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事一思] 우울증과 달팽이
나는 매일 도서관으로 출근한다.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은 도서관이 내 일터다. 도서관이 직장인 것은 아니다. 내가 하고 있는 글쓰기 작업 터다. 집에서 해도 되지만, 집에서 하면 아무래도 느슨해진다.
게다가 사내라는 게 무슨 일을 하든 노상 집안에서만 머무는 건 아내들을 이따금 이유 불명하게 짜증나게 만드는 근원도 된다. 눈앞에서 알아서 사라져 주는 게 백수의 기본 도리다. 할 일을 만들어서라도 사라져 줘야 한다.
다행히도 나는 바쁘다. 부풀리자면 할 일이 태산이다. 이른바 원고 청탁이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졸리기에 바쁘다. 말이 '청탁'이지, 그게 두어 달 밀리고 나면 그런 불쌍한 빚쟁이도 없다. 말발이 여간 아닌 출판업계 종사자들이고 보니, 아무리 점잖게 말해도 그건 엄청난 압박이고, 때로는 협박도 된다. 자신들의 밥벌이에 지장을 끼치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보면.
하여, 나는 죽을 둥 살 둥 하는 척을 해댄다. 그들에게나 아내에게나. 일의 진척과는 무관하게.
내 주변에는 자주 얼굴을 대하는 이들이 많다. 그들 역시 도서관 애호파다. 자주 대하다 보니 저절로 내 눈에 들어오는 사람들 몇이 있다. 그 중 두엇은 노상 성경책을 노트북 옆에 펴 놓는다.
둘 다 사십대 중반이다. 하나는 내 짐작에 신학대학원생이 아닌가 싶다. 성경을 옆에 놓고 다른 책들을 부지런히 뒤적이며 자판을 두드리는 것으로 보아. 또 다른 하나는 목사님인 듯하다. 목금토 사이에만 나온다. 펼쳐놓거나 쌓아놓은 책자들을 보면 대충 짐작이 간다. 주일 설교 준비를 하러 나온다는 걸. 성경에다, 손쉽게 대할 수 있는 월간지 얇은 거 두어 권, 그리고 설교집이라는 제목이 큼지막한 것들이 늘 보이니까.
그 두 사람은 공통점이 있다. 근엄하다. 무척. 나이로 보아서는 신학대학원생이 한두 살 더 많은 듯한데, 그는 나이에 어울리게 조금 더 근엄하다. 목사님도 근엄하긴 마찬가지다. 그 두 사람은 지난 몇 달 동안 옆자리 혹은 건너 건너 자리에서 인터넷을 연결한 채 작업을 해왔지만, 한 번도 그들이 내게 인사한 적은 없다. 목례조차도.
(내가 근엄한 때문은 아니라고 마구잡이로 주장하고 싶은 건, 이 도서관 직원들치고 날 모르는 이 없고, 우리끼리의 인사는 다른 이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살갑다. 심지어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는 정신장애 34세 처녀도 내게는 인사를 아주 큰 목소리로 하고 다닌다. 이따금 보는 여자 관장님도 내겐 반갑게 인사하고, 청소하는 아주머니는 매일 아주 아주 큰 목소리로 “사장님, 안녕하셨어요?” 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나를 대단한 사장님으로 여긴다. 나는 그 아주머니에게 어제와 오늘 사이에도 안녕하‘셨’다는 과거형으로 내일도 대답하기 위해서라도, 오늘 몸조심을 할 정도다.)
삼천포로 너무 많이 빠졌다. 위 두 사람 얘기로 돌아가자면, 그들에게서는 웃음을 본 일이 없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잘 웃는지 몰라도.
그런데, 설교 준비하러 오는 목사님을 보면 도서관 근방에 있는 여러 개의 상가 교회 중 하나에서 사역하고 있는 듯한데, 내 알기로 그 상가 교회의 상근 교인이 50명을 넘기는 곳은 딱 한 군데뿐이다. 그곳 교회 목사는 나도 아는 이다. 장인 장모님이 파주로 왔을 때, 얼마 간 의지하셨던 곳이라서.
도서관에서 만난 친구 중의 하나로 전기기사 시험 준비를 하는 이가 있다. 나이는 나와 십 몇 년 차이가 나지만, 휴게 시간에 얼굴을 자주 대하다 보니 동아리가 되었다. 작년에는 주식에 손대어 데이 트레이딩으로 얼굴이 누렇게 떠서 지냈는데, 올해부터는 확 바뀌었다. 마지막 밑천을 들어먹은 것도 계기가 되었지만, 노상 내 잔소리에 덴 탓도 조금 있으리라 싶다.
지금은 어느 아파트 기계실 기사로 들어가서 격일로 일하고 쉬는 날은 1급기사와 안전기사 시험을 준비하느라 종일 자리를 지킨다. 그 기사 시험과 전기안전기사 시험을 통과하면 취업은 내가 책임지겠노라고 엄포를 놓은 것도 조금은 작용하고 있으리라 믿고 있다. (사실 그 정도는 내가 해줄 수도 있는 일이다. 아직은.)
그 친구는 말수가 적다. 아주 적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울증 치료를 3년이나 받았단다. 그 뿐만이 아니다. 고1짜리 딸아이는 우울증 증세로 학교를 휴학한 지 두 해째란다.
그때부터 작심하고 내가 한 짓은 한 시간마다 맞이하는 휴식 시간(말이 근사한 휴게 시간이지 실은 흡연 시간)에 그를 도서관 뒤 숲속이나 손바닥만 한 텃밭들로 끌고 다니면서 나무나 풀 이름을 반복 주입하고 그 숨겨진 비밀들을 까발리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싱둥하더니, 요새는 그의 배낭 안에 식물도감 하나가 들어 있다. 딸하고도 대화를 많이 한다. 문자가 넘 자주 오는 게 문제일 정도로. 아마도 내년쯤이면 휴학이 끝나지 않을까 싶다.
최근에 인터넷으로만 알게 된 내 주변인 중에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궤적은 전혀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새벽이 되도록 잠 못 들어 하고, 이야기는 거의 90% 이상이 과거인데다, 외부 사람들을 목마르게 기웃거리면서도 막상 한 발도 내딛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과거의 상흔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는, 이른바 ‘불쌍한 영혼’ 중의 하나인 듯싶다.
그녀의 증상으로 보아, 나 같은 돌팔이 눈에도 그건 우울증의 합병증세로 보인다. 그것도 몹시 걱정될 정도의 아주 심각한 수준.
그녀는 나름 엄청 유식하다. 방송에 나가 유식함을 뽐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유식이 그런 여인들의 질병 치료에는 도리어 장애일 때가 많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자신의 수준으로 걸러내고 잘라내고, 이윽고 쓰레기통으로 던진다. 그 말에서 윤기나 독기가 사라질 정도가 되면.
그런 그녀임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독기 어린 말을 뱉었다. 달팽이 얘기를 적어 보냈다. 처음에 달팽이는 자신의 연약한 몸뚱이를 지켜내기 위해서 달팽이 껍데기를 만들기 시작하지만, 그걸 다 만들고 나면 도리어 그 안에 갇힐 때가 많다고. 자신이 만든 껍데기에 자신이 갇힌다고. 하지만, 그런 껍데기가 없는 달팽이, 곧 민달팽이도 있는데 몸뚱이가 더 단단해서 덜 다치고 더 오래 살고 더 튼튼하다고 적었다.
그 뒤로 그녀로부터의 새벽 메일은 끊어졌다. 잠 못 자서 뿌연 머리로 나가야 한다면서, 비몽사몽으로 긁적인 낙서 같은 글이라도 보내야 덜 답답하겠다고 적었던 그 메일을 끝으로 그녀로부터 받은 세 통의 메일 통신은 끝났다.
그건 어쩌면 내가 바랐던 일이기도 했다. 솔직히 그런 이들과의 교신은 아무리 해도, 몇 해를 투자해도 변화를 기대하기가 난망인지라. 예전에는 안타까웠지만 요즘은 솔직히 홀가분하다. 그들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말이지만. 이젠 안 될 나무는 아예 돌아보지 않는 못된 버릇이 생겼다. 숱한 실망과 절망을 반복하는 사이에. 그 시간에 다른 가망 있는 이들을 조금이라도 더 챙기는 게 훨씬 나은 일이라는 걸, 나도 이젠 안다.
*
나와 아주 가까이 지내는 사람 중에 잘 웃는 이가 있다. 이제 갓 사십대에 들어섰다. 그는 영업직이다. 누구든 그 친구의 얼굴을 마주하면 어깨라도 붙이고 싶을 정도로 정겹다. 하지만, 그에게는 일상의 삶을 간섭할 정도로 뿌리 깊은 상처가 있다. 그것도 아주 많고, 그 모두가 가족에서 시작된 상처들이다.
그는 이따금 내게 반항도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고집도 부린다.
하지만, 나는 그를 여전히 껴안는다. 이유는 딱 하나다. 그는 우울증 환자가 아니다. 아니, 우울증이라는 껍데기를 만들고, 그걸 뒤집어쓰고, 그 안에 갇힐 사람이 아니어서다. 무엇보다도, 그는 내가 부르면 쏜살같이 달려온다. 사람 만나는 것이 그에게는 세상 사랑이다. 세상과 통교하고 거기서 양분을 취하려는 태도가 참 이쁘고 착하다.
그런 그는 사진을 찍을 때, 최소한 미소를 짓거나 환하게 웃을 듯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둘이서 사진 찍은 게 없구나. 담엔 꼭 한번 찍어봐야지.)
나는 사진 속의 사람을 대하면 가장 먼저 그의 표정을 본다. 웃는 사람들은 이쁘다. 예뻐서 1초라도 더 머물며 살펴보고, 웃지 않는 사람은 그냥 지나간다. 시간이 남을 때만 돌아와서 다시 본다. 그런데, 같은 사람을 다른 사진 속에서 대하면 대조하곤 한다. 짬이 날 때만.
웃지 않는 사람은 어느 사진 속에서도 거의 비슷하다. 근엄하다.
자주 보는 옆 자리의 신학대생과 목사. 몇 달의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표정에서 근엄 대신 어둠을 읽는다. 스치면서 대충 달아맨 근엄에서 열정이 사라지고 물기가 빠지면서 이윽고 그 안이 내 눈에 읽힌다. 오늘 가까운 이에게서 들은 말. 그의 아들이 우울증으로 그 자신이 힘들기도 하지만, 주변 사람들도 그 여파에 휩싸여 있다는 말을 들어서일지도 모른다.
무관심에 가깝게 스쳐 보내는 이들에겐 대충 근사한 말을 붙여도 된다. 무책임해도 좋을 권리와 의무가 있으니까. 하지만, 아는 이들에겐 뭔지 모를 의무나 의무감이 고개를 든다.
그러면서, 불현듯 묻고 싶어진다. 아이가 사진을 찍을 때 웃고 찍은 적은 언제이고, 언제부터 웃고 찍지 않게 되었느냐고.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려 보라고 넌지시 옆구리를 찌르고 싶다.
사진 하나. 아무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사진은 또 다른 세상과의 통교이기도 하다. 어쩌면 영원히 새겨질 중대한 세계로의 입문에서, 웃지 않거나 웃지 못 하는 일. 그것은 자신에게 열리는 모든 세상을 향해서 미리 주름살을 짓는 일이기도 하다. 그걸 고치려고 노력하지 않거나 고쳐질 계기를 맞이하지 못한 채 일정 기간 지속되면 우울증 환자가 되고, 심각해지면 폐인도 된다.
괜히 근엄하지 않기. 혹은 사진 찍을 때라도 웃어 보기. 달팽이 껍데기 속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 첫걸음도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게 버릇이 되면 사진 찍을 때가 아니라도 늘 웃음을 매달게 된다. 아주 쉽게.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하다는 말은, 표정이 맑고 밝은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합창하는 말이기도 하다. [Nov. 2012]
고독감과 고독력(孤獨力) (0) | 2014.01.12 |
---|---|
설날, 그리고 ‘이리 오너라!’와 ‘아무도 없어요? (0) | 2013.02.08 |
말 한마디의 힘(1) : 아름다운 여인과 장님 노인의 이야기 (0) | 2012.12.26 |
네잎클로버를 따면서(2) : 못생긴 녀석들 (0) | 2012.07.06 |
네잎클로버를 따면서(3) : 노인과 토끼 (0) | 2012.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