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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에서 영면 중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묘역, 국가보존묘지 2호가 되다(1호는 노무현 묘)+ 그의 공과(功過)

[파주 이야기]

by 지구촌사람 2022. 9. 4.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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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에서 영면 중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묘역, 국가보존묘지 2호가 되다(1호는 노무현 묘)+ 그의 공과(功過) 

 

 

사진: 노태우 묘역

노태우와 국가보존묘지

 

2022년 5월 4일, 노태우 전(前) 대통령[이하 편의상 노태우로 약칭]의 묘역이 보건복지부에 의해 국가보존묘지로 지정되었다. 2009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이 국가보존묘지 1호로 지정된 뒤를 이은 국가보존묘지 2호다.

 

전두환보다 28일 먼저 2021년 10월 26일에 세상을 떠난 노태우는 유언장을 통해서 죽어서도 남북통일이 이뤄지기를 염원하고 싶다면서 북녘 땅이 보이는 곳에 묻히기를 소망했다. 장례는 국가장으로 치러졌지만, 그의 소망은 즉시 이뤄지지 못했다. 장지(葬地) 확정 때문이었다. 그동안 파주의 검단사에 임시 안치되었다가 달포가 경과된 2021년 12월 9일에 현재의 묘역에 안장되었다. 

 

사진: (좌) 장지 확정 전까지 검단사에 안치되었을 때의 노태우. (우)와병 중에 늘 애용했던 노태우 담요

 

사진: 국가장이었으므로 안장식 때도 의장대가 참여하여 예를 갖췄다.

 

사진: (좌) 안장식 참석자들 (우)우로부터 노재헌, 노소영, 그리고 김종인. 김종인은 노태우 정부의 경제수석. 안장식 당시에도 가장 바쁜(윤석열 선대위 총괄위원장) 사람이었으나 안장식에 참석. 당시 참석자 중 노 정부 인사 중 최고위직이었다.

 

 

사진: 노소영(좌)과 김종인(우)이 유골함이 안치된 석곽 위에 마지막으로 복토하고 있다

 

국가보존묘지는 ‘장사 등에 관한 법률’ 제34조에 의해 국가장․ 사회장 등을 하여 국민의 추모 대상이 되는 사람의 묘지 또는 분묘 등이 그 대상인데, 국가보존묘지로 지정된 묘지와 분묘는 묘역 면적, 상석ㆍ비석 등 시설물의 종류나 크기, 분묘의 설치 기간 등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이번의 노태우 묘에 대한 국가보존묘지 결정에서 보건복지부는 지정을 위해 국가장으로 고인의 장례가 거행된 사실을 바탕으로 파주시·경기도의 신청 의견, 법무부 등 관계부처 의견과 관계 전문가 자문, 현장 확인 등을 통한 종합적인 검토를 거쳤다고 밝혔다.

 

파주와 노태우

 

노태우의 묘는 현재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로 98 동화경모공원 내 L-6 구역의 최상단에 홀로 위치하고 있는데 크기는 약 8.4㎡(약 2.5평)쯤이다. 전직 대통령의 묘역으로는 매우 작은 편이지만 화장한 뒤 매장하되 묘지를 크게 하지 말라는 고인의 유지를 따른 것이라고 한다. 또 해당 묘지 구역에 배정되어 있는 크기가 그 정도인 것도 함께 작용했다. 하지만 묘역 주변의 잡초들도 방치돼 있고, 당해 구역에 노태우의 묘 1기만 덜렁 놓여있다시피 한 데다 지나치게 검소해서 초라하게도 보였다. 

사진: 동화경모공원 배치도. 노태우 묘역은 전망휴게실 좌측의 L-6 구역 최상단

 

 

사진: (좌) 노태우 묘역 표지판. (우)전망휴게실 전경

 

동화경모공원은 북한을 고향으로 둔 이들을 위해 설정된 특별한 공원 묘원이다. 이곳에는 이북 실향민과 그 후손 외에도 현재는 파주시민을 위한 구역도 배정돼 있다. 작년에 이곳에서 <‘메밀꽃 필 무렵’이 파주로 이사한 사연>으로 다룬 이효석의 묘도 이곳에 있다: https://blog.naver.com/jonychoi/222382118072

사진: 이효석 부부의 묘. 함남 구역 나열 78호

 

북한 땅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는 남측의 전망대 시설은 1992년에 완공된 오두산 통일전망대다[파주시 탄현면 필승로 369]. 이 전망대도 실은 당시 대통령이던 노태우가 비서실에 지시하여 통일부와 협력하여 추진하도록 한 것이 그 시발이다. 그래서 현재도 통일부의 통일교육원이 직할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노태우는 임진각 개설 이후 개발이나 활용이 부진하던 통일동산, 평화누리공원 등의 활성화 등도 챙겼다. 2000년대를 전후하여 속속 가시적 성과를 내게 된 것들도 그 뿌리는 노태우의 그러한 남북 통일 관련 행보들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총체적인 노력이 노태우의 대표적 치적으로 불리는 북방정책이었다. 구 공산권 동유럽 국가들과 최초로 수교했고, 소련에 14억 7천만 달러 규모의 차관을 제공했는데 훗날 차관 회수 과정에서 현금이 모자란 러시아가 현물(헬리콥터)로 갚는 바람에 우리나라에 적성 국가였던 러시아산 군용 헬기가 들어오는 일까지도 벌어졌다. 1992년에 이뤄진 중국과의 역사적인 수교도 노태우 정부가 3년간이나 공을 들인 결과였다. 

 

즉 파주에는 남북통일을 포괄하는 노태우의 북방정책 흔적이 도처에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1992년 그 씨앗의 하나로 이북 실향민들에게 추모의 장을 조성하여 생전에 풀지 못한 망향의 한을 위로하고 통일 염원의 안식처가 될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해 주는 일을 적극 후원했던 노태우가 이제는 그 자신이 그 안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다.

 

공과(功過) 없는 사람은 없다. 노태우도 마찬가지

 

내가 묘지를 찾은 날. 먼저 온 이 하나가 묘소에서 참배하고 있었다. 다가가 이야기를 해보니 서울에서 온 586 출신이었다. 이른바 1980년의 서울역 회군에도 참여한 5월 항쟁파였는데 <노태우 회고록>(2011)을 대하고 나서 그에 대한 공과(功過) 구분을 확실하게 되었다면서, 노태우의 잘못도 크지만 공 또한 작지 않음을 깨닫고 그동안 고집해 온 자신의 속 좁은 시선을 사과할 겸 찾았다고 했다.

사진: 참배객. 서울에서 온 586출신

 

그 뒤 또 다른 가족 팀을 대했다. 노부부와 그 아들이었는데, 참배는 노부부만 했다. 혹시 참배하게 된 사연이 있느냐 물었더니 할머니로부터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전두환 시절에 남편이 술자리에서 전두환 욕을 좀 했는데, 어디론지 끌려가서 며칠을 고생하다 온 뒤로는 입을 닫고 지내던 시절이 계속 됐는데 노태우 시절에 와서는 희색이 돌아왔다고. 그 이유가 뜻밖이었다. ‘노태우가 자신을 소재로 삼아서 개그를 해도 좋다’고 한 다음부터였다. 자신을 개그 소재로 기꺼이 내놓은 최초의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나도 집으로 돌아와 자료 확인을 해보고서야 알았다. 

사진: 참배 중인 노부부

앞서 만났던 586 출신으로부터 간단히 전해 들은 노태우의 치적 중 몇 가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집으로 돌아와 관련 자료들을 확인해 보니 모두 사실이었다. 하기야 그는 <노태우 회고록> 상하 권 모두를 독파한 이였다.

 

- 유엔 가입의 성과 : “우리가 유엔 가입을 신청한 지 42년 8개월, 오랜 기다림 끝에 회원국이 됩니다. 이제 남에 의해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던 어두운 타율의 역사는 끝이 났습니다.” [1991년 시애틀 교민 오찬 연설에서]

 

- 노태우는 1989년 10월 미국 의회에서 영어로 연설한 두 번째의 대통령(맨 처음은 1954년 이승만)일 정도로 영어를 잘했다. 중위 시절 미국 공수단 장기 교육도 받았고, 육사에서 잠시 영어 교관을 하기도 했다.

 

- 독단적인 결정을 하지 않고 참모들의 의견을 잘 들었다. 노태우 정부를 회의 정부라 할 정도로 자주 회의를 열었다. 그때 노태우가 한 말, ‘나는 가장 크게(泰) 어리석은(愚) 사람, 곧 큰 바보이니 여러분들이 좋은 의견을 많이 내 주세요.’

 

- 놀리는 줄 뻔히 알면서도 ‘물태우/물대통령/물통’이란 별명을 스스로 가장 좋아했던 사람: “물 한 방울 한 방울이 모여 큰 바다를 이루는 과정을 보면 물의 힘은 참 크지요. 내게 ‘물대통령’이란 별명 참 잘 지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1989년 프랑스 교민 리셉션 중 별명 "물태우" 얘기가 나오자]

 

- 노태우의 장손, 곧 노재헌의 아들인 노장호는 2번에 걸쳐 현역병을 자원하여 군복무를 마쳤다. 미국에서 태어나서 계속 미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한국어보다 영어가 더 익숙해서 훈련소에서 귀가 조치됐지만, 노장호는 포기하지 않고 한국어학원에서 한국어 교육 과정을 수강 후 자원 재입대하여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 했다.

 

- 전두환과 달리 5.18 민주화운동의 가해 책임자 중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반성과 사죄를 표현하였다. 2020년 5월 18일에는 아들 노재헌이 중환자라 직접 방문할 수 없는 노태우 대신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 40년 만에 ‘13대 대통령 노태우 5.18 민주영령을 추모합니다’라는 리본이 달린 조화를 헌화하였다. 5.18 민주화운동 학살 관련자 중 하나가 직접 제단에 헌화하고 사죄한 것은 그것이 '유일이자 처음'이었다. 사후 공개된 유서에서도 사과의 뜻을 다시 한번 밝혔다. 2021년 10월 26일 사망하였을 때,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이었던 박남선씨가 직접 조문을 왔는데, 그 또한 최초의 사례였다. 전두환은 아직도 마땅한 장지를 찾지 못해(받아들이려는 곳이 없어서) 유해는 자택에 머묽 있다.

 

- 이제는 흔해진 낱말 ‘국민과의 대화’: 그 말을 처음 사용하면서 실제로 계속 시도한 대통령이 노태우였다. 당시 YS와도 매주 정기 회동을 했다. 

노태우는 2013년 추징금 2628억 원을 완납했다. 그 추징금 완납을 위해서 16년간 은행과 소송을 했고, 승소하자 그것으로 추징금을 완납했다. 그에 비해 전두환은 끝까지 966억 원을 미납한 채 세상을 떴다.

 

노태우는 박정희와 기일이 같다. 42년 차이를 두고 한날에 갔다.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른 박정희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국가장 1호인 김영삼의 뒤를 이어 국가장 2호로 치러진 노태우에 대한 공과(功過) 평가는 언제쯤 정립될 수 있을까. 한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시대적 유행 사조에 매몰되어 내려져서는 안 된다. 조선실록에서처럼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집권층이 바뀔 때마다 극단적으로 바뀌는 그런 평가는 역사적 평가가 아니다. 편협한 주관에 휩쓸린 치졸한 인상 비평일 뿐이다. 

한 사람에 대한 총평을 내리려면 그의 인생 전체를 돌아보는 일은 기본적인 의무다. 그런 의무를 건너뛴 채 남들 따라, 시대의 그때 풍조에 따라 성급하게 휩쓸리고 보는 일은 자기 자신을 거품으로 만드는 일도 된다. 자신이 거품인 이들일수록 얕고 좁고 성급하다. 그렇지 않을까. 

위키백과 등에서 궁금한 이의 이름 석 자만 검색해도 한 사람의 인생이 아주 잘 요약돼 있다. 작성자들이 최소한 몇날 며칠 또는 몇 달에 걸쳐 모았을 정성스러운 자료들을 독자는 몇 분 안에 접할 수 있다. 한 인물에 대한 평을 하려면 그 정도의 최소한의 자료 검색은 기본으로 해야 한다. 그런 것조차 건너뛴 채 그저 습관적으로 휩쓸려 떠드는 이들은 시대의 서비스 안주 꼴일 뿐이다. 진짜로 맛있는 안주는 꼬불쳐 두었던 푼돈을 내고서라도 사 먹는 안주다. (끝)

 

- 온초 최종희 (22 May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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