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제법 많은 사진 자료들이 있다. 그중 묘비 등은 필수 자료. 배꼽 등으로 나오면 다음의 원본처로:
https://blog.naver.com/jonychoi/22190036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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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의 자랑 ‘9도장원공’ 율곡 이이(李珥)와 과거 시험의 실제 효용, 그리고 기네스북감인 母子 초상의 지폐 도안 동시 등장과 그 앞뒤 얘기
파주는 율곡 이이 선생(1537~1584)의 고향이다. 율곡이란 호도 파평면 율곡리에서 나왔고, 지금도 그곳에 남아있는 화석정은 율곡의 6대조인 이명신이 지었다.
정자 안에는 율곡이 8살 때 화석정에 올라 지었다는 다음과 같은 한시 작품도 걸려 있다.
林亭秋已晩[임정추이만] 숲속 정자에 가을은 이미 깊어
騷客意無窮[소객의무궁] 시인의 시상(詩想)이 끝이 없구나
遠水連天碧[원수연천벽] 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상풍향일홍] 서리 맞은 단풍은 햇빛 향해 붉구나
山吐孤輪月[산토고륜월] 산은 둥근 달을 토해내고
江含萬里風[강함만리풍] 강은 만 리의 바람을 머금었네
塞鴻何處去[새홍하처거]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날아가는지
聲斷暮雲中[성단모운중] 울음소리 구름 속으로 사라지누나.
그처럼 율곡은 어린 나이에 완숙한 한시를 지을 만치 천재였다. 그래서 그에게 따라다니는 별호 중에는 ‘9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 있다. 9번(九度)이나 장원 급제한 사람이란 뜻이다. 한 번도 하기 힘든 온갖 과거 시험에서(생원/진사과의 초시/복시, 그리고 대과)* 그는 9번이나, 그것도 장원(1등)으로 합격했다. 그럼에도 실제로 고위직에 등용될 수 있는 대과 전시 장원은 마지막으로 응시한 29세 때 한 번이었다.
[*과거 시험 : 과거 시험은 그 단계별로 소과(생원과/진사과)의 초시와 복시 ⇨대과(문과)의 초시와 복시 ⇨그리고 전시로 나뉜다. 소과 합격자에겐 성균관 입학과 대과(문과) 응시 자격이 주어지고, 대과 전시殿試는 복시 합격자 30~33인을 대상으로 대궐에 들어가 임금 앞에서 합격/불합격과는 무관하게 등수를 정하기 위해 보는 시험이다. 소과 합격자에게는 종9품 이하 관리에 등용될 수 있는 자격과 양반 자격 유지 권리도 주어졌다. 대과 전시 합격자도 후술하듯, 실제로는 1~3위까지에만 실직(實職. 자리와 급여가 주어지는 직책)이 주어졌다. 이와 관련된 상세한 사항은 내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nychoi/220956716225와 https://blog.naver.com/jonychoi/221676109990 참조.]
[*율곡의 구도장원 상세 내역: 9번 장원을 했던 내용을 시험 종류, 응시 연령과 연도별로 나누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율곡의 천재성을 볼 수 있는 것은 29살 시절 한 해에 생원/진사/대과 등의 초시와 복시 전체에 걸쳐서 6회의 장원을 했고(싹쓸이) 내쳐 최종 등위 시험인 대과 전시에서도 장원을 했다는 점이다.
당시 과거제도는 최종 합격자 30명을 대상으로 등수를 정하는 대과 전시殿試에서 3등 안에 든 이들만 실제로 임용했다. 1위인 ‘장원’에게는 종6품을, 2~3등인 ‘방안(榜眼)’과 ‘탐화랑(探花郞)’에게는 각각 정7품을 제수했고, 나머지는 산관직(散官職)이라 하여 합격증(홍패)과 더불어 보직/급여도 없는 명예직에 보했다. 자리 부족 때문이었다. 양반들이 당시에 선호하던 경관[京官. 서울에 있는 관아의 총칭] 문반직은 통틀어 466직* 정도뿐이었는데, 단숨에 이 종6품의 실직에 보임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특혜였다고 한다.
[*이것은 현재의 5급 이상 고급 공무원 46,684 명과 비교하여 정확히 1%로 엄청 적은 숫자여서 자리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당쟁 격화의 지속적인 원인이 될 정도로. 2018년 총조사에 의하면 현재 5급 이상 공무원은 각각 장관급 44명, 차관급 113명, 1급 1,170명, 2급 201명, 3급 503명, 4급 7,708명, 5급 36,945명. 그리고 6급은 110,896명, 7급은 128,649명, 8급은 119,561명, 9급은 74,190명으로 전체 공무원[국가직+지방직]은 1,029,538명이다.]
그럼에도 과거 응시 평균 연령이 35세였을 정도로 과거에 목을 매다시피 했던 것은 당시 양반은 3대에 걸쳐 등과하지 못하면 양반 자격이 박탈되어 양민[양반과 천민 사이의 평민]으로 내려가야만 해서였다.
즉, 실제로 임용은 되지 못하더라도 합격증과 어사화[御賜花. 문무과에 급제한 사람에게 임금이 하사하던 종이꽃. 사진]만으로도 대과 합격이라는 큰 명예와 더불어 한 급 높은 양반 자격이 유지되었기에 그처럼 3일유가[游街. 과거 급제자가 3일에 걸쳐 광대를 데리고 풍악을 울리면서 시가행진을 벌이고 시험관, 선배 급제자, 친척 등을 찾아보던 일] 등으로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이때 꽂는 어사화는 임금이 하사한 꽃이라는 뜻의 종이꽃(사진)이며, 암행어사들이 꽂는 꽃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리고 실직(實職)을 제수받지 못해도 크게 실망하지 않았던 것은 당시의 관료들 급여가 부를 축적할 정도로 높은 수준이 아니었고, 실제 수입은 소유 토지에서 얻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율곡은 또 어머니인 신사임당과 더불어 세계 지폐 역사상 기네스북감이다. 천 원권*의 최고액권인 5천 원권과 현 최고액권인 5만 원권에 모자가 나란히 들어가 있는 유일한 경우다. 또한 5천 원권 뒷면과 5만 원권의 앞면에는 각각 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와 묵포도도(墨葡萄圖)가 들어가 있다. 이처럼 한 사람의 그림이 고액권 모두에 들어가 있는 것도 세계 초유의 일이다. [*'-권(券)' : 이때의 '-권'은 지폐를 뜻하는 접사다.]
내친김에 몇 가지 더 흥미로운 것을 꼽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도 있다.
1. 소박한 묘비
율곡 선생의 묘비다. 흔히 후손들이 세우기 마련이어서 시호 뒤에 제일 높이 올랐던 벼슬을 적고 그 아래에 본관과 이름을 적곤 하는데 율곡 선생의 경우는 너무 소박(?)하다. '문성공 율곡 이*선생지묘'가 전부. [*참고: 성과 호를 같이 쓰면 안 된다. 즉 '이율곡'이라 적으면 잘못이고, '율곡 이이' 또는 (이 묘비에서처럼 '율곡 이 선생[공]'이라고 해야 한다.]
이걸 다른 집에서처럼 죄 나열하는 식으로 찬란(?)하게 적으면 이렇게 된다 : 시호+작록+직급+본관 및 아호+이름 之墓의 순서.
시호는 문성공이고 실제로는 판서까지 했지만 하사받은 명예직은 판돈녕부사가 최고위직었으므로, 우리도 위의 순서대로 묘비를 작성해 보자. 이렇게 된다: 문성공 숭록대부 판돈녕부사 덕수 이씨 율곡 휘 이공지묘(文成公 崇祿大夫 判敦寧府事 德水 李氏 栗谷 諱 珥公之墓). 여기서 諱는 죽은 어른의 생전의 이름을 뜻하는 존칭어.
율곡의 부인 (곡산 노씨) 묘비도 무척 소박하다: '정경부인 곡산노씨 묘 후재'(後在. '뒤에 있음'을 뜻함). 여기서 '정경부인(貞敬夫人)'은 남편이 종1품~정1품의 벼슬을 한 부인의 작록인데, 율곡의 판돈녕부사는 종1품이기 때문에 부인에게 정경부인이라 한 것이다.
이에 반해, 파주의 2대 명인에 속하는 황희 정승의 묘비(탄현면 소재)는 좀 구색을 갖춘 편이다. 참고로 훑고 가자면 다음과 같다.
비명을 보면, '영의정 익성공 방촌 황희지묘(領議政翼成公厖村黃喜之墓)'라 되어 있다. 여기서 시호 '익성공'이 직함 '영의정' 아래로 내려가 있는 게 눈에 띈다. 본래 시호는 사후에 임금이 내리는 것이어서 직함보다도 위로 가는 게 일반적인데, 이리 표기한 데는 이유가 있어 보인다. 영의정이란 직함이 형식적인 게 아니라, 임금이 실제로 내린 것일 뿐만 아니라 조선 역사상 가장 오래(15년?) 영의정에 머물렀고 사직 상소를 9번 넘게 올렸음에도 황희 정승이 나이 90에 이를 때까지도 세종이 악착같이(?) 부려먹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거사를 강조하기 위해서 후손들이 실직 명을 맨 위에 기재한 게 아닌가 싶다. (황희는 그 아들[황신수] 대에서 공신에 올라서, 부친인 그도 남원부원군에 추증된다. 그것까지 적으면 그때는 '(증) 남원부원군 영의정 익성공'이 된다. 부원군이 영의정보다 윗길이기 때문이다.)
내친김에 율곡의 부친인 문제남(?) 이원수의 묘비도 훑고 가기로 한다. 이원수는 강릉의 처가(신사임당 친정)에 데릴사위로 들어갔는데 공부는 땡땡이 전문으로 기방 출입이 잦았으며 과거를 보러 올라가다가도 풍악 소리가 들리면 그곳으로 발길을 돌리곤 했다. (그런 버릇 탓에 나중에 사임당이 48세에 졸하자, 첩으로 두고 있던 율곡의 동갑내기 기녀를 본처로 승격시키는 바람에 율곡은 아버지와 말도 끊고 금강산으로 입산 수도행+가출을 하기도 했다.)
그러니 그의 과거 합격은 요원한 일. 내리 과거에 낙방하다가 간신히 소과에 급제하여 조운판관(세곡선 감찰직. 8품 하급직) 등으로 머물다가 최고위직이 사헌부 감찰(정7품)로 끝났는데, 나중에 율곡의 부친임을 감안하여 나라에서 고위직을 추증했다. [실은 율곡의 조부 이선도 과거엔 급제하지 못했다.]
이원수의 묘비는 이렇게 돼 있다: 증(贈)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행(行) 사헌부 감찰 덕수 이공 휘( 諱) 원수지묘[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行司憲府監察德水李公諱元秀之墓]. '증(贈)'이란 죽은 뒤 추증(追贈)받았다는 뜻이고, 행(行)은 그와 반대로 실제로 맡았던 직급. 휘( 諱)는 위에서 적은 대로 죽은 어른의 생전의 이름을 뜻한다. 즉 '돌아가신 후 추증받은 직급으로는 좌찬성(종1품 숭정대부)이고 실제로는 사헌부 감찰이 최고위직이었던 덕수 이씨 이원수의 묘'라는 뜻이다. 그래서 신사임당의 묘비도 '증 정경부인'으로 시작되고 있다. 맨 아래에 적힌 부( 祔)는 附와 같은 뜻으로서 한 봉분에 합장한 게 아니라 묘 옆에 붙여서 모셨다는 뜻이다. 즉 봉분이 두 개인 묘를 말한다. 비석 바로 뒤에 보이는 작은 묘가 사임당 묘이다.
2. 자운서원(紫雲書院)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있는 서원으로, 사적 제525호. 화석정 주소와 다른 데서도 알 수 있듯 율곡의 고향과는 약간 떨어져 있는 곳에 조성돼 있다. 율곡 집안의 선산이 자운산인데, 가족묘 등도 이곳에 있다.
자운서원은 사진에서 보듯 앞쪽에 아주 너른 풀밭이 마련돼 있다. 가족들의 간이 야유회 삼아 바람쐬기를 해도 아주 좋다. 율곡 기념관은 서원 맞은편 쪽으로 입구에서 보아 오른쪽에 있다. 율곡 관련 기념품들이 조촐하게 마련돼 있다.
3. 율곡과 신사임당의 영정 논란
김은호 화백이 그린 영정들이 그동안 표준 영정으로 받들려 왔다. 그런데 이에 대해 여러 가지로 고증이 모자란 것으로 뒷말이 있어 왔다. 일례로 신사임당의 경우 가채(얹는 가발)나 옷고름, 동정 등이 당시와 맞지 않고, 지나치게 현대화돼 있다는 지적이 그 대표적. 그에 따라 고증을 거쳐 그린 것들이 이종상 화가(서울미대 명예교수)의 작품들이다.
현재 화폐 도안 등에서는 모두 일랑 이종상 화백의 수정본이 채택되어 쓰이고 있는데, 파주의 율곡 기념관이나 강릉(오죽헌 및 시립박물관) 등에 걸려 있는 것은 모두 김은호 화백의 작품들이다.
**율곡 초상 관련, 화폐 도안 때의 웃지 못할 에피소드
5천 원권 인쇄 때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1972년 원판 제작을 영국에서 했는데 그때 들어간 율곡의 초상이 꼭 외국인 같았다. 그것은 당시 김은호 화백이 와병 중이어서 영국 현지인 드 라 루 측에서 측면화를 제작하여 넣고 인쇄한 탓이었다. 그게 바로잡힌 것은 1977년 교체 발행 때. 그때의 원판은 일본에서 제작하여 들여 왔고, 원화도 이종상 화백의 것으로 바꿔 썼다.
끝으로 아들인 율곡(1537~1584)이나 어머니 신사임당(1504 ~ 1551) 모두 명이 길지 못했다. 자료에 따라서는 둘 다 향년 47세로도 나오지만, 다른 자료들에서는 율곡이 한 해 더 많은 48수를 누린 것으로도 나온다. 어쨌거나 재인박명인 것만은 틀림없는 듯하다. 머리를 많이 쓰면 체력이 빨리 소진되나 보다.
그러므로 나는 앞으로 슬슬 많이 놀아야 하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 머리도 안 좋은 녀석이 자꾸만 머리를 쓰다 보면 명이 더 짧아질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ㅎㅎㅎㅎ. (그래도 이 정도의 머리는 돌아간다. ㅋㅋㅋ)
-온초[10 Apr.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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