 

  나는 70년대에 시작한 밥벌이 내내 꼬부랑말을 쓰는 사람들을 상대했다. 오대양 육대주를 일터 삼아 돌아다녔다. 일일이 헤아려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40~60개국 정도는 되지 싶다. 해외근무도 8년가량 했다. 그것도 입사 초기 신참시절에서부터.

  30대 중반에 귀국하고 나서 대학원엘 갔고, 그 뒤로 다시 조직 생활을 했다. 그런 떠돌이 생활 끝에 어렴풋이 가슴에 안게 된 것은 ‘지구상에서 댠민국만큼 좋은 나라는 없다’이다. 너무나 초보적인 말이어서 전혀 웃기지도 않는, 그런 생각이 내게 문득 들었다.

 

  30만 미터 등정패를 받고 나서, 철들기에 필요한 시간이 더 흐른 후에 굳혀진 생각도 그와 비슷하다. 이 나라의 유명산을 찾는 것보다는 내 집 가까이 있는 산을 더 많이 찾는 게 내 ‘꼬라지’에 어울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이 세상의 온갖 여인들을 섭렵한 끝에, 가까이 있는 옆지기 마누라의 소중함을 옴팡 깨닫고 뒤늦게 시근벌떡 철이 드는 웃기는 영감의 짓거리처럼 말이다.

 

  하여, 나는 틈나는 대로 내 집 앞뒤 옆에 있는, 산 모습의 등성이들을 오르기 시작했다. 서울하고도 변두리에 내쳐지듯 붙어있는 개봉동. 그곳에 나부죽이 엎드리고 있는 개웅산과 매봉산 등이 바로 그것들이었다. 산높이가 해발 100미터 남짓이어서 구릉(丘陵)이라고 해도 좋을 그런 것들. 그곳들을 3년 넘게 틈나는 대로 아침저녁 오르내렸다. (하기야, 높이로만 치자면 제법 그럴 듯해 보이는 남산도 230여 미터 남짓이긴 하다.)

  내가 아는 이들에게 ‘울 집 후원’이라고 떠벌이곤 했던 그 산들을 오갈 때면, 가끔 휴대용 카트에 싣고 다녀할 할 크기의 물통도 모시고 다녔지만, 대부분은 야생버섯 도감이나 야생화 도감들을 등짐 삼아 갖고 다녔다.

 

  그렇게 ‘울 집 후원 동산들’을 오르내리는 사이에, 나는 옥상에서 몇 가지의 냉이류(냉이, 논냉이, 황새냉이에다 보리뱅이... 등등)까지 기르게 되었다. 그러면서야 녀석들을 제대로 구분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텃밭 규모로 그 가짓수와 수량이 왕창 늘었다. 누가 시켜서 그리 한 것도 아니고 저절로 그리 되었다. 그러고 나자, 이 나라 야생 버섯들을 대하면 도감을 보지 않고도 짚어낼 정도가 되었고, 산새들의 소리만 들어도 대충 어떤 녀석인지 알게 되었다.

 

  매봉산과 개웅산 공부가 끝나면서, 내가 친구들을 꼬이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꼬드김을 당하기도 하면서 바뀐 산행지가 북한산과 관악산이다. 어느 때는 불수도북 (불암산->수락산->도봉산->북한산의 연속 주파 산행을 줄여서 하는 말)도 했다.

  그 뒤로 최종적으로 굳혀진 목표가 북한산행 500회. 지금까지 100여 회나 채웠을까. 앞으로 10여년 뒤, 내가 진짜배기 촌놈으로 시골살이를 하게 될 때까지 그걸 해내고 싶다. 그 정도를 오가도, 다 읽어내지 못할 곳이 북한산이긴 하지만. (내가 산악회 검색을 하면서 북한산이 붙은 걸 찾아서 유심히 들여다 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 동참기는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원행 산행기가 될 듯하다. 틈날 때마다 죽어라 북한산을 다녀도 목표한 북한산 공부를 끝낼 것 같지 않기 때문에, 원행 산행 등으로 낭비할 시간이 내게는 없다.

 

? 횡설수설 하나 - 아이디 얘기 : ‘세잎클로버’는 비범한 평범

 

  천리안 피시 통신이란 것이 생기면서 이 나라에 열리기 시작한 온라인 세상. 당시는 전화기 모뎀을 사용해서 일일이 서버에 본인이 직접 접속해야만 했기 때문에 사용자의 신분은 사용 요금과 연결되어 꼼짝없이 온라인 사업자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대형 포탈*이 큰 문을 활짝 열고 누구라 가릴 것 없이, 무료로 받아들인다. (소형 업체는 그와 반대로, 희한하게도, 아직도 유료제이고...) 좁은 일대일 온라인 세상에서 광활한 웹 세상으로 변했다. 그 광활함은 크기와 내용, 출입 형식 모두에서 편리하기 그지없고, 사용자의 신분은 익명의 세계로 주민등록을 이전했다. 이문열의 소설만 같은 익명의 섬에서 완전하고도 안전하게 보호막을 둘러쓰게 되었다. 천리안/하이텔 시절에 비하면 꿈만 같은 일이다.

   [*註 : 포탈은 portal, 곧 큰 문을 뜻한다. 그 의미대로 문호(門戶)를 활짝 열고

            누구에게나 개방하고 있다. 호텔 정문과 같이, 눈비를 가릴 지붕이 설치

            되어 있는 곳을 포트 코셔(porte cochere)라고 하는 데, 이때의 porte도

            portal과 같은 의미다.]

 

   그 덕분에 (혹은 그 여파로), 널리 유행하게 된 게 있다. 인터넷 세상에서 또 하나의 분신처럼 되어 버린 것. 바로, 아이디다. 닉네임이라고도 하는 것들이 엄청 득세하게 되었다. 주인 대신에.

  혹자는 그걸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시현시키는 푯대로 내세우기도 하고, 혹자는 그 뒤에 숨어서 또 다른 1인2역을 시도해보기 위한 재미있는 도구로 삼기도 한다. (이하 이 항목의 글속에 등장하는 아이디들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개하기 위한 필요에서 그룹으로 나누어 분류를 한 것일 뿐, 특정인을 지칭하거나 염두에 둔 것이 절대 아니므로, 오해가 없기를 간곡히 바란다. 나는 이 아이디들의 주인공 분들과 오늘날까지 사전에 일면식도 없었다.)

 

  내려가는 차 안에서 자기소개가 있었다. 아이디로만 알려진 자신을 (사람들 앞에서) 실물과 대조시키는 작업이자, 아이디로 포장되었거나 그 뒤에 숨겨져 있던 자신의 실체를, 무대로 나와, 드러내는 순간이다. 엄청 재미있는 행사.

  내가 그걸 ‘엄청’이라는 꾸밈말까지 덧붙인 이유는 그런 자리에 끌려나오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그런 순간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제대로 모른 채 끌려나오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그런 이들의 모습까지 훔쳐볼 수 있음 때문이다.

 

  대충 떠오르는 대로 몇몇 호칭들만 적어보자면, 외국어 계통으로는 버그/바우만/엠마/샤프/오드렛...이 생각나고, 매우 특이한 경우로 ‘우시’(牛의 일본어 훈독음 訓讀音.)가 있었다. ‘행복터치’ 역시 우리말과 외국어의 혼합형으로 범상치 않았고, ‘세잎 클로버’는 아이디에서 띄어쓰기를 사용할 정도로 비범한 경우에 속한다. 어째서 비범한지는 해당 항목에서 이야기하기로 하자.

 

  (여기서 주제넘게, 해당자의 실체와 무관하게, 이해의 편의를 위해 개별 아이디의 객관적 해석을 몇 개 시도해보자면, 버그는 잘 알다시피 풍뎅이를 뜻한다. 폭스바겐의 국민차(유일한 공냉식 차량)에 붙은 애칭이기도 하다.

   바우만은 헷갈린다. 내 기억에 가물가물한 독일어 단어들을 두드려도 답이 안 나온다. 바움(Baum)으로 생각나는 ‘나무’와도 거리가 멀고. 지그문트 바우만을 존경하는 경우라면 말이 된다. 정년퇴임 후에 아주 유명해진, 아주 근사한 유태계 학자다.

 

   그 한 가지 예로, 포스트모던이라는 어려운(?) 말이 지닌 특징을 액체 근대성 (liquid modernity)이라는 아주 멋지고 말랑말랑한 말로 풀이한 사람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모두스 비벤디>라는 저서로 꽤 널리 알려져 있다. ‘모두스 비벤디’는 정식 외교 문서 전에 작성되는 잠정 계약/합의서 같은 것인데, 정식 문서에 비해서는 말랑말랑하다(!).

  바우만 영감은 그처럼 근대 이후의 사회에 필요악이 되어버린 제도에의 순응(conformity)이라는 어려운 말도 ‘유연하게 대처한다’는 뜻의 flexibility로 바꾸어 자유주의를 해석하는 말랑말랑한 분이다.

 

  그 밖에 떠오르는 바우만으로는 ‘바우만 스테이크’ 식당도 있고, 한때 우리에겐 널리 회자되었던 한국계 미국 육사생도 ‘성덕 바우만’도 있지만, 아이디로 사용된 바우만과의 확실한 연결고리가 내 머릿속엔 없다.

  하기야, 내 머리는 늘 용량부족이기도 하다. 지난 번 북한산 M자 코스 등산 때 내 뒤의 분 (아마 ‘나리꽃’님이셨을 듯하다.)이 멋지게 명명하셨던 머리 용량 부족...

 

  ‘엠마’ 역시 헷갈린다. 내가 제대로 아는 엠마는 엠마 골드만뿐이라서다. 아주 치열하게 여성 권익 신장운동에 매달렸지만, 정작 그 자신은 여성으로서의 인생에 실패했던 여인. 연하의 러시아 출신 시인을 사랑하여 모스크바로까지 뛰어가서, 공산주의자로 몰리면서까지, 어렵게 생을 엮어간 뜨거운 여인이었던 이사도라 던컨에 버금가는 그런 여인... (그녀의 전기를 몇 해 전 비행기 안에서 호기심에서 읽어대다가, 한 숨도 못 자고 온 적이 있다.)

  아니면 제인 오스틴의 <엠마>? 하지만, 그건 <오만과 편견>만큼이나 좀 지루한 편이라서, 끝까지 읽은 적이 없다. <오만과 편견> 역시 마찬가지로 대충대충 읽었고, 그저 마지막 페이지가 궁금했다. 나의 독서 숙제를 마치기 위해서... 암튼 엠마의 진짜 의미가 뭔지 참으로 궁금하다. ㅎㅎ하. )

 

                                                      *

  우리말 아이디는 과반수를 점하고 있었다. 강가벤치/곰돌이/산이조아/미르/까마/봄처녀/청초롱/둘리... 등이 생각난다. 미르는 내 알기로 용(龍)을 뜻하는 우리말인데, 그런 의미로 사용한 것이라면 우리말 그룹에 속한다. 둘리 역시 만화 주인공 이름에서 딴 것이라면 그 또한 범상치 않은 이름 짓기에 속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정말이지 비범을 넘어 별종(別種)에 속하는, 별나라에서 사시는 분이나 해낼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한자어 내지는 우리말식 한자어 이름을 사용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도 있었다. 연수/우암/보암/상상 등이 그런 예다. 물론 개인별 사연을 죄다 소상히 알지 못하는 까닭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예컨대, ‘보암’ 같은 경우는 우리말에 ‘보암보암’*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걸 줄여서 사용한 경우라면 순수 고유어에 들게 되는 식이다.

  [*註 : ‘이모저모 살펴보아 짐작할 수 있는 겉모양’이라는 뜻]

 

                                                          *

  아이디는 스스로 자신에게 붙이는 자신의 이름이다. 즉, 분신이나 다름이 없다. 짧은 시간에 즉흥적으로 작명을 하게 되어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이디는 또 다른 모습으로 돌아다니고 싶은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고 (도플갱어*와 같이), 드러내어 자랑하고 싶은 모습일 수도 있다. 아이디로 함축되는 모습으로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일 수도 있고, 자신이 하고 싶거나 누리고 싶은 모습의 대용어일 수도 있다.

   [*註 : Doppelganger(독) 독일어로, '이중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이라는 뜻. 우리

           말로는 '분신·생령·분신복제' 등 여러 용어로 쓰이지만, 자신과 똑같은 환영

           을 본다는 뜻에서는 차이가 없다]

 

  아이디에 외국어를 선뜻 사용하거나, 어디서고 외국어 아이디만을 사용하길 고집하는 사람에게는 대체로 한 가지 그늘이 있다. 학교나 교육과 관련된 그늘이 그것이다.

  자신이 걸머져야 할 탓 이외의 이유로 우수 학교/일류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거나, 대학(혹은 고교)에 진학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외국어 (특히 영어) 콤플렉스가 있다든가.... 하는 경우들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많다.

 

  대학을 나왔어도 지방대 출신으로서 주변인 취급을 받아왔거나 받아왔다고 여기는 이. 친구들이 다 간 고교를 자기만 못 간 것만 같아서 지은 죄도 없이 죄인처럼 괜히 기 죽어 지낸 사람. ‘빠다’ 덜 얻어먹고 자란 형편도 억울해 죽겠는데, 그 놈의 영어까지 머리 아프게 해서 은근히 ‘야코’가 죽는 사람 (그 놈의 영어만 아니면 얼굴이 빠지길 해, 몸매가 안 따라주나.... 기 펴고 살 것 같은데 말이야...).

  외국 여행의 기회가 아주 없었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맘대로 못 나가본 사람. 요즘은 시골 사람들도 쉽게 다닌다는 해외 관광을 자주 못 가본 사람들일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런 이들의 또 다른 특징은 하나같이 자아가 강하다는 점이다. 남들에게 비교되기를 싫어하지만, 비교되면 이기려 든다. 자존심이 강해서, 쉽게 교만하거나, 최소한 은근히 자만한다. 그 때문에, 대체로 말을 아끼는 편이며, 허투루 말수를 늘이는 편이 아니다. 하지만, 마이크를 잡으면 이내 마이크 체질로 변하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대체로 술잔을 잡으면 재미있어진다. 그 만큼 오랜 세월에 걸쳐 한 자락씩 여며온 사연들이 길고 깊다.

  주량들도 보통은 넘는다. 마음에 맞는 사람과는. 평균적으로 술 앞에서 절제를 잘 하고, 초면인 사람 앞에서는 여간해서 술 취한 모습 자체를 보이려 들지 않는다. 술 앞에서 절제를 잘 하는 이들일수록 안에 쌓인 것들이 은근히 많은데다 오랜 기간 숙성되어 있게 마련인지라, 문제점들이 객관적으로 경미하지 않다는 공통점들도 흔하게 보인다. 그 궁금증의 내역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드러나는 것들이라는 것 또한 공통적이고...

 

  여하간, 이들의 가장 뚜렷한 공통점으로는 내면의 뜨거움을 들 수 있다. 손을 넣으면 델 정도로 안이 뜨겁다. 자만과 교만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는 자존심이 가장 발달된 곳은 열정 부분이다.

  특히, 사랑 분야에서는 다른 어떤 그룹들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안이 뜨겁다. 사랑에 관한 사건을 치면 은근히 대형사고다. 여인들은 폭발적으로 뜨겁고 사내들은 덥게 질기다.

                                                             *

  다음은 국어파. 고유어를 제대로 많이 사용한 이름일수록 안팎으로 반듯한 사람이다. 아니, 반듯하게 되려고 더 많이, (혹은 엄청) 노력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자신 있게 내세우고 싶은 아이디를 들라면, 강가벤치와 곰돌이 같은 경우가 있다. 겨우 두 번밖에 대하지 못한 사람들이지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이 두 사람의 경우는 고유어 아이디파의 전형만 같다.

 

  고유어파의 특징은 대체로 마음들이 여리다는 점이다. 인공물보다는 자연을 더 선호하는 친자연파가 우세하다. 대체로 고향도 도회지가 아닌 시골이거나, 출신이 도회지라 하더라도 부친의 직업이 경성(硬性)이 아닌 액성(液性) 쪽이다. 부모가 기업가/상업 종사자 등이 아닌 경우가 많다. 교육계나 농어가 계통과 연맥을 댄 채 어린 시절을 보낸 추억들이 많은 편이다. 군인이나 경찰처럼 부친의 직업이 잦은 이사를 해야 했던 이들도 적지 않다.

  우리말 아이디 중에 자신의 쓸모나 행태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이들은 앞서 예시한 강가벤치나 곰돌이가 대표적이다. 강가벤치는 타인들의 쉼터로 강가에 놓인 (조용한) 벤치가 되고 싶어하는 관조와 봉사/배려의 마음이 그 이름 짓기에도 고스란히 배어 있다. 곰돌이는 남들이 미련퉁이 곰돌이*로 불러도 허허 웃으며 받아들이겠다는 이쁜 배짱을 감추지 않는 착한 심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족 : 우리말에 삼돌이가 있는데, 아무 데나 대충 붙여서 쓰는 일들이 많다.

              마당쇠나 돌쇠와 같은 의미가 절대로 아니다. 차제에 서비스 삼아, 표준

              국어대사전 (국립국어원 편)에 의한 정통 설명을 붙인다.

     삼돌이 = 감돌이 + 베돌이(배돌이) + 악돌이

     감돌이 : 사소한 이익을 탐내어 덤비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베돌이(배돌이): 일을 하는데 한데 어울려 하지 않고 따로 행동하는 사람

     악돌이 : 악을 쓰며 모질게 덤비기 잘하는 사람.

               이와 관련된 속담으로는, “일할 때는 베돌이, 먹을 때는 감돌이”라는

    게 있다.]

 

  청초롱/산이슬/봄처녀 등과 같은 이름 짓기의 지향점은 자신의 존재를 그처럼 압축해서 요약하고 싶어하는 쪽이다. 대체로 무색(無色)에 가깝게 욕심이 적거나, 욕심이 있어도 튀지 않는 색깔로 얌전하게 존재하고 싶어한다. 겸손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놓고 무시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상대방이 자신을 습관적으로 무시하는 게 몸에 밸 정도이다 싶으면 그들은 상대방의 페이지 자체를 넘겨 버린다. 망각 속으로 매몰시켜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무시를 확실하게 처리한다. 상대방 존재에 대한 망각처럼 가장 확실하고도 처참한 보복은 없다. 시쳇말에도 있지 않은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인은 버려진 여인이 아니라 잊힌 여인이라고. (여인을 예로 들어 유통되어온 말이라서, 여성분들께는 미안하지만, ‘여인’ 대신 ‘사람’을 넣으면 나으려나.)

 

  그리고 드물게, 재미있게(?) 심각한 경우도 있다. 아직도 내숭을 떠는 걸 졸업하지 못한, 자의식 넘치는 이들의 경우인데, 관찰자 입장에서는 다 큰 어른이 앙탈을 부리는 듯만 해서 재미있기도 하다.

  남들이 내 아이디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가 싶어서 떠보는 재미로 일부러 어려운 우리말을 골라서 짓는 이들도 그렇고,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말을 살짝 비틀어서 자신만의 것으로 독채전세 사용계약을 맺어놓고서 팔짱 끼고 으스대는 이들도 그런 경우의 일부다. 귀여운 보짱 자랑이라고나 할까. 심각할 정도로 내숭이 몸에 배어있지 않는 경우에 해당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런 이들일수록 대체로 악의는 없다. 다만, 우물 안에서 바라본 천장이 세상의 전부일 때는 좀 답답해진다. 그 우물 뚜껑을 다 열어젖히는 일이 녹록한 일이 아니므로. [계속]

                                                                                [April 2011]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