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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 466]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문득문득 떠오르는 행적들에는 의미가 있다. 이름은 잊혀도 발자국(작품)은 남는다.

유치원으로 간 꼰대의 돌직구

by 지구촌사람 2023. 2. 5.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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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마디 466]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문득문득 떠오르는 행적들에는 의미가 있다. 이름은 잊혀도 발자국(작품)은 남는다.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문득문득 떠오르는 행적들에는 의미가 있다. 이름은 잊혀도 발자국(작품)은 남는다. 그런 이들도 있다. 남겨진 발자국에 더 많은 의미가 담기는 이들이... 어쩌면 그대일 수도 있다.

-온초 생각(5 Feb. 2023)

 

살아가다 보면 그냥 문득문득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으리라. 나도 그럴 때가 있는데, 좀 잦은 편이다.

 

서울농대에서 정년퇴임 후 그다음날로 강원도로 내려가 그동안 짓고 싶던 농사일에 걷어붙이고 나섰던 분, 서울대병원에서 잘나가던 의사로 지내다가 암 환자가 되자 자원 은둔자 생활을 하다가 자연차 요법을 스스로 개발하여 완치되었는데 그 뒤 또 다른 암에 걸리자 그것도 차로 고치게 되자 아예 자연차 전도사로 나선 분, 서울의 모 대학병원 원장으로 왕복 삼십 리가 넘는 출퇴근길을 운동화 신고 다니시던 분... 

이런 분들의 성함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요즘 세상에서야 검색 몇 번이면 알아낼 수도 있지만, 굳이 거명할 필요가 없을 때가 더 많다. 이를테면 수많은 나의 스승들이 매편마다 등장하는 <나의 자연인이다>의 주인공들 역시 그런 쪽이다. 

 

1원짜리 지폐도 있어서 그 돈이면 큼지막한 눈깔사탕을 두 개씩이나 사먹을 수 있던 시절에 군입대 전날 나를 불러내어 백 원짜리 동전을 손에 쥐어 주고 가셨던 내 초등학교의 담임 선생님도 계셨다. (며칠 전 예전 것보다는 크기가 좀 작은 눈깔사탕을 샀는데 하나에 250원이었다. 그걸로만 보자면 화폐 가치가 500배나 낮아졌다는 말인데, 맞는 듯도 하다. 77년도에 400만 원 하던 하숙집 2층 양옥이 요새 20억 원이나 한다니까. ㅎㅎㅎ). 참 나는 그 100원짜리 동전을 쓰지 않고 구멍을 내어 목걸이로 차고 다녔다. 

사진: 60년대 초반에 유통되던 1원짜리 지폐. 세뱃돈이나 특별 애정 표시로, 친척이나 어른들에게서 받았다.

 

한 학년 5반이던 곳에서 성적순으로 배치되던 시절, 중학교 3년 내내 나는 늘 1반이었고 담임 선생님도 늘 고정이셨다. 나중에 그분이 내게 그러셨다. ‘늬 담임을 내내 하고 싶어서 그랬다’고. 짧게 끝난 나의 고교 시절 또한 담임 선생님의 은공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대학 합격자 발표를 보자 마자, 그 선생님을 향해 뛰어갔다. 대학 시절 문제아였던 나를 유치장에서 꺼내오실 때마다 보증인이 되어 주셨던 분은 나의 지도교수이자 나중에 주례사까지 해주셨던, 지금은 고인이 되신 구인환 교수님이었다. 그런 분들의 성함이야 잊을래야 잊을 수 없다. 

 

애써서 국어사전 원고를 마련했는데 그걸 출판해 주겠다는 곳이 없어서 아예 출판사를 차린 보리출판사의 창업자 윤구병 선생. 선생은 출판사가 궤도에 오르자 그걸 선뜻 직원들 공동 소유로 한 뒤 자신은 변산으로 내려가 ‘변산공동체’를 꾸려 친자연 사람두레 생활을 실천하고 있다. 

그런 이들 역시 하나둘이 아니다. 내 친구 원혜영의 부친이자 지금은 작고하신 원경선 님은 그 분야의 선구자 격이다. 풀무원을 사업체로 성공시킨 것은 혜영이지만, 진짜 창설자는 선친이시다. 불도저 시장으로만 더 많이 알려진 전 서울시장 김현옥(‘97년 사망)은 장관까지 했음에도 그 자리를 물러나자 곧장 중학교 교장 자리를 맡아 죽을 때까지 교육자로 일했다. 

 

행적이나 발자국을 작품이라 한다면, 세상에는 세 부류의 명인들이 있는 듯하다: 작품과 더불어 그의 이름도 선명한 사람, 작품보다는 이름이 더욱 또렷한 사람, 그리고 이름보다는 작품이 더욱 빛나는 사람. 이 마지막 그룹이 ‘(사람들에게) 이름은 잊혀도 작품은 남는다’ 쪽이다. 

 

내게도 그런 이들이 여럿 있는데, 두어 해 전에 새삼스럽게 그의 근황을 확인했던 중국 화가 장롱신(張龍新)도 그중 하나다. 그는 현재 가장 긴 그림을 그린 화가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는데, 길이 100미터를 넘긴 <만리장성도>가 그 작품이다. 오래도록 북경의 인민대회당 상부 벽을 굽이굽이 장식하고 있었다. 그는 그 그림의 스케치를 위해 동쪽의 산해관에서부터 서쪽의 가욕관까지 몇 해에 걸쳐 직접 걸으며 장성에서 쪽잠을 잤다. 그와의 만남은 우연히 이뤄졌지만 연결은 오래 갔다. 

사진: 장롱신의 40대 중반의 자화상. 그와 처음 만났던 30대 시절에는 엄청 말라 있었다. 곤궁해서 그런가 싶었는데 몇 해 동안 장성 위에서 제대로 못 먹고 지낸 게 다 회복되지 않아서였다.

 

그는 불우한 천재다. 주류에 휩쓸리지 않음으로, 스스로 그 길을 선택했다. 젊은 시절부터 취향의 품격이 달랐다. 더구나 그는 채색화, 묵화는 물론이고 산수와 인물, 어디에도 모자람이 없었다. 게다가 서예도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 한마디로 팔방미인의 천재였다. 그럼에도 그는 나이 60근방에서 은퇴의 길을 택했다. 그 변이 그답다. 진짜의 나(眞我)를 찾아내고 보니, 오기로 버텨온 예술 행위 자체가 그처럼 부끄러울 수가 없다면서.

 

그에 관한 상세판 이야기는 이곳에 있다: https://blog.naver.com/jonychoi/222242741277. 어느 날 문득 그의 근황이 궁금해서 검색하다가 중국 현지 신문에 난 기사를 대했다.

그곳에도 적었지만 언젠가 내가 여유 있게 중국행 여유(旅遊)를 한다면 빠다링(八達嶺) 아래의 그의 집으로 불쑥 찾아가 그와 술 한잔하고 싶다. 아마 그는 말 대신에 술잔을 자꾸만 건네겠지만...

 

사람들에게 이름은 잊혀도 작품은 남는다. 그런 이들도 있다. 남겨진 발자국에 더 많은 의미가 담기는 이들이. 어쩌면 그대일 수도 있다.

 

-溫草 최종희(5 Feb. 2023)

[하모니카 연주] <오빠 생각>

앞 연주는 하모니카를 익힌 지 얼마 안 되는 초보 냄새가 많이 난다. 귀여우시다 할 정도로. 

여러 곳에서 실수도 하신다. ㅎㅎㅎㅎ

두 번째 연주는 처음과 달리 엄청 씩씩하고 꾸밈음이 지나치게 많다. 그래서도 웃음을 준다.

https://youtu.be/e5ksVAFYdc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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