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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는 나의 힘? No! 안 질투가 나의 힘!!

유치원으로 간 꼰대의 돌직구

by 지구촌사람 2023. 8. 21.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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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는 나의 힘? No! 안 질투가 나의 힘!!

 

​‘질투는 나의 힘’, 그리고 머리끄덩이 잡힌 시구 하나

 

시인은 가도 시구는 남는다. 기형도(1960-1989)가 출산한 '질투는 나의 힘' 또한 그런 경우다. 시구가 아니라 시의 제목이고 그에 해당되는 구절이라곤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뿐이지만. ​

 

하기야 늘 바쁜 사람들은 제목이든 시구든 그 일부만 기억해도 써먹기에 그냥 바쁘다. 전체를 살피는 일은 영양가(?) 없는 한가한 사람들의 짓이기도 하지만, 도리어 잘난척한다고 공격 받기 일쑤니까.​

 

일례로 사람들은 4월만 되면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소리부터 꺼내들기 바쁘다. 그럴 듯해 보이려고... 4월은 그냥 잔인한 달이 아니라 1년 열두 달 중 가장 잔인한(cruellest) 달이라고 첫 구에서 모질게 단언하면서 400행이 넘는 장시를 써내려간 T.S.엘리엇의 <황무지(Waste Land)>를 끝까지 읽어내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그 표현만은 베끼기에 바쁘다. 그러니 그 시구의 진의를 알아보고 어쩌고는 한가한 사람들의 몫이 돼버린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엘리엇의 첫 구 이하를 조금 더 옮겨 적으면 다음과 같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다.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며 /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 봄비로 활기 없는 뿌리를 일깨운다. / 겨울이 오히려 우리를 따뜻이 해주었다. /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고, / 마른 뿌리로 작은 생명을 길러 주었다." [사족: <황무지> 번역판들이 적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서울대 영문과 교수 겸 시인인 황동규의 번역본을 권하고 싶다.]

 

이처럼 시 속의 4월은 그 시대(1922년)의 몰인간적인 현대화가 가져온 암울한 시대상의 압축판으로 따뜻한 11월(sweet November)과 대조적으로 제시된 것일 뿐 실제의 4월과는 관계가 거의 없다. 그러니 실물 계절판으로서의 4월을 두고 그저 의례적으로 ‘잔인한 4월’ 운운하는 건 실소를 머금게 한다. 식물들의 뿌리를 일깨우는 계절 정도라면 몰라도.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도 마찬가지다. 많은 이들은 그걸 질투가 때로는 진짜로 그의 힘이 될 때도 있다고 믿는다. 시의 제목에만 눈독을 들이다 보면. 하지만 시 전체의 내용은 그야말로 무력하기 짝이 없는,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된 내 것을 만들어내지 못한 청춘의 이야기다.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중략]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로 요약되는 작품이다. 다시 말해서 이뤄낸 것 하나 없지만 그런 것들을 질투하는 것으로 그저 희망을 삼았던 과거형의 이야기다. 모름지기 힘이나 희망은 미래를 지향할 때 제몫을 하는 법임에도...

 

기형도는 나이 서른에 삶과 이별한 애처로운 새파란 시인이었다. 지금 살아 있다면 올해 세는나이 예순넷이 되는. 그는 내게 182cm의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콩나물 대가리’로 기억되는 기이한 문학 후배였는데, 그에 관한 짧은 이야기들과 내가 아끼는 그의 시들은 이곳에 따로 담아놓은 게 있다: https://blog.naver.com/jonychoi/221486061871

사진: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본론으로 가자.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많은 이들이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구절에 중독되어 질투를 정당화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걸 푯대 삼아 더욱 질투하는 길로 걷어붙이고 들어서기도 한다. 그 바람에 질투하지 못하는 인생은 정상적인 게 아니라는 생각들도 쉽게 한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질투를 해야 한다면서.

 

그러다 보니 의처증/의부증은 당연 정상 참작 대상이 되어 그 해악은 실제보다도 대폭 경감된다. 그게 얼마나 심각한 심리적 장애인지도 모르거나,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심지어 이혼한 전처의 뒤를 집요하게 쫓기도 하고, 이제는 처가도 아닌 집을 찾아가 남이 된 장인장모에게 딸의 행방을 대라고 패악질을 하는가 하면, 술김에 그 어른들에게 칼부림까지 해서 애꿎은 목숨을 빼앗는 일도 벌어진다.

 

그처럼 질투는 과거지향적이고 비생산적이며, 가장 저급한 행동 선택 중의 하나다. 사랑도 뭣도 아니고, 그저 통제하지 못한 치기(稚氣)에 휘말린 치졸한 시기 행위일 뿐이다. 지나고 나면 지극히 조잡한 하급 행동으로 박제되는, 부끄러운 행적의 하나.

 

자신의 연인/아내/남편이 자신 이외의 바깥세상을 기웃거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자동적으로 질투의 탄창을 끼워들고는 난사해 댄다. 폭언, 폭력이 그 실탄들이고 때로는 그것이 중상이나 살상으로 이어질 때도 있다. 그럴 때, 질투는 과연 나의 힘일까.

 

질투는 나의 힘? No! 안 질투가 나의 힘!!

 

대외적으로 바삐 봉사 활동을 하던 어느 여인이 그 모임에서 자주 눈길을 주던 사내와 눈이 맞았다. 밤 나들이가 몇 달간 이어졌다. 그 뒤 소강상태가 왔고, 여인은 또 다른 사내와 밤 나들이를 했다. 그것도 몇 달 뒤 종식됐다. 그 뒤로 그 여인이 밤 외출을 하는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그 과정을 그 집 남편은 그냥 지켜만 봤다. 아내가 밤 외출을 한다고 하면 잘 다녀오라는 말을 하고는 편히 잤다. 아내가 귀가하는 시각 따위에도 전혀 관심하지 않은 채로.

 

그런 남편을 지켜보던 이가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아내의 그런 행보를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느냐. 사람이라면 당연히 뭔 조치인가를 취했어야 하지 않느냐고 따지듯 캐물었다.

 

그때 그 남편의 대답은 이랬다.

 

...모든 인간은 선택의 동물이다. 눈이 떠지고 잠들 때까지 무엇이고 간에,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선택을 한다. 사랑의 방법이나 상대도 그 선택의 대상에서 예외가 아니다. 사랑에서 여인이 해낸 선택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지 다른 누가 간여할 수 있는 사항은 결단코 아니다. 더구나 그럴 때 그 선택이 타의로 강요된 것일 때는 일시적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지속되지 않는다. 남녀간의 사랑은 오랜 시간을 공기 삼아 호흡하는 것이기도 한데, 그 사랑이 지속적이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럴진대 질투 따위가 거기서 무슨 기능을 해낼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나는 그냥 시간을 주고 기다렸다. 나를 떠나가도 그녀의 선택이고, 돌아와도 그녀의 선택이기에... 한편 나는 그녀의 그런 바깥바람 쐬기도 인생 공부가 되리라 확신했다. 내가 일방적으로 제시하거나 강압하는 그런 공부 따위는 단호하기 그지없는 그녀에게 전혀 효과가 없을 게 분명하므로. 우리 안에 억지로 가둬 둔 야생동물은 문이 열려 있기만 하면 언젠가는 기필코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가는 법이다...

 

이런 앞뒤 얘기를 자칭 질투의 여왕이라는 제3의 어느 여인에게 했을 때, 그녀는 대뜸 이렇게 답해 왔다.

 

“아이고. 지는요. 졸대로 용납 몬합니더. 이유요? 내 자리에 감히 딴 여자가요? 그건 상상도 몬합니다. 죽어도요. 그의 옆에 딴 여자가 있다는 것도 머리통 뒤집어질 일인데 내가 받았던 그 사랑을 그년이 받는다고

요? 세상이 백천만 번 뒤집어진다 해도 그건 눈 뜨고 못 보죠. 그게 질투고 나발이고 간에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딴 여자가 꿰차고 있다는 건 일분일초도 생각하기 싫거니와, 내 대가리가 이해 자체를 아예 거부하는 일이라예.”

 

나는 그녀의 답을 들으며 싱긋 웃었다. 그녀의 답이 재미있어서라기보다는 그 순간 엉뚱한 말 하나가 떠올라서였다. 탕수육을 먹을 때 흔히 ‘찍먹’이냐 ‘부먹’이냐로 나뉠 때 진짜 정답은 ‘(그냥) 처먹어’라는... 그와 동시에 그처럼 저돌적이고 화끈한 직진형 여인이라면 어쩌면 내게 사랑의 기회가 왔을 때, 앞뒤 생각 없이 덥석 안아들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뒤이어 떠올랐다.

 

질투란 건 이처럼 앞뒤가 안 맞을 때도 있고, 거꾸로 배가 맞을 때도 있는 법이다. 그래서 인간사는 수없이 많은 작은 삼각뿔로 짜 맞춰진 공인지도 모른다. 삼각뿔은 가장 뾰족하지만 어디서고 가장 안정된 낱개이기도 하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溫草 최종희(19 Aug.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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