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가본 이들에게까지도 대체로 그 이름이 알려져 있는 헤이리는 두 가지 점에서 특징적이다. 하나는 지명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운영 방식이 독특하다.
헤이리는 그 이름을 맨 처음 들으면 마치 외제 수입품만 같다. 우리나라의 지명 중에 ‘헤’ 자가 들어간 것으로는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한자로 표기가 되지 않는 유일한 지명이기도 하다. 다른 곳들은 본래 고유어 지명인 것들도 일제 시대에 거의 모두 한자어로 강제 변환시키다시피 했다. 본래 이름 ‘애고개’를 ‘아현(阿峴)’으로 바꾸었듯이.
이 헤이리 이름은 파주의 탄현면 금산리 농요인 <헤이리소리>의 받음구(後唱/對唱) ‘헤헤헤 헤허이허어야 에헤 에 헤이리로야’에서 나왔다. 총 8절 중 4절이 이 받음구로 돼 있다.
두 번째의 특징은 인사동, 대학로에 이어 대한민국에서는 세 번째로 ‘문화지구’로 지정된 곳이다(경기도에서는 최초다). 그러니 이 세 곳은 형제간. 문화지구로 지정되면 세금 감면이나 신축/개축 등에서 지방 정부의 지원을 많이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규제(금지 시설)도 있다. 이 헤이리의 공식 명칭은 ‘헤이리 예술마을’이고, 규모는 총 15만 평으로 무척 너르다. 작년에 개관한 국립민속박물관 파주도 그 덕분에 헤이리에 자리할 수 있었다. [이 국립민속박물관 파주 이야기는 이곳에서 상세히 다룬 바 있다: https://blog.naver.com/jonychoi/222859974483]
이 ‘헤이리 예술마을’의 관리 업무는 국가가 아닌 주민 자치 기구에서 맡고 있다. 이른바 ‘헤이리 위원회’에서 마을 총괄 업무를 맡고 있는데 회원으로는 가수 윤도현, 소설가 박범신, 방송인 황인용, 영화감독 강제규, 강우석 등 문화 예술계의 인물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예술 분야에 걸쳐 총 380여 회원들이 있다.
이곳 주민들은 헤이리 예술마을이 문화지구로 지정된 덕분에 지방 정부의 지원을 받아 박물관, 미술관, 서점 등 권장 시설에 대해 취득세, 재산세 등을 50% 감면받는다. 이곳에 권장 시설을 새로 짓거나 기존 건물을 개ㆍ보수하면 건물주는 최대 5,000만 원 융자금의 이자 50%를 지원받을 수 있다.
반면 헤이리에서 문화시설과 관련 없는 상업시설이나 유흥 오락시설 등의 설치는 금지된다. 또한 마을 규칙에 따라 개인이 헤이리에 땅을 사더라도 그중 절반 이상은 공익을 위한 용도로 사용해야 한다. 즉 60%는 방문객들을 위해 개방해야 한다. 이 말은 39%까지는 개인 용도로 사용 가능하기 때문에 개인 주택도 적지 않다는 뜻도 된다. 집을 지을 때도 페인트는 사용하지 못하고 3층 이하로만 해야 하는 게 마을 규약이다.
사진: 대표적 방문처의 하나인 황인용의 Music Space Camerata의 내외부 모습. 음악 애호가이기도 했던 황인용이 지은 음악감상실로서 차 한 잔을 들고 음악을 즐기기에 알맞다.
사진: 세계민속악기박물관. 개인의 열정으로 이처럼 많은 민속악기들을 수집한 노력 앞에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드는 곳.
사진: 이곳에는 러시아의 대표적 민속 악기인 발랄라이카도 있다. 소품임에도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으뜸 조연 역할을 했다. 이곳 내 블로그에서 <파주의 명품 진품> 시리즈에서 특별히 소개한 바도 있다: https://blog.naver.com/jonychoi/222241226037
그동안 코로나19의 거리 두기로 인하여 닫혔던 문들이 활짝 열린다. <2022 헤이리 판 아트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1부(9.1.~9.15)와 2부(9.24~10.2)로 나뉘어 종합 예술 잔치를 벌인다. 실제 행사 기간은 24일간이지만, 어느 때 가도 심심하지는 않다. 연중 상설 전시관과 이용 시설이 적지 않다.
사진: 프로그램 요약
사진: 참가 장소 요도. 이것은 출입구에 비치돼 있는데 꼭 집어들고 들어가는 게 좋다. 헤매지 않고 가고 싶은 곳들을 쉽게 갈 수 있게 해준다.
이 중 대표적인 전시 행사 몇 가지를 대충 보이면 다음과 같다.
사진: 기획 전시 <북 하우스>
사진: 난장판 미디어 아트 전시관
사진: '온 마을이 미술관' 현수막. 온 마을 이곳저곳의 실내외에서도 미술품을 대할 수 있다
사진: 우현아 드로잉 쇼
이 행사 기간 중에는 12군데의 상점에서 방문객들에게 5~50%의 할인 혜택도 준다. 인근에 프로방스의 서구식 주택들을 본따 지어 유명해진 프로방스마을도 있다. 그러나 헤이리를 제대로 훑으려면 하루로도 모자란다.
어딜 가서 뭘 둘러보든 ‘대충 후딱’은 곤란하다. 일례로 성지 순례를 다녀온 사람 중에 자신이 방문하여 증명사진(?)까지 찍어온 곳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그 사진을 보자 지명 대신에, ‘아 거기서 사온 물건 00가 집에 있어’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여행자 자격이 없다. 새로운 곳을 찾아가는 여행은 세상을 향해 열린 창(窓)과도 같다. 그런 여행을 하면서 내면 의식의 개안용(開眼用)으로 안아들고 오는 것이 없으면 여전히 자신의 동굴 안에 머무는 것이나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우리말 단문(短文)의 새 경지를 연 김훈 작가는 가야금을 만든 우륵 이야기인 <현의 노래>를 쓰기 전 국립국악원의 국악박물관을 수십 번 찾아가서 악기 앞에서 한 시간 이상 멀끄러미 바라보기도 했다. 사물에의 응시만으로 새 세상이 탄생되기도 한다. 사과를 응시하던 아이작 뉴튼의 만유인력처럼.
뉴튼의 업적은 현대 과학사에서 거둔 최대의 성과로 지금도 새삼스럽게 받들린다. 어디서나 흔한 중력이 뭐 대단한 것이냐 하겠지만, 시속 1600km(초속 444m)라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자전하는 지구에서 초대형 건물들이 넘어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것도 그 중력 덕분이다. 무중력 상태에서는 사람도 붕붕 떠오르고 변기 안의 오물까지도 공중으로 날아다닌다. [*초속 444m/시속1600km: 이번에 전국이 전전긍긍하는 태풍 힌남노의 풍속이 초속 50~60m로 예상되고 있다. 엄청난 바람이다. 미국의 토네이도 현장 중계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풍속이 초속 35m를 넘기자 그 태풍 속에서 취재하던 기자는 온몸을 밧줄로 묶고 철주에 연결한 뒤에 했는데 초속 50m가 넘자 기자의 몸이 붕 떠올랐다. 대형 여객기의 이륙 속도(지상 최대 속도)는 시속 400km 안팎인데 가장 빠른 자동차 경주인 F1 경기에서도 어쩌다 간신히 기록하는 속도다. 지구의 자전 속도 시속 1600km는 그 네 배다. 제자리에 서 있기는커녕 단번에 수십 킬로로 날려보낼 그 무서운 속도로 빠르게 회전하는 지구에서 우리는 전혀 흔들림 없이 살아간다. 손쉽게 여기거나 잊고 지내는 만유인력(지구 중력)은 그처럼 무서운 현실이다]
지난해 크리스마스에 쏘아올려 인류 과학사에 큰 획을 그은 미국의 최신형 우주망원경 제임스웹이 정지 위성처럼 활동할 수 있는 곳이 라그랑주 포인트(점)인데, 그곳이 바로 태양과 지구의 중력이 평형을 이루는 곳이다. 지난 7월 NASA의 로켓을 이용해서 발사한 우리나라 최초의 달 탐사선 ‘다누리호’는 넉 달 반이 지나야 달 궤도로 돌아온다. 위성의 중량 초과 문제로 중력을 이용하여 라그랑주 점까지 갔다가 돌아와야만 더 비싼 로켓을 사용하지 않을 수 있어서다. 중력의 쓰임은 이처럼 구석구석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우리는 그 영향권 안에서 오늘도 살아간다. 사과의 자연 낙하 현상을 유심히 응시한 뉴튼 덕분임은 말할 것도 없다.
참, 뉴튼은 평생 총각이었다. 세상 사물 응시에만도 바빠서였던 건지... 하기야, 전기 자동차 시대에 접어들면서 새삼 그 이름을 재조명시킨 교류 송전의 아버지 테슬라도 마찬가지로 총각이었다. 후손 배출들에는 빵점이었지만 인류 과학사에 큰 공들은 세웠으니, 우리가 봐주기로 한다. 우리가 잘 봐줘야 후대들도 우릴 후히 봐줄 거 아닌가. 모든 선대는 후대에게 무조건 잘 보여야 한다. 평가는 뒤에 오는 사람들의 전유물이니까. ㅎㅎㅎ. 그러니 자식들한테, 후배들한테, 아랫것들한테 잘들 하세요!
- 溫草 최종희(4 Sep.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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