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閑談] 영등포의 밤
궂은비~ 하염없~~이 쏟아지는 영등포의 밤~~~. 내 가슴에 안겨든 사~랑의 불꽃. 고요한 적막 속에 빛나던 그대 눈동자~~. 아 ~ 영~원히 잊지 못할 영등포의 밤이여~~
지금도 중/장년들이 기억하고 있는 오기택의 노래, ‘영등포의 밤’. ‘영등포’는 그 이름만으로도 어쩐지 서민들의 애환이 담겨져 있을 듯만 한 곳이다. 사실, 영등포는 예전부터 같은 포구였지만, 왕성하게 번성하고 있던 이웃의 노량나루(鷺梁津)에 치여 내내 밀려 지내던 곳. 노량나루에서 찾던 젓갈용 옹기들을 만들다가 그것이 서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온갖 옹기류, 곧 장독, 시루, 자배기, 김장독, 항아리, 물동이들을 만드는 게 주업이 되어버린 동네. 조선 초부터 6.25사변까지 그랬다. 지금의 영등포7가 108, 109, 109, 110번지 일대가 그런 곳이었는데, 개명되기 전까지는 ‘옹기말’이 그곳의 이름일 정도로.
영등포에서 유명한 동네는 ‘죽마루’다. 오기택의 노래에도 나오는 ‘궂은비’가 내리면 온 동네가 죽같이 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나중에 일본 녀석들의 무지막지한 한자 개명으로 ‘중촌(中村)’이 되어 버린 동네. (영등포에 웬 ‘나까무라’??).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건너편 영등포삼각지가 바로 그 중심지다.
영등포의 지명 유래는 일반적으로 영등(靈登)굿과 관계되어 변형 표기된 영등(永登)과 물가를 뜻하는 포(浦)가 합쳐진 명칭으로 보는 게 통설이다. [‘영등굿’은 ‘영등굿놀이’라고도 하는데, 음력 2월에 영등할머니에게 올리는 당굿으로, 요즘은 제주도에만 남아 있다. 음력 2월 초하루에서 보름 사이에 해녀와 어부를 위하여 베풀어진다.]
참, 영등포 옆에 새로 생긴 금천구를 두고, 신참(?) 동네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금천구가 영등포구보다 역사적으로는 아주 대선배다. 고려시대부터 있어온 이름이니까. 고려시대에는 줄곧 금주로 불리다가 조선 태종 때금천현(衿川縣)으로 개칭되고, 정조 때 시흥현(始興縣)으로 변경될 때까지 380여 년간 불린 이름이 금천이다. 관할 구역도 아주 넓어서 동쪽으로는 과천현(果川縣), 서쪽으로는 부평부(富平府), 남쪽으로는 안산군(安山郡), 북쪽으로는 노들나루(露梁津)까지 미쳤다. 혹시라도 영등포구가 금천구보다 어른이라고 나서면 이런 자료를 내밀어도 된다. ㅎㅎㅎ.
또 하나. 노량나루는 그처럼 역사적으로 화려했던 만치, 거기에 걸맞게 근사한 기록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로 꼽히는 경인선의 시발지가 처음에는 노량진이었다. 1900년에 개통될 때. 나중에 서울역까지 연장 운행되었는데, 당시의 서울역은 지금의 자리가 아니라 이화여고 자리(정동)였다. 안쪽으로 쑥 더 깊이 철로가 깔렸던 것.
*
어제 영등포역에서 돌아왔다. 역 맞은편의 골목길을 지나오는데, 음식점 앞의 간판이 또 웃음을 짓게 한다. 여러 날 전에 보고 사진까지 찍어두었던 곳이다.
<바로 이 집 주인이 우릴 웃기는 사람이다>
역시 서민적이다. 아니 엄청 서민적이다. 가릴 것 없이, 내숭 떨 것 없이, 훤히 다 드러내 놓고 편하게 말을 걸어오는 서민적 광고가 그 앞을 지나는 서민의 가슴을 훈훈하게 만든다. 절로 나오는 너털웃음은 주인의 공짜 서비스이기도 하고.
때마침 함박눈이 내린다. 눈을 들어 하늘을 훑는다.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하얀 꽃가루로 하늘은 온통 춤판. 길 위를 본다. 아침에 내린 눈으로 바닥에는 질척거림이 남아 있다. 뽀드득 소리를 기대하던 발걸음은 뿌직 소리에 조금 실망한다.
지하도 계단이 끝나는 길 위에는 포장마차들이 어깨를 겯고, 불빛들을 쏟아낸다. 함박눈의 포근한 하얀색이 포장마차의 따뜻한 불빛 앞에서는 기를 펴지 못한다. 따뜻함 앞에서는 함박눈도 빛이 죽는다. 제 안을 가득 채운 찬 기운을, 그 본래의 속성을, 함박눈은 비로소 돌아보는 듯만 하다.
포장마차의 좌판 위에는 전통적인(?) 메뉴들이 불빛을 받아 빛난다. 이런저런 꼬치류, <오뎅>, 떡볶이, 김밥... 내 머리는 벌써 그것들의 냄새를 맡는다. 실제로는 그처럼 풍기지도 않는 냄새를.
후각은 머리로 읽는다. 머리로 직행한다. 우리들 오감 중 촉감을 제외하고는 척추신경들을 거치는 게 없다. 그 중 가장 빨리 머리로 수직 상승하는 것은 후각이다. 나를 유혹하는 포장마차의 음식 냄새. 그건 실은 내 머리가 만들어낸 냄새다. 추운 날에는 음식 냄새도 번지지 못한다. 분자 형태로 운반되는 냄새들도 웅크리는 까닭에. 그러니, 나는 내가 나를 꼬드기고 있는 것.
포장마차 메뉴 중 나를 사로잡는 건 <오뎅>이다. 추운 날의 그 따뜻한 국물 맛은 나를 오금 저리게 한다. 생각만으로도. 맛있게 김을 내뿜고 있는 <오뎅>칸이 보이는 포장마차 하나를 지나쳤다. 살짝 망설이면서. 몇 개의 포장마차를 지나는데 또 한 곳이 눈에 들어온다. 이번엔 지나치기가 어렵다.
들어가 앉았다. 부산어묵 표 <오뎅> 세 꼬치와 막걸리 하나를 시킨다. 국물 좀 많이 부어달라며. 국물부터 마시고 막걸리 한 잔을 목에 붓는다. 서늘하다. 바깥 날씨 탓도 있지만, 막걸리가 냉장고에서 나온 탓도 있다. 아하, 이젠 포장마차도 냉장고까지 갖췄구나아.
포장마차 기억을 떠올린다. 몇 해 만인가. 이처럼 길가에 있는 포장마차에 들러본 것은. 1989년이 마지막이었나. 블록 전체에 건물 한 채 없던 무역센터 지역의 개발이 마감되면서, 함께 사라진 게 그 지역에서 성업하던 포장마차였지. 음식점이라곤 테헤란로를 건너가야만 대할 수 있었던 터라, 퇴근 길의 한잔 술들을 포장마차에서들 때우곤 했었는데...
상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 문득 제 자리로 돌아온다. 여전히 내리는 함박눈. 포장마차 안, 플라스틱 스툴(팔걸이와 등받이가 없는 의자) 위에 걸터앉아 그 눈발을 바라보며 <오뎅> 국물을 후후 불고 있는 나. 혼자다.
갑자기, 사람 하나가 그리워진다. 내 주머니에 들어온 손을 만지작거리며 걸을 수 있는 사람 생각이 엄습해온다. 함박눈을 맞으며. 우산 따위는 거추장스럽다. 그런 사람이 지금 내 옆에 함께하고 있다면... 막연한 그리움이 더욱 간절해진다.
생각이 간절해지자 <오뎅> 국물 맛이 떨어진다. 찝찌름해서 더욱 입맛을 당기게 하는 국물 맛이 처음부터 좀 싱겁다 싶었지만, 후후 불며 마시는 맛으로 잊고 있었는데, 주머니 속의 사람 생각이 나자 국물 본색이 드러난다. 허전한 트집이 하릴없이 국물 맛으로 튄다.
한참 남은 막걸리와 국물만 먹은 부산어묵을 그대로 두고서 자리를 일어서려 하는데, 한 사내가 들어온다. <오뎅> 다섯 개에다 소주 한 잔요.
주인아주머니는 그 소리를 듣자 꼬치 다섯 개를 들어 떡볶이에 넣는다. 오뎅에 떡볶이 국물을 가볍게 묻힌 다음 스티로폼 접시에 담아 내놓는다. 사내는 그곳의 단골인가 보았다. 오뎅 몇 점을 날름날름 우적우적 먹어치우자, 주인아주머니는 큰 컵 하나를 가득 채운 소주를 건넸고, 사내는 그걸 벌컥벌컥. 왕대포!. 참으로 오랜만에 왕대포 실물을 눈앞에서 본다.
그런 사내가 궁금하여 올려다보니 (그는 한사코 자리에 앉기를 거부한 채 서서 먹고 마셨다) 잘해야 50대 초반이나 되었으려나. 불그레하면서도 깨끗한 안색이 무척 건강해 보인다.
사내는 꼬치 다섯 개로도 모자란 듯, 오뎅 칸으로 다가서더니 두 개를 더 짚는다. 그런 사내의 먹고 치우는 동작이 얼마나 잽싼지, 서둘러 폰카를 꺼내들었음에도 사내의 손동작을 다 담지 못했다.
사내는 꼬치 두 개를 금방 날름하더니, 계산을 했다. 6천 원쯤이었던가. 들어와서 먹고 마시고 계산할 때까지 5분도 안 걸렸지 싶다. 그런 사내의 씩씩함을 넋 놓고 바라보던 나도 서둘러 계산을 했다. 5천 냥.
내가 타고 갈 버스가 서는 곳으로 간다. 여전히 함박눈이다. 포근해서 ‘부티’까지 나는. 정류장에 서 있는 젊은 여인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자기야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은 꼭 노트북이어야 해. 내가 내내 말해왔잖아. 잊지 마. 잊으면 알지?’ 주변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들릴 정도의 큰 코맹맹이 소리. 우산에 가려진 상체 아래로 벋은 여인의 다리는 젓가락이다. 내가 고개를 돌리곤 하는 삐쩍 마른 형. 하기야 내가 그녀의 살 내리기 작전에 거들거나 한 게 없으니 천만다행이지.
그녀의 옆에 서 있던 탓에, 전화기에 대고 몸을 비틀며 통화하는 모습까지 죄도 없이 지켜본 또래 근방의 또 다른 여인 하나는 우산을 높이 들어 시선을 하늘로 외면한다.
나도 여인을 따라 시선을 맞은편 하늘로 던진다. TIMES SQUARE. 건물 꼭대기에 큼지막한 영문 간판이 아예 외부 인테리어처럼 단단히 박혀 있다. 아니, 뉴욕 42번가에 있던 타임스 스퀘어가 언제 한국으로 이사왔댜?
내 심심한 머릿속과, 그때까지도 막연한 그리움이 여전히 은근한 간절함으로 남아있던 내 가슴이 합작하여, 괜한 건물 이름과 씨름하려 든다. 19세기의 마지막이라서 용량이 넉넉지 않은 내 머리로도 기억하기 쉬운 1899년에, 오스카 헤머슈타인이 최초로 극장을 세우면서 브로드웨이 공연문화가 시작된 타임스 스퀘어. 그렇다면 이곳을 한국의 브로드웨이로 만들겠다는 야심이 담긴 건물? 그렇다면야 좋은 일이지, 암 좋은 일이고말고.
참, 이게 홍콩에도 있는데? 코즈웨이 베이 역 출구에서 그대로 연결되어 있는 근사한 건물. 돈 많은 젊은이들과 미시족들이 먹고 마시고 놀다가 쇼핑까지 한꺼번에 끝낼 수 있는 곳.
뉴욕의 타임스 스퀘어에서는 제야의 날 행사 때, 불빛을 밝힌 공을 건물 아래로 끌어내린다. 사람들은 그걸 바라보면서 Happy New Year를 외치며 환호하고. 그 생각이 나서 나도 우리의 TIMES SQUARE 건물을 따라 아래로 시선을 끌어내려본다. 성냥갑 모양의 본체 건물과는 다른 모습으로 지어진 5층짜리 건물에서 장사하고 있는 점포들 이름이 보인다. 아주 큼지막하게 매단 명찰판.
이마트, 롯데마트, 그리고 이런저런 ‘야시꾸리한’ 이름의 온갖 물건 팔이와 먹을거리 판매점들의 이름. 아이고. 이곳도 홍콩의 그것이나 진배가 없군그래. 가기 전에 지갑의 두께를 확인하고 가는 곳.
한국의 브로드웨이가 단순 쇼핑몰로 내려오는 순간, 씁쓰름해진 나는 서민으로 돌아와 내가 탈 버스 도착을 힐끔거린다.
함박눈은 여전하다. 나는 문득, 오기택의 노래를 개사해서 흥얼거리고 싶어진다. ‘궂~은비~ 다행히~~도 안 내리는 영등포의 바암’.
하기야, 내겐 우산도 없다. 다행히도. 그런데, 우산 없이 주머니에 손 넣고 함박눈 길을 같이 걸어 갈 사람도 없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지만, 빈 주머니. 이 끈질긴 간절함.
마침 내가 탈 버스가 온다. 다행이닷!. 그 끈질긴 꼬리를 잘라낼 수 있다. 버스 안은 따뜻하다.
버스 안에서 지긋이 눈을 감고 있던 내게 미소 하나가 떠오른다. 영등포 역사 1층의 한과 가게 이름이 떠올랐을 때다. 칙칙팝팝!!
영등포의 밤은 역시 서민의 밤이라야 한다. 나도 칙칙팝팝하고, 얼른 코 자야지. [Dec.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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